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 기독교,파시즘,지식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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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책들이 손에 제대로 잡히질 않느다. 금요일 저녁들이 바람숭숭 들어서 그런지? 온전한 주말을 갖지 못해서인지? 들쭉날쭉한 생활패턴도 일정하지 않은 이유일까? 마음들도 제자리를 하지 못하고 들쑥해서 보리밟듯 밟아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일까? 여하튼 쉽지도 않거니와 출장 오고가는 길도 갈증이 많지 않다 싶다.  지난 금요일 근대사 산책모임도 말미 서울 출장끝머리에 참석하구 밀린 마음들을 나누다보니 금새 밤이 깊다.  주말. 이런 기분처럼 산만하던 책들을 한 곳에 모아 참*로 향해 자원학생을 보내고도 읽히질 않는다. 하루가 또 온전히 지나고 깊은 잠으로 충천이 되고, 계족산의 단풍과 바람, 온몸에 땀을 내고서야 이런저런 느낌들이 평온해진다 싶다.

그렇게 저녁을 마주하고서야 눈길이 간다. 읽다가 중동난 흔적들이 있는 책이다. 허동현-박노자의 갑신정변으로부터, 대원군, 백년에 대한 생각, 양계초-퀑유웨이-모택동과 유교. 사회진화론에 얽히다가 강준만의 요약문으로 접어든다. 친미에 대한 연원도, 기독교에 대한 맹종이 간혹 유교에 대한 반대급부로 요구되기도 하구. 신채호를 비롯하여 20년대 전반까지 환원하여 사고하는 지식인들의 습속. 그리고 일본-유럽-미국의 경험으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사대나 환원이란 가치의 몽매가 드러나고, 급속히 분화하는 지식인들. 기독교에서 불교도, 다변화되는 이념은 급속히 확산된다. 한국의 근대를 읽는 일은 여전히 일본이  和화로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데, 화전양면의 굴곡은 유사한 듯 싶다. 오히려 일찍 한지방에서 번성한 크리스트교에 대한 대단위의 보복이 17세기에 이미 있었던 이유로 잠잠했던 것은 아닐까? 논쟁들 사이로 많이 엇갈린다. 건강한 보수를 자임하는 허동현도, 주제를 두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박노자도, 강준만의 주장하지 않는 요약문들로 인해 아직도 관점이 적어 사실들을 입체적 맥락에서 더 생생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혈을 짜낼대로 짜내고, 극한까지 내몰고 씨앗까지 말리는 역사와 힘의 잔혹함. 어김없이 그 민란과 어려움을 빌미로 가진자들이 거침없이 거세하는 역사의 순환구조는 피비린내가 난다. 가진 것을 더가지려하고 더 배를 불린 뒤에 순환하는 구조. 일본의 현재를 이전의 다이묘가 기업관료로 전화한 것에 불과하고, 부시(무사계급, 사무라이)가 여전히 아무말 하지 않는 일본 기업의 회사원으로 현신했다는 지적이 외려 맞게 들린다.  전쟁의 와중이란 국면이 일직선이 아니라 무한의 굴곡으로 여러 줄기들이 생기지만, 여전히 씨앗까지 말려버리는 거세의 국면이 나타난다. 미국발 경제공황의 여파로 더욱 더 어려워지는 곤궁과 삶은 파시즘의 자양분으로 겹치고, 또 유사한 박자로 구조가 현신한다.

아마추어로, 뿔뿔이 분열된 아마추어 지식인과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이리 저리 끌고다니려고만 하는 누적되지 않은 활동. 사대의 끈질긴 유혹과 끊임없이 남에게서 나를 찾는 집착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는 기복과 흥건한 핏빛 자욱들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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