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가 제대로 못하면 작은 강의가 없어지지 않을까 두렵네요. 미셸 푸코를 소재로 삼은 것은 개인적 호감 때문입니다. 또, 푸코는 에코랑 헛갈려서인지 우리에게 왠지 친숙하지만, 실제로 많이 읽히진 않는다는 점도 고려했습니다.
발제문이 10페이지 정도인데 이걸 다 할 순 없겠고, 앞의 세 페이지를 중점으로 하겠습니다. 푸코의 여러 책들 가운데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겠다면 가장 확실하게 푸코를 느낄 수 있는 게 <성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푸코를 이야기할 때 보면 <성의 역사>는 언급이 많지 않고, 대부분 <감시와 처벌>을 다룹니다. 그래서 <성의 역사>의 내용을 발췌해 뒷부분에 첨가했습니다. 푸코는 성의 역사 2,3권을 쓰고 죽는데, 1권과 2권간에는 십년 가까이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푸코의 연구 태도가 바뀝니다. <성의 역사>1권이 이전까지 푸코의 철학적 전통을 압축해 보여주지만, 2,3권은 푸코가 앞으로 하려고 한 연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책장사를 하는 것 같지만, 일단 푸코와 관련된 책들부터 살펴보면요, 푸코가 직접 쓴 책, 푸코의 사상에 대한 해설서, 푸코가 직접 대담하거나 연설한 것을 그대로 옮긴 것, 그리고, 제3자가 푸코의 방법론을 차용해 다른 분야에 적용한 책들로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푸코가 직접 쓴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말과 사물>이 일찍이 번역되어 있는데요, 최악의 번역서 목록에 꼽힐 정도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정우 교수가 <지식의 고고학>이라는 책을 번역했습니다. 이 책은 오역은 많지 않아 보이지만, 독이성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푸코의 인식론적 기반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광기의 역사>는 인간사랑에서 낸 얇은 책과 나남출판에서 낸 두꺼운 책이 있는데 같다고 할 수도 있고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면 푸코가 학위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발표한 것이 <광기의 역사>인데, 미국에서 이를 출판하면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축약을 의뢰했고, 이렇게 미국에서 출판된 것을 번역한 것이 인간사랑의 <광기의 역사>입니다. 나남의 <광기의 역사>는 프랑스에서 출판된 원본을 번역한 것입니다.
<감시와 처벌>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푸코의 책들 가운데 가장 쉬운 편입니다. 푸코의 중기저작에 해당 되는데 박홍규 교수가 번역한 강원대 출판부의 책과 나남에서 나온 책이 있습니다. 둘 다 괜찮지만, 나남이 편집을 더 잘한 것 같네요. <성의 역사>도 나남에서 출판되었는데, 초판과 재판의 번역이 많이 차이가 있으니 최신판을 구입하세요. 그리고, <임상의학의 탄생>이 최근에 다시 나왔습니다. 이 정도가 푸코가 직접 쓴 단행본입니다.
푸코의 강의, 연설을 모아 놓은 책은 굉장히 많습니다. 이 가운데 <담론의 질서>는 대학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문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지식의 고고학>을 해설한 책이라고도 하지만 읽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동문선에서 출판된 책은 모두 강의와 대담집, 세미나 토론문 등입니다.
김영사에서 나온 푸코에 대한 만화책도 있는데요, 푸코를 거의 정신병자처럼 다뤘고 담론의 규칙에 대한 결정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이 밖에 이영남이 쓴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가 눈에 띕니다. 푸코의 방법론을 역사 연구의 태도에 적용하고 있는데, 매우 진지해 보이는 책입니다. 책장사는 이정도로 하죠.
우선 푸코라는 사람이 학문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가부터 보겠습니다. 영미분석철학, 화이트헤드와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이탈리아나 러시아의 기호학 등을 제외하면 헤겔적 전통과 니체적 전통을 현대 유럽철학의 주류로 들 수 있습니다.
헤겔적 전통은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이어져 하버마스까지 다다릅니다. 니체의 계승자는 푸코라 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스승이었던 쇼펜하우어가 헤겔을 경멸했던 기원은 하버마스와 푸코·리오타르 간의 앙숙관계까지 이어지는 것이죠.
이 두 흐름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헤겔철학은 역사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연속적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니체는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고 단절된 것들끼리 부딪치다 급격히 출현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하버마스는 모더니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니체적 전통을 이어받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티의 종언을 말합니다.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준다.
푸코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전통에 영향을 받습니다. 과학철학가운데서도 심리학의 영역, 심리학에서도 대화의 영역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하버마스 역시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지만, 푸코 쪽의 대화는 아닙니다. 푸코의 대화는 담화·담론이라고 특정하게 규정되는데, 단순한 의사소통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들어가 복잡하게 섞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푸코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현대철학 중에 구조주의적 전통이다. 푸코는 구조주의로부터 포스트구조주의로 나아갑니다. 이때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에서 post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post와는 다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post’는 ‘탈’이라고 번역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의 ‘post'는 ‘후기’로 번역합니다.
그럼 구조주의의 발전과정을 잠깐 볼까요? 프로이트, 다윈과 함께 소쉬르의 언어 분석은 이전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쉬르에 의하면 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구조를 지니고, 말과 말이 부딪치는 관계에 의해 다른 의미를 형성하게 됩니다.
구조주의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생각하는 이성을 지닌 인간 주체가 상정되었습니다만, 구조주의의 주장들은 이렇게 데카르트적인 ‘나’ 중심의 사고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소쉬르가 언어의 구조에 대해 말한 이후 여러 분야에서 구조주의가 확장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에서 구조주의를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야만적인 것과 문명적인 것을 대립적으로 구분하지만 야만적 사회에서도 나름의 체계와 규칙이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구조주의적으로 확장합니다. 역사적 유물론의 토대와 상부구조는 단순히 경제적인 생산관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계급구조 역시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중층 구조, 중층 결정됩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으로 확장합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구조 속에 자아의 형성과정을 논하는데요, 푸코가 주체에 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처럼, 라캉은 끊임없이 자아에 관심을 갖습니다. 푸코는 독립된 나라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는 담론이 결정한다고 합니다. 스튜어트 홀에 의하면 나에 관한 세 종류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온전히 나의 의지에 의한 주체적 정체성이 있는가 하면 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상호작용적 정체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생각하며 남의 눈에 의해 나라는 사람을 포장하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푸코의 담론적 정체성입니다. 나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끼리의 얘기와 평가에 의해서 내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라캉도 자아가 본질적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것 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자아가 없고, 6개월 정도 지난 후 거울단계를 거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습니다.
바르트 문학이나 문화에서 구조주의적 분석을 행하면서, 텍스트의 개념을 이야기 합니다.이러한 구조주의적 전통에 푸코가 위치합니다.
푸코의 사상은 크게 세 분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파헤치는 작업입니다. <말과 사물>, <지식의 고고학>등 주로 인식, 지식의 영역에서 구조를 파악한 전반기의 저서가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 ‘개인은 어떻게 앎의 주체가 되는가’,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탐구이죠.
두 번째 분야는 프랑스의 68혁명을 겪고 난후 확장된 연구들이 주로 해당되며, 푸코의 중반기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68혁명 당시 혁명세력 간에도 분열하고, 이 과정에서 담론의 작용을 목격한 푸코는 미세 권력에 대해 연구를 합니다. 푸코의 중반기는 이러한 권력의 작용, 권력이 어떻게 미세하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작업입니다. 주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은 어떻게 권력을 행하고 권력에 어떻게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가, 복종하기도 되는 주체가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 시기입니다. 주체를 구분하고 분할하는 방식들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성의 역사> 1권, 그리고 초기의 <광기의 역사>가 해당됩니다.
세 번째는 고대그리스와 동양적 사유에 감동을 받고 주체에 천착한 시기입니다. ‘개인은 도덕적인 주체로 전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성의 역사> 2,3권에서 다룹니다.
푸코에 관해 흔히 오해되는 것은 푸코가 억압적 사회·억압적 권력구조에 대해서만 주장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 권력자가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푸코의 초점은 특정권력의 억압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생산에 대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권력이 생산 되는가. 그 과정에 주체의 구성이라는 문제가 자리합니다. 도대체 푸코는 왜 그리 주체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철학을 전개하는 태도가 푸코의 매력입니다. 푸코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였고, 천재들이 갖는 자폐적 모습을 지녔습니다. 중학교 때 친구도 없었고, 고등학교 때 자신이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성정체성을 깨닫고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알려져 따돌림을 당하고 스스로 자해를 하여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푸코는 이후 자신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어 합니다. “왜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사람들의 성향이 원래부터 이렇게 고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 처음에는 억압이나 권력의 차원을 보다가. 이렇게 해서는 해결이 안 되겠다 싶어 <성의 역사> 1권을 쓴 다음 미국에서 자유로운 문화를 보고 학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미국으로 가서는 마약에 탐닉하는가 하면 정치적인 태도에서도 실수를 합니다. 철학자로서 푸코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푸코가 살았던 당시의 주체라는 것이 예전부터 동일한 것이 아닌 근대적 주체이고, 근대적 주체는 구성되었다는 것이며, 서구의 근대적 주체는 사회적 담론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푸코의 방법론이 중요합니다. 푸코가 크게 평가되는 것이 그 전에 철학자들이 하지 않은 방법인 고고학과 계보학입니다. 고고학과 계보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고고학은 과거의 특정한 기원이나 지점을 찾는 것이고, 계보학은 현재의 상태가 된 과정을 거슬러 밝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방법론입니다.
푸코는 억압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지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억압이 어떻게 끊임없이 생성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특정한 권력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은 언제나 생성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미시권력의 영역을 하나하나 파헤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푸코의 방법론은 대안이 뭔가라는 비판에 직면합니다.
권력에 대한 푸코의 견해를 결론부터 말하자면, 푸코가 말한 모든 말 중 가장 유명한 다음의 말에 나타납니다. “권력은 도처에 있다. 권력은 단일하지 않기 때문에 저항도 단일하지 않다. 권력이라는 것이 탈 중심화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에 맞서는 대응도 탈중심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푸코의 이 말에는 한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권력이 실제로 하나하나 쪼개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가끔씩 뭉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시권력이 거대권력으로 변화하는 과정, 이것에 대해 푸코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미시권력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미시권력이 있는 동시에 다시 거대독재정권이 생겨나려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푸코는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푸코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푸코는 이런 걸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물에 걸려 있을 때 이 그물이 어디부터 생겼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있는 그물코부터 하나하나 풀어야 나올 수 있습니다. 푸코의 방법론은 그런 하나하나의 미시권력을 파헤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담론구성체에 대해 분석합니다. 담론구성체는 담론들이 형성되는 것도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오게 된 담론들끼리의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상헌은 나쁜 놈이야’라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다면 이것이 처음부터 똑같이 전개된 것이 아닙니다. ‘한상헌 어디서 침 뱉더라’. ‘한상헌 코후비고 있었대’ 이러다 ‘한상헌 나쁜 놈이네’ 하며 형성되는 것입니다.
담론들 끼리만의 작용만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담론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 지금의 시대상황이 들어갑니다. 만약 조선시대 같으면 동성애는 고사하고 동성동본간의 혼인도 천인공노할 짓이었는데, 점차 인정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 조건에 따라 담론구성의 결과가 달라지는 예라 할수 있습니다. 담론의 조건이 달라지면 담론을 구성하는 정체성도 달라집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육체와 규율에 대해 분석합니다. 나라는 것을 규정할 때 데카르트는 이성의 작용에 대해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 중심주의는 오히려 편견과 배열, 구분을 가져왔습니다. 푸코가 이것을 거부하려 신체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권력과 규율은 신체에 직접 작용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푸코는 자기규율이 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을 하면서 벤담이 언급했던 판옵티콘을 끌어옵니다. 판옵티콘의 구조는 감옥을 원형으로 만들어 죄수를 일괄적으로 넣습니다. 그리고 원형 감옥의 안쪽 가운데에 큰 첨탑을 세웁니다. 여기가 간수가 사는 방입니다. 처음에는 밝게 할 수도 있지만 나중엔 첨탑을 어둡게 하고, 원형감옥 각각의 방은 첨탑과 반대 방향의 바깥쪽으로 큰 창을 둬서 햇빛이 통과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간수가 첨탑에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첨탑이 어두워져 간수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간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원형감옥 안의 죄수들은 간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규칙을 지킵니다.
판옵티콘의 예에서 보이는 자기규율성은 자본주의의 원활히 유지되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식입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시공간의 배열과 구분을 통해 효율성을 증가시킵니다. 중세에는 시간이 24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시간을 쪼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시간표를 만들어 여기에 자기 몸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직접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맞추는 것이죠.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데 착취가 당하는 사람은 허위의식으로 지배계급을 정당화한다. 푸코가 보기에 끊임없이 담론적인 것들이 중요하다. 자기규율로 가고 있다 푸코는 얘기한다.
이러한 자기규율에 대한 예로 다음과 같은 것이 떠오르네요. 예전에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대자보를 쓰면 아무데나 붙였습니다. 그런데 자꾸 ‘지저분하다’, ‘대학생으로서의 품위’ 등등의 담론이 작용하면서 급기야 대자보를 붙이는 공간이 구획지워져 그곳에만 붙이는 것이 허용됩니다. 또 철거 날짜를 스스로 기입하게 합니다. 처음에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나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그걸 편하게 여기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규정을 준수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가 이러한 규칙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판옵티콘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더욱 정밀하게 분석되고 있습니다. 원근법의 발명으로 인해 근대적 시선이 발전되게 되었다는 미학적 논의는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파악되는 근대적 시선과 맞닿습니다. 하비에 의해 혈액과 순환기 계통이 파악되기 전까지는 의학이 하는 일은 사람의 신체 외부에서 대화와 생활환경에 대한 상담을 통해 사람의 병을 진단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특히 해부학이 발달하면서 의학적 시선이 직접 배를 가르고 직시합니다. 가시의 영역을 몸속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생에 대한 담론들이 등장하면서,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꼭 손을 씻으라는 등의 행동에 대한 규정들이 생겨납니다.
생명과 관련된 관리는 일상생활을 틀 지우는 것도 있지만, 생명자체에 대한 권력이 가장 무서운 권력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피임, 가족계획이죠. 우리 부모님들은 지난시절 가족계획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지만, 요즘은 또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미덕이 되고 있습니다. 생명조절을 담론이 하고 있는 적나라한 예입니다. 여기서 권력은 생명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인 생산조건의 근본이 됩니다.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은 <성의 역사> 1권에서 주로 다루어집니다.
<성의 역사> 1권의 논점은 ‘성이 억압되어 있다, 억압받고 있다’가 아니라 ‘왜 우리가 억압받고 있다고 얘기하는가’입니다. 라이히가 주장하는 바처럼 성을 해방하기 위한 시도는 새로운 담론을 생성하는 것일 뿐입니다. 푸코는 섹스는 논할 필요가 없고 그 것보다 섹슈얼리티에 대해 얘기하자고 합니다.
요새 우리들은 섹시해 보이고 싶어 합니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이 왜 이렇게 정당성을 갖게 되었을까요? 구성애씨가 ‘아이들의 건강한 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도 섹슈얼리티를 만드는 담론과정일 수 있습니다. 물론 푸코가 얘기하는 것은 예전보다 나빠졌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시와 처벌>에 나온 것처럼, 흉악범에 대해 예전에는 능지처참을 했는데 점점 그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가 있다 없다를 법으로 판명하고 법이 규정한대로 처벌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해서도 과거 중세시대에는 금지되었고 억압되었고, 오직 카톨릭 사제에만 모든 것을 고백할 것이 강요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바뀌어서 성을 예전보다 잘 해방시켜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부부관의 성관계는 좋아야 한다’, ‘미성년을 규제해야 한다’ 처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고 유도합니다. 이런 성의 장치는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주입되고, 나아가서 생명을 조절하는 인구통계학으로 발전됩니다. 성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순화해서 정교해지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성담론 역시 가족을 간섭하여 자기규율로 이끕니다
그런데 <성의 역사> 2,3권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나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양적인 차원, 정도의 차원, 조절해야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고대그리스에서는 소년에 대한 사랑이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고대그리스의 사유방식은 성행위를 건강과 관련시켜 양생술로 파악합니다. 소년에 대한 사랑은 가정관리술과도 이어지는데 지금과는 사유방식이 다릅니다.
당시 그리스에서 남녀관계는 평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때의 결혼은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지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상관이 없이 재산을 관리하고 마나님으로서의 위치에 만족합니다. 단, 남성이 미혼의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안됩니다. 미혼여성은 재산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기존의 가정체계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년과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소년이 바라는 것은 소년 자신의 지위 상승인 것이지, 가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소년도 지위상승에 만족하지 않고 점차 다른 걸 바라게 되죠. 이러한 딜레마에 직면했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더 지고지순한 사랑 즉 필로스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을 도출하게 되었다고 푸코는 분석합니다.
고대그리스인의 사유방식은 기원후가 되면서 점차 변화합니다. 특히 갈레노스에 의해 섭생의 의미가 달라지면서 너무 과도하게 나가는 행위는 안 좋은 특수한 범주로 구분 지으려는 태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혼제도가 달라집니다. 기독교에 의해 일부일처제가 확립되면서 남편과 부인은 서로만을 위해야 한다는 쌍무적 계약관계로 변합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성에 대한 담론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제 성에 대한 것이 게임의 양태로 바뀐것입니다. 스스로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어가고 근대적 주체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질문: 푸코가 사회적 담론에 의해 주체가 형성한다고 했는데 푸코 자신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 그 의문을 깨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그물을 깬 것은 뭔가? 자유의지인가?
- 푸코는 성의 역사 1권을 쓸 때만해도 사회적 담론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고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찾으면서 윤리학이 나온 것이다. 지금 있는 주체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린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질문: 한상헌이라는 사람은 실재하는데 담론상으로는 나쁜 사람으로 형성된다. 사회적 담론은 허상이 아닌가? 그것을 깨닫고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 자유로울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 사회에서 일탈하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원리로서 근대사회를 이룩한 것이다.
토론: 그것은 담론 자체에서 접근하기보다 개인의 인식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동양적으로 보면 공부하는 것이지, 담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했다고 자본주의 구조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나?
- 푸코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으니까 유추해보면 항상 깨려고 하는 것이다. 싸움이 끊임없고 하나하나 계속 할 수밖에 없다.
질문: 푸코의 중심 주제는 서구의 주체가 어떻게 형성 되었는가 인데. 푸코 식으로 얘기해볼때 기존 이론들에 대해 푸코는 자기 이론을 어떻게 전개했나. 맑시즘, 정신분석학 등 이것에 대해 푸코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자기 이론을 전개했나?
- 푸코가 갈라지는 이론의 흐름은 서두에 먼저 얘기했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푸코의 특별한 견해는 별로 나와 있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성의 역사>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주장하는 무의식과 성해방에 대해 담론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 정도, 푸코가 담론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적 환원을 반대한 정도이다. 근본적으로 푸코의 방법이 독특한 것이, 하버마스처럼 다른 사람의 이론을 받아서 그것을 논쟁을 통해 딛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방법론을 가지고 자기가 하려는 것을 파헤치는 것을 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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