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의 맛]이라는 것이 요상하다. 마치 음식과 같아서 똑같은 성원, 똑같은 장소, 유사한 시간에 벌어지는 미묘한 차이는 맛도 바램도 그날 기분이라는 향신료에 따라서 그렇게 제맛을 달리낸다. [모임씨앗]도 그렇게 다른 응집력 다른 색깔, 다른 감미 보이는 것을 보면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모임도 어김없이 그러한 것일 수 있다. 모임의 맛과 배부름, 배고픔의 각기 다를 터이지만 풍성과 풍요의 나무에서 그만큼 알찬 수확을 얻을 수 있음을 보면, 없는 곳보다 있는 것, 있는 것보다 풍성한 것. 다다익선이 맞다는 느낌이다.
어쩌면 사람의 결은 지극히 등을 돌리는 날섬도 있지만, 마치 풍경과 같아서 높낮이를 볼 수 있거나 그 넓이를 볼 수 있음으로 인해 다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서로가 시야를 트이게하고 더 넓게 느끼는 진입장벽이나 강박을 스스럼없이 푼다는 것. 인연과 생각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드러나는 사람의 풍경은 새롭고 새로운 시야를 주기도 한다. 밋밋한 산인줄 알았는데 어느 덧 그 사람의 계곡을 접하고 나서야 그 밋밋한 산의 굴곡이 제대로 보이는 현상들은 오묘하기까지 하다.
사람 (人)은 서로 기대지 않고서는 설 수 없음을, 그리고 이 사람인의 중첩은 산(山)을 무척이나 닮았다는 인상이다. 사람들의 절경을 본다는 일 역시 때와 장소, 분위기, 사람들 맛과 생각, 가치들이 우러날 때의 절묘한 조합은 아닐까? 눈과 정신을 망막하게 하는 경치구경처럼 사람구경 역시 깊이와 넓이, 숙성된 고민과 기댐, 설레임들이 서로 충만할 때 좀더 나은 확율을 기약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사적-공적일의 구분/ 그리고 사회에서 섞임: 매듭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어떻게 타넘는가? 그곳에서 새로움도 생겨나는 것이겠지? 활동하는 사람들, 그 문화, 일과 해야하는 일, 마음의 여백, 여유의 그늘이 가질 수 있는 것: 바라보는 사람들, 우리만의 리그, 즐거움은 평이하고 평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골과 산의 유격-그 긴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들. 회색빛 일에 색깔을 넣을 수는 없는 것일까?
* 삶의 연대. 삶의 실뿌리들이 자라 맺게하는 법: 생각의 신경은 현실의 장벽들을 넘어 자라고 있는가? 그 탄탄한 각질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것은아닐까? 모아진 생각이나 고민들, 이 고민들은 현실이란 테두리를 넘으려 시도하는가? 안주하는가? 경제적 현실에 삶을 접목시켜 고민의 신경을 현실넘어를 뿌리내리는 연습은 할 수 있을까?
- [음악]에 대해 뒤풀이 강연(음, 쉽게이야기해 술자리강연)을 건네건네 듣다. 교회음악에 대해서도 그렇고 말이다. 사실인즉 교회알러지가 너무도 강해, 근처에 가보고 싶지도 않은 사고의 결벽증은 문제가 있다 싶다. 그것으로 인해 생긴 연결된 것들에 대한 무지로 이어지거나 마음의 벽이 단단해서 듣기조차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하구 말이다. 그렇게 음의 벽으로 허물어지다나니 알면 더 재미있겠다 싶다.
- 사람들은 이상한 것이 앎은 앎으로만 사귀려하고, 몸은 이런 앎끼리 근친하기에 앎을 몸으로 비하하기도 한다. 각자의 강한 색깔이 있기는 하지만, 운동했다는 것이 활동했다는 것이 이렇게 시각중심주의적인 것과 비슷하게 서로를 녹이지 못하고 서열화시키거나 자기검열하여 서열화하는 것이 편하다는 습속이 여전한 것은 아닐까? 몸도, 앎도 서로의 문턱을 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결국 뒤로 돌아서면 서로의 양면이란 사실은 현실에 녹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게 인식의 하찮음을 개방시키고 서로를 쌓아올리는 인식의 커밍아웃은 왜 쉽지 않을까?
뱀발. 081017 근대사, 081015 미학뒤풀이 081013 참터운*위, 일터 081014, 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