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두. 접힌 부분이 길으니 다 읽으려하지 마세요. 말씀드려도 다 보지 않으시겠지만 서두.
0. 문자를 받고 오랫만의 빈시간?(사실 그렇지 않았지만). 종강이려니하고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묵자 시간에 닿으려고 한다. 낮시간 옆의 책 뒷표지에 꽂혀(아래 첫 접힘), 서문을 칙칙한 버스안에서 안경을 벗어가며 읽는다. 가을하늘처럼 선명하기만 한 윤교수님의 다듬고다듬은 글은 늘 간담이 서늘하다. 몇 꼭지 흔적을 남겨둔다. (두번째 접힘)
1. 정신병을 자아-아버지-어머니의 트라이앵글에 가두어 두려는 노력은 허사란다. 라캉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그러니 지젝은 불안하지 않겠는가? 쌓아올린 탑들이. 논의가 확장되거나 다른 쟁점들이 없는 것을 보니 아쉽다.) 아버지의 깊이나 어머니의 깊이나 자아의 확장에 대한 개념없이 환자라는 병실안만 생각하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이나 진단은 별반 쓸모없으리라는 이야기.
시대의 우울과 병리는 안녕한가? 출산율 최저와 자살율 최고, 어린아이어른들 할 것없이 최다우울을 앓고 있는 첨단병리자본주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살아지고 있다. 끊임없이 살아지는 우리의 트라이앵글 속, 일터-그것에 대한 욕망과 소비-자본의 삼각연대 속. 우리는 길들여진 우울증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출발점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다. 옆의 가타리도 아래의 [나와 너]란 책도. 그리고 일상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류도 그런면에서 마찬가지다. 국가와 가족이란 틀을 넘는다. 생각과 이론이...아니 이미 울타리를 타넘고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지금여기로 가져오지 않으려는 두려움들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주춤거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방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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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사람들은 그들에게 '말할 권리'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 붙박여서 기존 질서를 진지하게 위협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이다. 사람들은 노동자계급과 뜻이 맞고 적어도 그들의 관료들과 전적으로 뜻을 같이 하게 되며 '제3세계'의 정객들과 마침내 협력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제4세계'의 요구를 왜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주변성이 주변에서 벗어나고 소수자들이 다수적 합의를 휩쓸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낡은 계급투쟁은 역부족이다. 결국 낡은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고려할 뿐이고 가차없이 잔인한 관료제적 제국들을 설립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더욱 국제적이고 더욱 분자적인 다른 길을 찾을 것이다. 혁명은 민족, 인종, 성, 연령....을 관통할 것이다. 혁명슬로건은 '새로운 삶'의 문제에 더욱 명확히 할 뿐만아니라 삶, 환경, 신체, 욕망....의 양식에 대해서 명확히 할 것이다.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국의 노동자계급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자신들의 쪽에서이지 더 이상 전세계의 배제된 대중들, 초과 착취당하는 여성들, 가족주의적 게토의 어린이 포로들, 기호적 소시지에 붙은 살처럼 취급당하는 젊은이들 쪽에서는 아니다.
이책은 저자가 현실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새로운 분자혁명의 지표를 탐색하려고 한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 윤곽을 제시하려면 이 책은 다른 수준에서 다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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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revolution moleculaire
분자혁명
주류철학에 대한 문제제기; 정통적인 철학계보로 여겨져온 칸트-루소-헤겔-하버마스라는 (다수적) 흐름에 대해서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마르크스-(베르그송)-니체-들뢰즈(가타리)라는 (소수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후자의 흐름이 90년대이후로 소개되고 있지만, 푸코의 소개에서도 보이듯이, 당사자의 사상을 그것도 특정 텍스트만을 달랑 소개하고 필요한 개별 항목이나 개별 아이디어를 착취하는 방식이 되고 있다. 더욱이 이 사상가들이 지닌 실천적인 문제의식과 실천 운동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대안적인 사유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어 소개되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경우에도 점잖은 철학자인 들뢰즈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예 가타리는 부수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들뢰즈를 점잖은 세계에서 현실로 끌어낸 가타리의 그 광기는 완전히 냉동시킨 채, 들뢰즈도 자신은 번개(가타리)를 맞은 피뢰침이라고 했다.
가타리는 라이히가 제시했던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넘어서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제도적으로는 국가와 가족이라는 축은 서구의 현대이론과 운동을 지배해온 것이었다. 이 양자를 단순히 결합하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정치학을 탐색하려는 것이 정치학의 목표였다.
자본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치경제 영역보다는 욕망의 집단적 배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면서, 다양한 예속화 기술 및 제도에 대항하여 새로운 유형의 욕망을 제기해야 한다고 한다.
구래의 정치 조직들이 오랫동안 무시해온 일련의 문제들을 의식화하도록 정치를 열어젖혀야 한다고 한다. 또한 대안적 활동은 환자와 관련 당사자들의 자율적인 감당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혁명이란 모든 소외관계-노동자, 여성, 어린이, 성적 소주자의 소외, 색다른 감성이나 소리, 색채나 사상의 기호와 소외-와 절단하는 문제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혁명은 먼저 욕망에너지를 해방해야 한다. 그리고 이 해방된 욕망에너지가 기존의 지층화를 관통하는 연쇄반응만이 현재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구성체를 재검토하는 불가역적인 과정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타리는 '갑옷'을 벗고 다른 것으로 '되기'를 강조한다.
개인들의 차이를 통합하거나 개인들의 공통성을 보편화함으로써 권력을 만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특이성에, 고유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려는 방식은 권력을 깨고 특이성의 잠재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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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감동하지 않는다. 더이상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깔깔거리거나 숙연해지지 않는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선물과 상품에 뭉클할 뿐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소유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이미 마음은 사소한 것을 위해 쓰는 능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누적되어 쌓이거나 때로 숙성도 되고 발효되리란 생각조차 금기이다. 신을 핑계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천지인 세상에 [그것]을 가지려하지 말고, 마지막 음표처럼 남아있는 낙엽에 온몸이 얼어붙는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
갇혀진 늘 움직이는 생각의 울타리. 몸의 울타리. 쾌쾌하고쾌퀘하고 퀘퀘한 동선의 테두리. 우울만 양산하는 그 울타리의 경계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살아지고살아지고일백번 살아지고에서 살아가고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새로운 삶'이나 살아가는 것의 치유는 의외로 스스로 벗어난 '너'를 대면함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이다. 문득 나를 주춤거리게 하는 '너'의 아름다움들이 당신의 가슴을 채울 때 '너'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욕망하게 된다고, 늘 주체할 수 없는 기다림이 우울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눌 것이 없는 시대. 관계를 만들지 않는 시대. [그것]에 걸려넘어져, [그것]의 늪속에 더욱더 힘어주어, [너]를 품거나 숙성하거나 삶의 엇박자에 대해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한 것에 사로잡혀 말하려고 한 맥락은 소거된 채, 말한 것만 상품처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세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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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ICH UND DU
1부. 근원어
나무는 결코 인상이 아니다. 나의 표상의 장난도 아니고 기분에 따르는 가치도 아니다. 그것은 나와 마주 서서 살아 있으며, 내가 그 나무와 관계를 맺고 있듯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 - 나는 그 나무를 관찰하면서 그 나무와의 관계에 끌려들어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그 나무는 '그것'이 아니다. 15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며 사용하고 있는 사물에 만족하고 있는 한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며, 그의 순간은 현재가 없는 순간이다. 그는 대상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은 있었다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현재는 덧없는 것,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 기다리며 마주 지탱하는 것이다. 23
사물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그것들을 경험하고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념이라고 하는 아래채나 위채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닥쳐오는 허무를 피하며 위안을 찾는다...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근원적 존재나 마땅히 있어야 하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운을 차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상상하고 가정하고 선전하는 '그것-인간성'은 한 사람의 진정으로 '너'라고 부르는 생생한 인간성과 전혀 별개의 것이다. 24,25
'그것'은 영원한 번데기요, '너'는 영원한 나비이다. 다만 이 둘은 언제나 서로 명확하게 분리되는 상태가 아니라 때로는 깊은 이중성 가운데서 어지러이 뒤얽혀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인 것이다. 31
원시인들의 언어의 원형질을 보면 일곱 음절로 된 하나의 낱말문장으로 "두 사람이 원하고는 있지만 자기로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상대방이 하겠다고 나서기를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우리의 분석적인 지혜를 능가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 여기서는 명사나 대명사로 될 인격들은 아직은 부조처럼 두드러져 있을 뿐 완전한 독립성을 가지지 못한 채 하나의 전체성 가운데 깊이 묻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석이나 성찰의 산물이 아니라 참된 근원적 통일이며, 살아 있는 관계인 것이다. 32
달과 마주 서 있는 존재의 체험은 함께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 달의 작용이 동적인 자극상만 그에게 남게되고 이 자극상으로부터 비로소 서서히 작용해 오는 달이라는 인격상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너'가 '그'또는 그여자로 되는 대상화가 된다. 33
원시적인 인식 기능 안에는 "나는 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아직 소박한 형태로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원초적 체험의 분열, 곧 '나에게 작용하고 있는 너' '너에게 작용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생명에 넘치는 시원어의 분열로부터 '작용하고 있는'이라는 분사가 명사화되고 실체화된 다음에야 비로소 단독적인 요소로 나타나는 것이다. 37
근원어 '나-너'의 정신적 실재성은 자연적인 결합에서 생기며, 근원어 '나-그것'의 정신적 실재성은 자연적 분리에서 생기는 것이다. 41
태 안에 있는 우주를 가진 어린아이처럼 정신을 지성과 혼동하여 정신을 자연의 기생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정신의 자연의 정화이다. 다만 이꽃은 여러가지 병에 내맡겨져 있음이 사실이지만, 오히려 인간의 그리움은 정신에로 눈을 뜬 존재자가 자기의 참된 '너'와 우주적으로 결합하려고 하는 것이다. 42
어린 아이는 결코 먼저 어떤 대상을 지각한 후에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있는 것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며 마주 서 있는 존재가 그 안으로 굽혀 들어오는 저 아치 모양을 한 손이다. 그 다음에 마주 서 있는 것과의 관계, 곧 '너'라고 말하는 것의 말없는 전형태가 온다. 그러나 사물이 되는 것은 그 후의 산물이며-'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근원적인 체험의 분열, 곧 맺어져 있던 상대와 분열되는 데 생기는 것이다 45
'나'라는 의식은 아직도 여전히 관계의 짜임 속에서만 나타난다. 즉 '너'에 대한 관계 속에서만 나타나며, '너'를 잡으려고 손을 뻗치지만 '너' 아닌, 식별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모든 '그것 자체'로 향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그것과 자기를 짝지어 또 하나의 근원어를 만드는 것이다. '나'를 의식하게 된 사람. 즉 '나-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여러가지 사물 앞에 서게 되지만, 그러나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것들과 마주서는 것은 아니다. 48
어떠한 배타적인 감정도 없이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을 고립시키거나 또는 우주적인 감정도 없이 관찰함으로써 결합시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타적인 감정을 오직 관계에 있어서만 찾을 수 있으며, 우주적인 감정은 오직 관계로부터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49
'그것'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너'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아무 연관도 없다. 낱낱의 '너'는 관계 사건이 끝나면 하나의 '그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낱낱의 '그것'은 관계 사건 속에 들어섬으로써 하나의 '너'가 될 '수 있다.' 54.55
2부. 사람의 세계
인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정신은 '너'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다. 사람은 허다한 혀로 말한다. 즉 언어의 혀, 예술의 혀, 행동의 혀가 있다. 그러나 정신은 하나다. 정신은 '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다. 정신은 그대의 몸 속을 돌고 있는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 속에서 숨 쉬고 있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너'에게 응답할 수 있을 때, 정신 안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그의 존재 전체를 기울여 관계에 들어설 때 '너'에게 응답할 수 있다. 사람은 그의 관계 능력에 의하여서만 정신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60
오직 '너'에 대한 침묵만이, '모든' 언어의 침묵, 즉 아직 형태가 안 잡힌, 아직 분리되지 않았으며 소리로 되기 이전의 말에서의 침묵의 기다림만이 '너'를 자유롭게 해 준다. 반면 응답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만큼 강력하게 '너'를 속박하고, '너'를 대상이 되도록 얽매고 만다. 61
중국의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가 옥피리를 불었을 때 사람들은 그 피리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신들을 향해 피리를 불었더니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때부터 사람들도 그 노래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그리하여 그는 신들을 떠나서 작품이 없이는 지낼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63
정신을 자기의 향락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은 '나'와 '그것'을 서로 가르는 분리의 근원어 아래 그의 이웃과 공동생활을 정연히 구별된 두개의 구역, 즉 제도와 감정으로 갈라놓는다. 제도는 '그것'의 구역이요, 감정은 '나'의 구역이다. 제도는 복잡한 광장과 같고, 감정은 언제나 변화에 넘치는 규방과 같다. 제도의 영역에서 '나'와 분리된 '그것'은 일종의 골렘이며 감정의 영역에 있어서는 '그것'과 분리된 '나'는 정처 없이 날아다니는 영혼의 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둘은 다 인간을 알지 못한다. 전자는 오직 표본만 알고, 후자는 오직 '대상'만을 알 뿐이다. 둘 다 현재를 모른다. 제도는 제아무리 최근의 것이라 하더라도 굳어 버린 과거를 알 뿐이다. 과거란 이미 끝나 버린 것이다. 감정은 제아무리 오래 지속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덧없이 사라지는 순간을 알 뿐이다. 순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도와 감정은 어느 쪽도 참된 삶에 이르지 못한다. 제도가 공적 생활을 낳는 것이 아니며, 감정이 개인 생활을 낳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공적 생활을 낳지 않는다는 사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고 또 그만큼 고통은 커지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현대의 고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감정이 개인 생활을 낳지 않는다는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이해되어 왔다. 왜냐하면 감정은 가장 개인적인 것 속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그리고 대개의 현대인이 그렇듯 사람이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힌 끝에 결국 감정의 비현실성에 절망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그 절망에 의하여 쉽사리 개우침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절망도 역시 하나의 감정이며 매우 흥미로운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적인 삶을 산출하는 것. 살아있는 상호관계는 제 3의 것, 즉 저 '너'의 중심적인 현재, 보다 참되게 말해서 현재에 받아들여진 저 중심적인 '너'인 것이다. 65-70
병든 시대에는 '그것'의 세계가 더 이상 '너'의 세계라고 하는 살아있는 강물의 흘러들어옴에 의하여 관개되고 비옥해지지 않는다-분리되고 막혀서, 하나의 거대한 늪의 유령이 되어 사람을 압도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여기서 사람은 다시는 자기에게 현재가 될 수 없는 대상들의 세계에 만족해하고, 그것에 굴복하고 만다. 80
모든 법칙에 관하여 목적론적 발전이니 유기적 생성이니 하면서 제아무리 많은 논의를 한다 해도 이들 모든 법칙의 근저에는 필연적 경과, 즉 무제한의 인과율의 광란이 놓여 있다. 교리(도그마)는 증대하여 가는 '그것'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권리 포기인 것이다. 운명이란 명칭은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는데 오직 자유에서 출발한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운명과 만나지 못한다. 85
경과의 교리는 그대를 자기의 장기판에 앉히고 규칙을 지키든지, 아니면 놀이에서 빠지든지 하는 선택만을 하도록 한다. 그러나 전환을 한 사람은 장기판을 뒤집어 말들을 모두 내동댕이쳐 버린다. 이 교리는 그대가 실생활에서는 그것의 제한에 따르면서도 영혼 속에서는 '자유롭게 머물러 있는 것'을 어쨌든 허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환을 한 사람은 이 자유를 가장 부끄러운 예속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숙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숙명에 대한 신앙이다. 이 신앙은 전환의 운동을 억누르고 만다. 86
제멋대로 사는 사람은 믿지 않으며 만나지 않는다. 그는 맺어짐을 모르며 오직 밖에 있는 열에 들뜬 세계와 그것을 이용하려는 자기의 열병 같은 욕망밖에는 모른다. 89
개적 존재는 다른 여러 개적 존재에 대하여 자기를 분리시킴으로써 나타난다. 인격은 다른 여러 인격과의 관계에 들어섬으로써 나타난다. 한쪽은 자연적인 분립의 정신적 형태고, 다른 쪽은 자연적인 결합의 정신적 형태다. 93
관계 속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의 현실, 곧 단지 그에게 닿아 있는 것도 아니며 또 단지 그의 밖에 있는 것도 아닌 하나의 존재에 관여하고 있다. 모든 현실은 하나의 작용이며, 나는 그것을 내 소유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관여가 없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자기 독점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현실이 없다. 관여는 '너'와의 접촉이 직접적이며 그럴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다. 94 관여=마음씀
제3부 영원한 너
계시하는 자가 바로 계시하는 자이다. 존재하는 자가 바로 존재할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힘의 샘은 흐르고, 영원한 접촉은 기다리고 있으며, 영원한 음성이 울리고 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162
후기
스피노자의 말로 번역해본다면, 나는 신의 무한히 많은 속성 중에서 우리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스피노자가 생각했듯이 두가지가 아니라 세가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근원을 이루는 정신성과 우리가 자연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가운데 나타나 있는 자연성 외에 제3의 것으로서 인격성이 있는 것이다.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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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악혼합설. 마음. 1.2와 달리 나누지 않고 접근하는 방법이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늘 '너'가 먼저 있던 것은 아닐까? 너 가운데 나. 들척임들이 풍요로운데 눈짓한번 주지 않아 되려 복잡해지는 것은 아닐까? 겹쳐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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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론 에 대한 논의
공자는 직접 성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논어의 공자말을 해석하면서 공자의 손자인 공자사나 공자사의 스승이 증자를 통해서 성에 대해 논하가 주자에 와서 그릇론으로 성삼품론으로 고착된다.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천성은 곧 천리라는 주자의 성리학으로 이어진 것이다. 성=리=천이란 개념이다. 맹자의 사단. 이에 비해 순자는 맹자의성선설과 공자의 성사품설과 노장의 무위설을 부인한다. 예는 받을 그릇이 아니라 그릇은 도공이 흙을 이겨 만드는 것처럼 인위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 기독교의 원죄설과 다른 것은 악한 성은 신의 은총에 의해 탈출하는 굴레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학습과 노력에 의해 다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성삼품설은 공자의 인간 사품설을 계승하여 인성을 세등급. 즉 귀족계급의 성인지성, 관료계급의 중민지성, 빈천자의 두소지성으로 차별화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유교의 교리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후 성리학은 유학을 철학화하기 위하여 도가의 도와 불가의 주관적인 심, 유가의 객관적인 인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주희는 이것을 석가가 말한 "월인만천月印萬川"으로 설명한다.
다산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본성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성을 기호로 해석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묵자의 인성학습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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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면 인간의 영체 안에는 3가지 이치가 있다. 성으로 말한다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기호가 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성선설이다. 자유의지로 말하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이것이 고자가 깨우쳐준 여울물처럼 터주는 대로 흐른다는 학습설과, 양웅의 선악혼합설이 나온 근거이다. 행위론으로 말하면 선을 행하기는 어렵고 악에 빠지기는 쉽다. 이것이 순자의 성악설이 나온 근거이다. 순자와 양웅은 성자를 오인하여 그 학설이 어긋났을 뿐, 인간의 영체에 이 3가지 이치가 본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상지는 선하고 하우는 악하다는 이러한 성삼품설은 전하에 독이요 만세의 재앙이니, 비단 홍수와 맹수에 그치지 않는다. 총명하게 태어난 자는 스스로 오만하여 성인이라 자만하고, 죄악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노둔하게 태어난 자는 자포자기할 것이므로 개과천선을 힘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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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곧 묵자가 출간된다고 한다. 기세춘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의 출발은 묵자의 삼표론 가운데 관기중국가백성인민지리(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라는 문구의 백성, 인, 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개념의 차이를 연구하게 되면서 전반적인 재검토에 들어가 연구에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문익환목사 15주년기념식에 다녀오시고 내려와 하신 강의 뒤풀이에 하고싶은 말씀들이 많으시다. 당부도, 주문도...기업의생리,자본의 생리에 대해 치밀하고 세밀할 것을 요구하시기도, 스킨십도, 뒤풀이이야기도...4.19뒤 지식인들의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문화적인 공백이 있다 싶다. 좁히지 못하는, 깊어지는 방법도 몇개의 천이 있고 건너야 하는 듯 싶다. 돌아와 책들을 더 들척이다 잔다.
2. 나-너보다 너-나가 낫지 않을는지. 독백이다. 하물며 삶에 까지 개천을 넘는다는 일은 더구나. 그럴까..아닐까...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