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여중고생들이 하나 둘 촛불을 들고 나와 시작된 촛불집회가 어느덧 훌쩍 한 달을 넘겨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촛불집회는 청계광장에서 벗어나 서울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웠고, 곧 대전, 부산, 광주로 횃불이 되어 퍼져나갔다.
촛불집회는 그동안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얌전히 청계광장에 앉아 노래와 토론을 나누던 촛불집회는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선보이며 청와대를 위협했고, 서울을 누비고 다녔으며, 집회의 주제는 광우병을 넘어 ‘한반도 대운하’, ‘언론의 공정성’, ‘공기업 사유화’, ‘교육 정책’까지 이명박 정권의 모든 정책을 망라하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활짝 만개한 거리의 직접 민주주의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터넷과 거리의 직접 민주주의’이다. 이 땅에서 처음 펼쳐진, 다양한 요구를 가진 군중에 의한 거리의 직접 민주주의는 이번 집회의 가장 큰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02년 효순․미선양 촛불집회 때 잠시 그런 모습이 보여지긴 했지만, 당시는 참여 대중들과 운동단체 간의 충돌, 대책위의 미숙한 집회 운영으로 ‘직접 민주주의 시도’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건 때 일어난 촛불집회는 ‘노사모’라는 단체가 있었고, 그 지지자라는 테두리가 명확한 집회였으니 이번 촛불집회와는 그 성격이나 주체가 전혀 다르다.
광우병 소 수입반대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지고, 그 집회가 이명박 탄핵을 요구하는 거리시위로 발전해나가자 경찰은 ‘주동자 사법처리’를 들고 나왔다. 정부와 경찰이 좋아하는 그 ‘주동자’라는 단어는 아마도 운동권들이 ‘지도부’라고 쓰는 용어의 경찰식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올해 5월 거리 시위에서 그 ‘지도부’는 없었다. 언론이 쓰기 좋아하는 ‘주최측’도 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민중들과 거리의 직접민주주의와 직접행동만이 있었을 뿐이다.
지난 5월 24일부터 진행된 거리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당일 집회를 진행했던 ‘대책위’와 무관하게 자체적인 토론과 논쟁을 거친 후, 자발적인 결의로 일부는 청계천에 남고, 일부는 청와대로 향하고, 시청으로, 광화문으로, 신촌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이를 막는 경찰에 맞서 싸웠다. 시위가 밤샘 시위로 이어지자 당황한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소위 ‘지도부’를 수배하거나, 구속하려 안간힘을 했겠지만, 경찰은 이 시위에서 수배할 ‘지도부’나 ‘주최측’, ‘주동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뒤 수백 명을 더 연행했지만, 시위대는 “닭장차 타고 서울투어 가자!”며 농담으로 웃어넘겼고, 무차별 연행은 오히려 더 커다란 저항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경찰은 아직도 “주동자 처벌”을 되뇌고, 우익 단체들은 “좌파의 배후 조종 증거가 있다”고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좌파들이 이런 집회와 시위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진작 혁명했을 것이고, 지난 선거에서 이명박에게 참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좌파와 운동권은 현재 상황을 따라가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정황에서도 드러난다. 촛불집회를 거치는 동안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7%대까지 떨어졌지만, 그 사이 지지도가 급부상한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강기갑 의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고, 진보신당에서는 진중권 교수의 온라인 생중계가 인기를 끌어도 그것이 정당의 지지도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정치단체 ‘다함께’는 거리에서 대중들을 ‘지도’하려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왕따를 당하며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 외 다른 정치단체들은 역량부족과 판단 미흡으로 아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현재 이 시위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지,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 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지도하거나, 이끌지 않는다. 누구도 지도받지 않으며, 아무도 동원되지 않고, 행동 지침은 ‘여론’으로 존재할 뿐이다. 시위대 각자는 인터넷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들고 와 거리에서 상황을 함께 판단하고, 논의하고, 결정하고, 집행한다.
집단적 피드백 의사결정 구조 네트워크
이런 시위와 조직 형태는 과거 유럽의 68혁명을 다룬 서적에서 드문드문 보이기도 했지만, 현재 발간된 사회과학 서적 중에서는 이런 형태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경우를 찾기 힘들다. 80년대 ‘혁명’에 대한 책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시대에도 ‘당’이라던가, ‘전위’, ‘지도’ 등에 대해서 다룬 책들은 많았어도, 대중의 직접 행동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있다면 아마도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 정도일 것이다. 로자는 ‘전위’와 ‘지도’에 집착하는 레닌의 ‘민주집중제’에 대해서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통해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자연과학 쪽에서는 이런 ‘현상’을 다룬 책들이 연이어 출판된 적이 있었다. 이런 형태의 집회는 <이머전스>(스티븐 존스 지음, 김한영 옮김, 김영사), <링크>(A.L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김기훈 옮김, 동아시아),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지호)에 잘 표현되어 있다. 물리학에서 나온 카오스 이론을 사회학에 적용한 이 책들은 공통적으로 “집단내 각 주체가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집단적 피드백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조직 체계가 일원화된 하향식 명령체계보다 훨씬 안정적이며, 효율적이고, 지능적이며, 변화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을 다시 풀어쓰면 “지도부나 지도자 없이, 참여자 각자가 토론하고, 결정해서 각자 움직이는 체계가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며, 지능적이고, 변화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 <이머전스>는 국가와 자본에 맞서 다양한 요구를 가진 민중들의 행동양식으로는 집단적인 피드백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조직 체계, 즉 현재의 촛불 시위대가 활동하는 형태가 가장 적절하며,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링크>는 ‘알 카에다’의 조직 형태를 언급하는데, 조직 자체가 중앙이 없는 네트워크 조직이라 흔히 지도자라고 알려져 있는 빈 라덴을 잡더라도 조직에는 거의 아무런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동안 거의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체포되었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는 현재의 촛불 시위대를 그대로 표현하는 문구처럼 보인다. 시위대를 체포하더라도 그들간의 소통구조가 유지되는 한 시위대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혁명 등 집단적 격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웅이 아니라, 임계상황(스트레스가 극한에 달한 상황)과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의 긴밀한 상호 피드백이라고 말한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외부로부터의 식량파동과 석유파동이라는 악재에 덧붙여서 내부적으로 쇠고기 수입 고시, 대운하 재개, 교육자율화, 물가인상, 민영화라는 자체적인 땔감을 계속 부어주면서 총체적인 스트레스를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시켜주고 있으며, 촛불 시위대는 인터넷과 핸드폰으로 끈끈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집회 현장에서 더할 수 없는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다. 한마디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열린 군중과 닫힌 군중
한편, 시위대의 움직임과 양상은 <군중과 권력>(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 박병덕 옮김, 바다출판사)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군중과 권력>의 ‘열린 군중’에 해당한다. 열린 군중의 특성은 개방적이고, 폭발적이며, 더 많은 군중이 모일수록 더 강력해지지만, 지속성이 떨어진다. 열린 군중은 순식간에 ‘방전’한 후 흩어진다. 그에 반해 노동조합이나 군대 같은 ‘닫힌 군중’은 폐쇄적이지만, 지속성을 갖는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열린 군중을 닫힌 군중이 받쳐주며 지속성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닫힌 군중이 잠시 깃발을 내려놓고 그 열린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닫힌 군중이 현재의 집단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받쳐주며, 한 번의 방전으로 멈추지 않도록 받쳐줄 때야만 이 군중은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닫힌 군중 역시 열린 군중 속으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즉, 닫힌 군중이 열린 군중화 되어야 한다.
열린 군중이 되어야 한다
깃발과 조끼로 스스로를 닫은 군중은 열린 군중으로부터 분리되어 버린다. 스스로 폐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의 열린 군중은 그들과 하나가 될 수 없다. 닫힌 군중이 집회를 이끌어 나갈 때 열린 군중은 그 집회에 어울릴 수 없으며, 열린 군중이 이끌어가는 집회에서 닫힌 군중들은 열린 군중에 의해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 촛불집회에서 정치 단체들이 대중들에 의해 배척당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군중이 되지 못하는 개인과 단체는 절대로 그 군중을 이해할 수도 없고, 군중을 대상화하는 순간, 그는 혹은 그 단체는 더 이상 군중과 소통할 수 없다. 현재 이명박 정권이 시위대의 요구나 형태를 전혀 이해 못하고 계속 헛소리와 엉뚱한 대책을 늘어놓는 것이라던가, 운동 단체들이 분위기 파악 못하고 ‘삑사리’를 놓았던 것은 바로 그들이 군중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지도를 거부했고,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닫힌 군중을 배척했다. 이런 형태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단체들이 바뀌지 않는 한에는.
지난 2002년에는 집회 대오가 닫힌 군중과 열린 군중으로 분열되는 순간, 열린 군중은 해산해버리고, 결국 닫힌 군중만 쓸쓸히 깃발을 날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당시 닫힌 군중들은 열린 군중과 충돌하며 열린 군중을 몰아냈던 것이다. 당시 단체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했던 촛불의 몰락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촛불 이후
언젠가 이 촛불행진도 서서히 사그러들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은 각자의 학교로, 직장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지만, 모든 이들에게 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더라도 이명박 정권에게는 (혹시 정권이 살아남는다면)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게 될 것이며, 운동진영에는 큰 숙제를 던져주게 될 것이다.
촛불 집회에 참여했던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어쩌면 ‘군중심리에 휩쓸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탓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좀 더 근본적인 변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단체에 가입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청소년 운동을 변화시킬 것이며, 대학생 운동이나 환경운동, 시민운동 혹은 계급운동을 다시 부흥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제는 분명하다. 운동진영이 바뀌어야 한다. 최소한 의사결정구조와 집행체계부터라도 바꿔나가야 한다. 이제 운동의 민주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68년 이후 유럽에서 기존의 정치단체들이 괜히 몰락의 길로 빠졌던 것이 아니다. 80년대 이래로 국내 운동 단체들은 의사결정 구조와 집행체계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의제도와 관료주의만 강화시켜 왔다. 촛불집회가 한창 열리고 있는 지금도 노동조합의 집회에 가보면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위 ‘짱’급들이 마이크를 주고받으며, 운동가요 두세 곡 부르고, 구호 한두 번 외치고, 결의문 낭독.
지난 2002년 촛불집회 이후에도 여러 단체들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많은 토론과 실험이 있었지만,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경직되어버린 단체들은 자신들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를 이 촛불집회에서 보고 있다. 대중들은 이미 운동단체들을 현재 진행되는 촛불 집회의 방해물로 판단했다.
이 촛불집회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변화하지 못한 단체와 운동이 수 년 내에 역사의 유물로 사라져 갈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누구도 지도하지 못할 그 구태의연한 지도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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