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더 레프트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와 좌의 직선상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강요같은 것이 질문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현실을 보는 눈은 우와 좌 사이의 다양한 눈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더 스스로 더 극단으로 밀고가려는 노력도 존중한다. 하지만 이런 직선상의 선택과 노력은 자칫하면 혼자만을 기준점으로 하며 직선위의 평면을 만들어간다는 현실을 결여하기 쉽다.
2.
현실의 지평에서 나만이 아니라 나-너의 관계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존재의 한계에서 사고의 지평을 좀더 넓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인정한다면 현실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어떤 레프트를 상품처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고정점을 두고 현실을 달리 사고하고 만들어갈 다양한 씨앗을 품어볼 수 있다.
3.
머리앎이라는 것이 자발적 균형이 아니라 기울어져, 역으로 행동까지 강요한다면, 그것이 어느 덧 당위로 자리매김하여 스스로 구속한다면 계몽은 초라함으로 전락하고 의도된 방향만 남거나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재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몸앎의 영역과 풍부함은 설령 이것이 경제적인 여건때문에 출발했을지라도 다양한 삶의 영역의 기준점이 될 수 있으며 섞이게 할 수 있다.
4.
언플러그의 획일적 적용이나
친환경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식탁의 지구화로 선택이 불가능한데도 가능하다라고 하거나
친환경의 그물에 걸려 가사시간등 물리적인 시간이 더 투여되는 상황이라면
5.
현실이라는 꼭지점에서부터 지금보다 더 좌편향하며, 더 많은 민주주의로 가며, 나만이 아니라 [(나-너)-나)-너)]로 마음이 움직일 수 있다면
6.
가족이라는 자장과 편차는 다양하다. 계급에 따라서 문화적 자산에 따라서 2-3대에 걸친 가족의 문화에 따라서 여건이 다르다. 경제적인 여건도 그러하며 건강도 그러하며 여러 감안해야할 잣대가 다르다.
7.
아무리 그 동선에 벗어나 혼자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설령 현재 우리 안에서 대안을 그려본다고 하더라도 대척점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는 순간 그 가정은 어이없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역시 상품 선택하듯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지점이란 맥락의 깊숙함 속에 각기 다른 꼭지점을 가지며 방향을 달리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역시 대안은 만들어간다는 진행행이나 좀더 확장하면 형용사나 부사로 진화하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8.
여건-처지-관점이란 맥락에 함께 설 수 없다면 역시 기존의 관계이상 나아갈 수 없으면 서로 심정적인 동조에 그칠 수밖에 없다.
9.
계몽의 초라함
지행합일의 강요
진보를 또 다른 과시의 수단으로 파는 것은 아닌지?
뱀발
안다는 것과 앎을 강요하는 것과 앎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앎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느끼는 것과 느낌을 강요하는 것과 느낌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느낌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아프다는 것과 아픔을 강요하는 것과 아픔을 빌미로 행동을 강요하는 것. 행동으로 아픔을 유추하는 것의 간극. 형용사만 달리해본다. 가족의 성원이 다 다르다. 어느 하나를 매도해 끈다면 그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그 반대편만 배울 것이다. 삶은 긴 시간의 누적이다. 앎이 강요처럼 느끼게 되면 더 이상 앎을 필요치 않는다. 앎을 빌미로 궁핍을 강요하면 궁핍의 반대편으로 생각과 욕망은 자랄 것이다. 아픔이 세뇌로 이어진다면, 그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혼자 아는 것이 두렵다. 강요할까봐~. 주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