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 빌린 책들의 늦은 반납, 밀린 책들을 한 곳에 모아본다. 제법 쌓여 일주일간 일용할 양식은 되겠다 싶다. 그리고 건네온 직접행동도 모둠에 넣는다. 주말 건강검진도 미루고 모처럼 토요일 오전 휴식을 취한다. 오후 참*에 들러 이것저것 마무리하고 보내온 과제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돌아와 식구들과 저녁을 맞고 책을 보다 존다. 졸다나니 안해와 아해들이 안방으로 권면하고 잠을 청한다. 새벽을 맞을 줄 알았는데, 누적된 피로는 내달려 해가 한참 제 몸을 익힐 때 쯤에서야 깨어난다. 막내의 목욕탕 행차에 같이 왕림하고 난 뒤,그제서야 직접행동을 이어본다. 목차와 행간, 요약을 번갈아보며 재촉하기도 하고 세심히 살피기도 하면서 부지런을 떨어본다.
그리고 초대받은 잔치는 조촐하지가 않다. 말들은 익고, 들뜨고 목축인 술잔들은 비는데, 마음은 여물지 않는다. 아침, 일터 동선들을 다시 한번 음미해본다. 미동이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입질이 올 듯 말 듯 모호함은 무척이나 피곤하다 싶다. 대안교육이나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들도 직접적인 선택의 문제일뿐, 품평의 여유가 없으며 내 새끼에 걸려 더 이상 논의가 다채로와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목에 걸린다. 더 더욱 예민해지지 않거나 세밀해지지 않아 그 결들을 나눌 수 없음은, 가족이란 장벽에 갇혀 그 이상을 논의로 밀어내지 못하는 일들이 막막함을 키워내는 것은 아닐까?

[가장 보통의 존재]1)로 맥락을 두거나 그 매듭에서 천착해서 사고하는 연습이 되지 않으면, 늘 우리라는 시선은 그 매듭에서 벗어난 별다른 시선이 되기도 한다. 토해낸 많은 말들. 다른 관점. 다른 눈의 요란함. 다른 시선은 숙성되거나 현실로 품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감정의 교감들까지 읽히면서도 여전히 나-너의 생각틀은 무뚝뚝하고 예민하지 못하다. 현실의 다양한 결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읽어낸 현실이 몸의 언어로 바뀌지 않는 것일까? 서로 통하는 말로 바뀌어야 되는 것일까?
뱀발
1. 아무래도 난 더 좋은 부모, 더 잘해주고 싶은 부모가 아닌 모양이다. 더 잘해줄려고 하는 것이 부모욕심이 아니냐구 되묻는다면 더 잘해주지 못하거나 못해줄 수밖에 없는 부모도 생각의 반열에 올려놓아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평균적인 삶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충분히 잘 해줘서 이 모양 이꼴인 것도 사실이다. 부모-자식이란 도그마에 벗어나지 못하는 사고나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서로를 더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도 생각해보야 한다.
2. 1)은 키바님의 글이다. 방년 스물넷 꽃나이의 사회새내기?이다.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되지만 한번쯤 새겨보면 좋을 것 같다. 현재 아*** 사무국 요원?이다. 이은 글은 클릭하셔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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