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마지막 [니체에서 세르까지]와 [포월과 소내의 미학]을 읽고 있다. [니체에서 세르까지]는 1994년 출판된 것인데 포월, 기우뚱한 균형이란 개념이 일차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개념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지난해 시민사회단체 발표가 배재대학교에서 있었고, 권**교수님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여 진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포월과 소내의 미학]은 이런 이론을 미학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로 읽힌다.


1.

몇권 읽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저어하다.  두 분의 말들이, 개념어들이 혹자는 한자어란 강박이 있는 듯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박제화된 학자분들의 말보다 훨씬 쉽다. 쉽다는 표현도 만만치 않은 말이므로 고치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다른 외래어개념어보다는 덜 서걱거린다는 뜻이다. 생각길을 덜 어렵게 그래도 상대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저기 다른 개념어들의 혼란으로 무화되기 쉽상인 생각길을 가면서 중동날 위험이 줄어들어 잇기 쉽다는 뜻이다.

2.

자신의 말과 생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학자들의 권위나 인용된 말들의 뒤에 꼭꼭 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로 생각들이나 말씨들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이 인용된 사람의 말인지 저자의 말인지 헛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3.

삶과 세상을 밀착시킨다.  자아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동난 자아와 학문을 수습하며 지금과 여기에 끊임없이 밀착시키는 사유를 한다는 점이다. 이를 메우기 위한 많은 개념어들이 우리말과 복합어들로 충만해있다. 삶, 마음, 결, 탈, 앎.... 그리고 갇힌 사유를 벗어나는 겹말들이 싹들처럼 솟는다. 이 말들에 눈여겨보거나 마음 속에 가져가야 할 일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패턴과 기우뚱한 균형. 그물. 그물망. 그물코. 사이길

4.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그 말들이 영화, 미학, 비평으로 번진다. 그 호흡 역시 유사하면서 깊어진다.

5.

 


-1.

어쩌면 인문학을 한다는 것이, 실험을 하지 않고도 앞을 미리 가보는 학문이 아닌가 한다. 앞을 가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혹 다른 견해가 있을 법 하기도 하다. 과학이 늘 먼저간다는 불평이 있겠다. 하지만 어쩌면 과학은 이것 저것 증명해내느라 가장 뒷처리를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자본의 욕망으로 충만한 세상이 과학을 제일 앞에 세우니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가볼 수 있는 길들을 확인도 하지 않고, 제 멋대로 가다보니 이것이 길인지 낭떠러지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리 가볼 수 있는 길에 대한 사유가 목마르고, 가 볼 수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는 세상이 제정신이 있는 세상인가 싶기도 하다.

-2.

남의 말로 생각길을 가는 일들은 몹시 힘들고 버겁다.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독특한 색깔이 있다. 조금 다르게 사용하지만, 이 말이 내 생각을, 아니 합의가 된다면 나-너의 생각길에 대한 산책을 몹시 깊게 할 수 있게 한다. 다른 언어를 빌려쓴다는 일이 우리생각을 자라게 하기에 너무 많은 장애를 갖게하는지도 모른다. 서툰 외래어로 논쟁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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