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시대의 선비들이 책을 읽고 화선지에글과 그림을 그리면서 기운 생동의 자연 철학을 공부했다면 그들은 책과 글씨 대신에 직접 천문을 헤아리고 풍수를 재며 사람의 병을 진단하는 자연철할을 몸으로 직접 행함으로써 기운 생동을 배운 것이다. 선비들의 방법이 간접적인 진리 탐구라면 벽화 시대의 서생이나 화가들은 직접적으로 진리를 체현하는 방법이다.

선비들은 이런 방법을 야만이라고 했으나 그 방법이 훨씬 더 진리에 가깝게 있었다는 것은 공자의 동이찬양이나 석가의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내력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문인화에 의해 발전된 산수화에 신선에 관한 이야기가 도입되었던 것도 선비들의 신선(동이)에 대한 숭모의 정신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설명적인 그림들은 뒤에 혜원이나 단원의 풍속화로 재생되지 만 결국 혈통적으로 볼 때, 이것들은 모두 벽화 정신의 연장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32. 장이 그림과 채색화 정신)

고분 건축과 같이 습도가 문제되거나 십우도와 같이 벽에 그려지는 벽화는 수분 증발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를 감내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선비의 몫이 아니며 물리학적 지식을 갖춘 전문적인 장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채색의 정신을 새삼 깨닫게 된다. 수묵이 정신을 점령하기 위한 그림이라면 채색은 공간을 점령하기 위한 그림의 방법이다. 공간을 점령한다는 뜻은 서구의 르네상스와 같이 현세(속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서구의 르네상스가 중세의 스토이즘에 대한 반동이라면 우리의 채색화도 수묵 정신의 반동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중세와 르네상스가 수직적으로 대립되어 있었다면 수묵과 채색의 변증법적 전개는 내연과 외연의 수평적인 대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묵이 내연의 긴장이라면 채색은 외연으로 확산하려는 긴장의 미학일 수 있다. 이 두 개의 변증법적 운동 법칙의 골격은 사실상 기운 생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면서도 오늘의 우리 화단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36

 

 

 

 

목차: 한국화란 무엇인가/한국화의 역사적 전개/문인화와 수묵 정신/장이 그림과 채색화 정신/문인화가 한국화로 거듭나자면/현대 한국화, 수묵작업/현대 한국화, 채묵 작업/진지한 채색적 사고/현대 한국화, 인문화 작업/현대 한국화, 추상작업

뱀발. 

1. 일터 일로 목포를 다녀오다보니 세미나에 늦게 도착한다. 나들목을 빠져나와도 시내가 한참 막힌다. 말미 서재필, 단발령, 을미사변, 근대라는 잣대의 모호성으로 인한 개혁에 대한 시각에 물음표를 던지는 꼭지들이 되짚어진다. 행간 [근대]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철학의 눈으로 물음표를 던지면 또 달라진다 싶다. 정치적 사건으로 구획하고 서술하고 있는 부분, 경제적 외형적 성장만을 근대로 부르고 외치는 주창하는 구락부의 사고, 여전히 사회문화적인 전근대?적 습속의 잔존으로 근대적 성과물에 대한 의문도 들고...이런 관점을 흔들며 되돌이켜봐야 하는 [근대]의 다른 보기도 마음에 걸린다.

2. 책방에서 2권 책거리가 끝나고 비교적 일찍 돌아와 이 책을 마저읽다보니 관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수묵과 채색의 관점을 하나로 이어주고 설명해주는 것이 기존의 구분되는 하나만으로 강조되는 강박을 풀어준다 싶다. 채색의 부분은 그림설명이 현실을 보려는 눈이 단일하여, 분석작업이 시야가 획일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지만, 통일적 관점이 끌린다. [그림은 따로 이어 달아야 겠다.]

3. 유홍준 교수의 책과도 겹치는데, 유교수가 사람의 이력과 그림을 동시에 보고 있다면, 현대화 작품을 이런 틀에 의도적으로 맞추려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오히려 더 풍부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애초 현실이란 부분이 설화나 신화로 희석해서 현실의 생생한 모습을 제대로 담거나 그런 작품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