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는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52쪽
 
   


   
  "아내 폭력"은 피해가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해결은 언제나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정치학이다. 55쪽
 
   


   
  연구자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할 때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게 되고" 의미화된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잘 모른다. 69쪽
 
   


   
  연구의 객관성은 연구자가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면서 연구 대상과 부분적으로 동일시할 때 가능하다. 부분적 동일시는 연구자가 상대방의 내적 준거 체계, 그의 구성 개념과 자기 자신의 생각 사이를 자유 자재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의 사고 세계와 타인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융통성 있게 넘나드는 "삼투압" 능력이 필요하다. 72쪽 타인과 대립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구축하는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에게는 어려운 작업일 수 있다.
 
   


   
  희생자화는 타자화와 관련된다. 타자화는 폭력당한 여성을 "일탈"집단으로 볼 때 가능하다. 연구 대상을 타자화, 희생자화한다는 것은 그들이 연구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77쪽
 
   


   
  "불행한 사건을 잊어라"하는 것은 그들에게 불가능한 치유방법을 주문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적인 상처의 치유는 폭력당한 경험에서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재해석할 때 가능하며, 이때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가 된다. 50쪽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어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 재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뱀발 

1. 노인-아이-아내 폭력을 동일선상에 놓고 생각하는가? 노인-아이는 개인의 문제로 아내는 가족과 가부장의 신화로 의식이 감싸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역시 사회적인 문제이고 그런 의식의 장벽(사회적 논리)으로 인해, 노인-아이 피해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해결책들이 나오는 것이다.라고 한다.

2. 폭력은 백해무익이 아니라 백해유협한 것/몸에 붙어있는 논리-유격과 별개의 문제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3. 비정규직도 되고싶지 않은 것, 상상하기 싫은 것이지만 현실. 사회는 눈감아버리고 싶은 것,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으로 여겨 늘 수면아래 있는 것은 아닐까? 타자화하는 일상과 나는 아니라는 의식, 이런 것들이 암묵적 묵인으로 이어져 수면위로 떠오르기 조차 힘든 것은 아닐까?  일이 터진 후에 더 큰 희생을 기다리는 고통의 정치학에 올라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에 있는 문제이면서 당사자는 거론하기 싫어하는, 그렇다고 아무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신의 입장으로 우리의 입장으로 재해석, 재발견해내지 못하는 반복은 아닐까?

4. 운동이, 활동이 엘리트의 시선으로 조금 더 나은, 아니 그렇지 않은 경직된 앎만으로 접근하여, 삶으로 접근못하는 시선으로 더 모르고 경직되고 한발자욱 나아가기 힘든 것은 아닐까?  희생자로 타자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회적 시선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5. 인터넷의 소득별 보급율, 인터넷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이 섞이기나 하는 것일까? 소통의 주류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과 접촉점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

생각꼬리

1. 책을 읽다보니 여러갈래로 생각이 번진다. 비단 아내폭력과 여성운동에 대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접근방법이나 대상과 나의 경계에 대한 고민들에 시선이 머문다. 어쩌면 겨우 존재한다는 것, 열외자, 세칭 민중이란 표현들도 이렇게 구체적이고 생각의 장벽과 실험?의 반복이 없이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란 생각이 스며든다. 그리고 곧곧한 척 경계를 허물지 않는 서투른 자아에 함몰한 나도 그런면에 다른 방향에서 기존의 인식틀에만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앎이란 것이 피상에 피상을 덧붙이거나 머리앎에 머물러 그들의 경계를 들낙거리지 못하는 주춤함이란? 몸앎이란, 희생자나 타자가 아니라 함께 앎을 섞는 과정은 아닐까? 섞다가 서로 모호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붙어 다른 머리-몸-앎이 울릴 때, 그나마 보이지 않던 세계, 넘을 수 없던 세계를 넘을 작은씨앗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2. 폭력에 대한 기억. 말죽거리잔혹사처럼 황당한 중고딩 시절이 아니라도, 늘 팽팽한 긴장은 살아 꿈틀거린다. 군대 구타는 말할 것도 없이 폭력에 앞선 공포가 제일 크다. 몇년전 학운위, 그때 뵌 학부모임원 가운데 한분, 사고소식을 접하면서 기억이 가물했는데, 지난 수첩을 뒤적이다보니 얼굴이 떠올랐다.  사망사건인데 그냥저냥 쉬쉬하면서 소문은 사라져버렸다. 몇번의 만남이나 회의를 통해 안스러운 느낌이 배여나온 것이 사실이었는데, 그 이상은 눈치챌 수 없었다. 맥박없는 눈빛의 신호만이 거꾸로 거슬러올라가 기억될 뿐이다. 폭력은 말이든, 신체에 가하는 것이든 사람을 통해 그 만한 강도로 되새김되는 것이다. 백해무익할 뿐 아니라 백해하고도 늘 위협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동물이 좁은 사육장에 사육되듯, 끊임없이 폭력이란 철조망으로 강하게 자신을 두르고, 언제든지 그 긴장을 표독스럽게 푸는 동물들처럼, 때와 상황을 기다린다. 그래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며, 늘 뺄셈으로만 기능한다. 군대에서 단 한차례도 구타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를 않는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랬다고 하면 더 더구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폭력의 힘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폭력의 충동은 강하고 강열하다. 늘 그것에 몸을 기대면 불쑥불쑥 손짓한다.  언어의 폭력도 그러하다. 감정이 표현되지 않는다면 관계는... ...늘 기운다 수평이 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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