** 세상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떻게 된 것인지? 활자중독도 아니고 도통 온몸으로 말해도 믿지를 않는군요. 어디어디 기획서나 활자로 된 것이나, 활자로된 개념으로 시작한 유행만 믿을 뿐, 도처에 문자중독의 연원은 어디일까요? 주부들의 언어와 아이들의 언어는 속도와 이해도 달리합니다. 아이들이 골치아픈 설명을 믿던가요? 그래요. 판단을 내리거나 결정을 내리거나 하는 위치는 그 뿌리에 근본적으로 치열한 아픔이나 고통이나 현실과 하고자하는 차이에 발생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군요. 그 길로 가면 결코 잘 되지 않는다고 설명할 길이 없군요. 그들의 결정의 칼자루에는 보이는 것만 필요할 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을 가리게 만드는군요.
** 우린 르네상스와 중세-고대(부활한 고대가 아니라)에 서열을 매기고 있죠. 르네상스형 인간의 개념을 부각합니다. 그리고 중세가 얼마나 암담했을까라고 르네상스의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를 서열이 아니라 변화에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어떤 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변화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그 변화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 방향성에 촛점을 두는 것입니다. 이게좋다 저게좋다라고 근거를 갖다붙이지 않는거죠.
** 그래요. 그 관점. 아니 말을 잘못했군요. 그 방향성을 엄밀하게 음미하는 것입니다. 쿠텐베르크의 인쇄술. 성서를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종교개혁의 시작. 그 인쇄술의 문자문화와 이전의 필사문화의 경계선. 인쇄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것은 판화의 복사. 복제개념.
** 시각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청각과 촉각으로 인지하거나 그 영역내에 판단하거나 알 수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모두가 인간을 향해 있던 것을 역으로 인간을 저 변두리로 몰아버렸다는 사실은 동어반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동설만 기억할 뿐. 인간이 저 변두리로 쫓겨난 것을 이야기하지 않죠.
** 이런 시선에 관점에 그 놀라운 통찰로 논증. 아니 논증이 아니라 놀라운 수사를 합니다. 스콜라철학의 대화로 이끌어냅니다. 구어와 문어의 간극. 문어가 기승전결의 단 하나의 주제로 묶어던지지만, 그는 하나 하나 구어로 당신의 심장을 투시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인쇄술의 발달은 독서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균질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균질하게 합니다. 묵독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각 올인은 그 변화를 부족사회의 모든 균질하지 않은 공간을 변화시킵니다. 과학을 예술과 철학에서 떼어내고, 경제를 떼어내고 획일화의 작업은 비단 짧은 역사가 아닙니다.
** 기억력이 좋으시나요. 집전화번호 마저 외울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요? 찰라처럼 지나치는 모든 것에 당신의 불감은 어떠한가요? 그렇게 떳떳하게 마음에서 감정을 떼어내고, 감각을 떼어내 불감하게 된 연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의 생각을 선형으로 이해하거나 획일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 모른답니다. 그 생각의 시작과 이야기의 뿌리는 여기에서 시작한답니다. 늘 그렇듯이 해설서 읽지 마시고, 평전 읽지 마시고, 원전에서 시작하세요. 늘 원전이 쉽답니다. 어쩌면 이것도 구어와 문어의 차이일지도 모르지요.
** 만약, 그런 변화의 관점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떡하죠. 사람은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으로 수반한 것이 그렇다면, 오감이나 육감, 혹 입체적인 판단이나, 그렇게 잔인하게 생긴 불감증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렇게 깊숙히 파헤치고 들어갔으니 아마 그점때문에 고민의 길을 내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책들은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데, 음 주변은 그 이야기를 해주네요. 괜히 횡재한 느낌이네요.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왜 그런지도 어슴프레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 이분법의 연원이 어디일까요? 삼차원의 인식과 이차원의 인식의 우열이 있을까요? 삼차원이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구요? 그래요 볼 수 있을뿐일지 몰라요! 볼 수 있을뿐 느낄 줄을 모르죠. 이차원이 하등이라구요. 이차원에서 공간이 균질하지 않습니다. 3차원은 균질하여 모두가 똑같다라고 하여 볼 수 있지만, 이차원은 모든 공간이 다릅니다. 그 공간과 공간 사이를 사유하고 잇고 늘리고 서로의 관계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사회가 문자가 없는 원시부족사회가 미련하다구요. 비논리적이라구요. 어쩌면 철저히 논리적이고 총체적인식 접근해있습니다. 미래를 장미빛으로 여기는 섣부른 논리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실을 타개하려는 면에서 적확하고 서로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을정도로 함께봅니다. 과거와 지금을 말입니다.
** 조금 진도가 더 나갔네요. 개인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다른 무엇을 생각하기에 그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과 근거는 현란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절반의 강독으로 어줍잖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저에겐 이것만으로도 충격입니다. 홀로주체나 그 서양철학의 나르시시즘의 출발점에도 관심있는 분이라면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손해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알라디너의 흔적이 전혀없어 이렇게 강추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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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스페인에서 저자가 누구인가는 부차적 중요성밖에 가지지 못했다라고 했으며, "독자는 저자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중이 원하는 것"이라는 말과 큰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언어 그것의 매체라는 관념은 사적인 소비자를 위한 매체가 아니라 언어의 공적 신탁자로서의 매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27 현대의 학문은 그것이 과학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인 성격을 주장하지만 그들은 지배적으로 내셔널리즘 속에 속하는 것이었다. 철학도 원래는 내셔널리즘적이 아니라 반 내셔널리즘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 자유주의, 마르크시즘, 그리고 헤겔, 콩트, 니체의 체계와 같은 분명히 반내셔널리즘을 표방한 철학들도 차츰 내셔널리즘으로 기울어졌고, 내셔널리즘적인 것으로 크게 왜곡되곤 했다. 조형 예술, 음악, 문학도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애국자의 산물, 혹은 자존심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내셔널리즘은 현대 세계의 교양 있는 시민의 사상이나 행동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hayes [근대 내셔널리즘의 역사적 발전]
417 Harold Innis 활자 인간은 표현은 할 수 있어도 인쇄 기술의 구도는 읽지 못한다 - "인쇄술의 발견의 영향은 16,17세기의 야만적인 종교전쟁에서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권력을 커뮤니케이션 산업에 이용함으로써 지방어들의 통합, 내셔널리즘의 발흥, 혁명, 그리고 20세기에 새로운 유형의 야만성을 촉발시켰다." "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동시에 그들을 가로막는 것이 되는 모순적인 아이리시 불의 다리처럼,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은 상호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전신은 언어를 축약적으로 만들었고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 간의 차이를 급격하게 확대했다. 앵글로색슨인 세계에서 막대한 영역을 차지하는 소설에서 신문...영화, 그리고 라디오의 영향은 베스트셀러와 그들 상호간에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특수한 독자층들을 만든 것이다."
이니스는 통찰력을 얻고자 시점이나 명성을 포기했다. 관점이 통찰력과 이해 대신에 선행될 때는 위험한 사치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니스는 통찰력을 더 얻게되면 될수록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어 시점을 완전히 버렸다. 이니스는 통찰력을 얻기 위해 모자이크적 구성 혹은 은하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5개 감각들 간의 비율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인쇄의 첫번째 효과는 어떤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어 역동적인 인과율에 대한 통찰력을 정적인 관점으로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니스는 그의 은하계 내의 요소들간의 상호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소비자를 위한 다 만들어진 제품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는 상징주의 시인이나 추상화 화가와 같이 사용자 스스로 조립해야 하는 일체의 재료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설명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비문자적 혹은 신화적 형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357 프란시스 베이컨은 모더니티에 대한 대변자로서 중세에 두 발을 딛고 있었다 - 베이컨은 라블레 rabelais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보다도 응용 지식으로서의 인쇄의 중요성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중세 전반을 통해 자연은 신의 흔적 vestigia dei을 탐구할 수 있는 책으로 간주되었다. 베이컨은 이제 우리가 인쇄의 교훈을 통해 문자 그대로 자연을 새롭게 개선된 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의 백과 사전이 그려진다. 자연의 책이라는 아이디어에 대한 그의 완벽한 수용은 베이컨을 매우 중세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매우 현대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격차는 이것이다. 중세의 자연에 대한 책은 성경처럼 명상 contemplatio 을 위한 것이었다. 르네상스의 자연에 대한 책은 응용 applicatio을 위한 것으로 활자처럼 사용하기 위한 것이엇다. 프란시스 베이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고, 중세로부터 근대 세계로의 전환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콜롬버스 선원들은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 로빈슨크루소의 요점은 응용지식의 서사시다. 인쇄초기에 사람들은 아직 이런 능력을 못 갖고 있었다.
베이컨의 [새로운 유기체 novum Organun] -발견의 힘과 효과, 그리고 결과 등을 관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들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앗던,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기원이 불분명한 인쇄술, 화약, 그리고 자석이다. 이들 세가지는 전 세계적으로 사물의 전체양상과 상태를 변화시켰다. 첫째로는 문학에서, 둘째로는 전쟁에서, 셋째로는 항해에서 그러하였다.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낳앗다. 그러나 인류의 삶에 있어서 어떤 제국이나 종교적 종파 혹은 영웅의 영향이 기계적 발명에 의한 변화만큼 클 수는 없는 것이다.
564 맥루한은 블레이크의 조각과 판화에서 공감각이라고 하는 일종의 촉각성 tactility 을 읽는다. 맥루한으 촉각성이라는 것은 적정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는 감각들이 적절한 상호작용을 할 때의 감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맥루한은 블레이크를 통해 촉각성이 그 이상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맥루한은 상상 imagination 이란 "기술에 의해 물적인 것으로 외화되지 않은 지각과 감각 능력들이 특정한 비율로 합쳐졌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촉각성이란 외화되지 않은 감각내용까지 포함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외화된 감각만이 아니라 외화되지 못한 감각의 '찌꺼기' 혹은 무의식층으로 침전되어 있는 것까지 포함한 전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맥루한이 말하는 촉각이란 5 개의 감각이 적절히 상호작용하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층의 감각들까지 상호작용하는 , 잉여물까지 포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좁은 의미의 '사실'만이 아니라 '상상'까지 포함한 전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촉각성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촉각성은 부족 tribal 혹은 빌리지 village, 즉 촌이라는 말과 밀접히 연결된 것이다. 때문에 부족이나 촌이란 말은 결코 양적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질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고 '사실'만이 아니라 '상상', 즉 환상까지 포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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