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방 뜨자(作)



주체의 감수성


[아는만큼만 보인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자. [만]이란 토씨를 빼니 아는만큼 보인다라고 하니 조금 나은 듯 싶다. 모임이란 무엇일까? 하나가 아닌 둘, 셋의 연결망이라고 한다면, 모임이 움직이는 경계는 어디쯤일까? 앞의 말을 조금 틀어서 [느끼는 만큼 움직인다]라고 하면 어떨까? 모임주체?라고 하자. 그 주체가 느끼는 것.(반복하지만 혼자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느끼는 것? 때로 혼자느낀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함께느끼고 아파할 줄 아는 것이다.) 그 경계의 안에서 사고하고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모임주체(혼자가 아니다. 연결된 분산능력, 방향에 대한 독자적 사고능력의 다양성)의 감수성과 관련이 짙다.

감수성(혼자 뛰어난 역량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뛰어난 감수성이 아니다. 모임에서 품어진, 숙성된 자각 시스템을 이야기한다.)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을 수 있다.  제한된 시선이나 동선때문에 몇년 뒤에 눈치를 채는 경우도 있고, 느끼는 시선이 부족하여 모임을 향해 눈짓, 발짓, 몸짓이 아무런 느낌없이 통과해버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모임의 감수성을 높인다는 일은 분산과 분권, 참여의 회로를 다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기능적인 일들이 아니라, 지금과 달라지거나 다르게 보는 시선들을 모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을 모으고, 모으고, 모아 발효의 씨앗을 넣고 숙성시킬 것을 요구한다. 사적인 시선이 아니라, 그저 회원들의 숨은 욕망을 대행하는 보험업자가 아니라, 좀더 나은 것을, 다른 시선을 모아...스스로 회원들에게 스며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가서는 길

모임의 감수성, 그 능력을 높이기 위한 일들을 나누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회원들은 서로 색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라는 것과  숙성을 위한 시스템을 단지 모여서 논의한다. 정례회의를 한다라는 정도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결정력이 소수로 집중된 조직이나 모임, 반복되는 사업위주의 모임이나 조직은 대부분 결정이나 집행의 패턴이 소수의 감수성 영역 내에 제한될 우려가 있다. 자각증상이 있거나 감수성을 자라게 하여 달리보는 기술들이 늘어나지 않는 한, 늘 같은 동선내에서 결정되거나 집행될 확율이 크다. 말로만 참여가 아니라 말로도 참여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방향이나 다른 시도에 대한 제언이나 움직임에 대해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3개월치만 따로 차곡차곡 쌓아두어도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처리하거나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색다른 과정과 연결망으로 숙성시켜야 한다. 늘 그나물에 그밥이 아니라, 늘 같은 기획의도를 갖는 같은 색깔이 아니다. 지적성숙이 아니라, 열정이나 행동이나, 문화적 능력이나, 다른 색깔의 톤을 섞는 일이다.

버려진 무수한 시선들, 나뉭구는 무수한 시선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이다. 성원의 동선에 눈길에도 버려진 아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숙성시키는 방법과 과정을 익히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아마 제 몫으로 가져가고 싶어 한다면 모임주체들의 신경망들, 마음 씀씀이의 회로로 연결시켜야 한다. 새로 생긴 눈으로 과연 우리는 다시 느낄 수 있는지? 아파하는 정도가 달라졌는지 확인해보아야 한다.



[숙성하고 토론한다는 일]은 저기를 여기에서 예행연습하는 일이다.

일은 색깔에 따라 나눠볼 수 있다. 고정된 리듬으로 반복되어 행해지는 일과 좀더 다르게라는 레떼르가 있다면, 이 일의 분류에 익숙해져야 한다. 모임의 영역을 키우는 일인지, 모임의 지적역량을 높이는 일인지, 모임의 일들이 지금과 다르게 성원들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일들인지 구분되어야 한다.  구분된다면 자신의 입장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시선으로 그 방향에 대해 360도 다르게 품어보아야 한다. 90도 다르게 논쟁에 붙여보아야 한다. 180도 다르게 토론해보아야 한다. 이 과정이 귀찮다거나 결과만 챙기는데 익숙해져 잠재워야 한다면, [왜 잠재워야 되는가]로  토론내용과 발언자를 달리보는 전제하의 논쟁토론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원이 달라진다면, 모임은 틀림없이 자라고 있는 것일 것이다. 소소수에서 소수로 소다수에서 다수로 진화의 단초는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달리 보는 하나하나의 지혜를 모임의 진행에서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숙성과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확인해보고 싶다면, 왜 같은 일을 똑같이 처리만 하고 있었는지 복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고 남이 말하게 하는 일. 아픔을 함께 느낀다는 것은 참여의 질을 달리하기때문에 좋다. 모임과 성원의 일체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저는 도와만 줄께요와 삶과 연결시키는 또 다른 한쪽으로 자리잡는다는 일은 양과질 모두에서 차이나는 일이다.



따로 또 같이

집권의 향수와, 독재의 향수는 짙다. 분권의 즐거움이 온 몸을 감싸안기 전에도 느끼지 못할만큼 불감증은 짙다. 집중의 독배를 마셔 스스로 죽지않는 이상 영원히 분권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열정이, 나의 앎이, 나의 동선이, 나의 감수성들이 [나-너]를 위해,  모임이라는 저장소에 숙성되고 서로의 것이 될 때. 아주 작은 공적 소유?물이 될 때에서야 이제 아픔과 감수성과 연결된 분권이란 새싹이 돋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서로 마음씀씀이들이 모이고, 꼭지 꼭지 감수성 능력을 높일때, 꼭지꼭지 상상력을 높일 때, 의탁하지 말고 자신의 톤과 삶을 만들어갈 때가 되서야, 대행이란 낡은 문패를 가슴에서 떼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나홀로가고 나홀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습관에서 서로 뿌리내리고, 다른 저기를 향해 아픔도 느낌도 즐거움도 커지는 방향으로 걸음마를 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여전히, 늘 쳇바퀴돌았던 봄여름가을겨울을 맞이할 것이다. 늘 쳇바퀴돌았던 봄여름가을겨울 사람을 만나 늘 봄여름가을겨울만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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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민이 너로 번지지 못하고 참여를 찾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잡생각(酌)
    from 木筆 2009-08-28 18:23 
    >> 접힌 부분 펼치기 >> *두네가 이곳에 다녀간다. 유달산과 갓바위 인근을 돌아다니다 미진했던 곳, 한번 더 보고 싶던 곳에 갈 수 있었다. 사설 성옥기념관엘 들렀다. 진품들을 몇점 볼 수 있어 좋다. 고암의 추상묵화, 윤두서의 그림을 비롯해 추사글씨. 백자. 마음에 점이 박히도록 남는 그림들이 생긴다. 연두부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할아버지 큐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