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교수님의 번역서인데 1998년, 머레이북친에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번역하였다고 한다. 머레이북친은 자신의 사상을 200여쪽으로 제대로 알리기 위해 다시 저술하였다고 한다. 읽는 내내 놓칠 수 없을 정도로 빨려든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박홍규교수님의 해제로 인해 관점이 단순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읽고 싶다면 원문을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몇가지 관심이나 쟁점을 포함하는 것을, 아래에 옮겨쳤다. 계룡산의 실루엣이 보기좋았지만 병실이 웅성거리거나 글이 잘 들어오지 않을 때 이렇게 아무생각없이 옮겼다.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 원제는 Remaking Society] 원제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정작 원서로 찾아보니 없다.
[여기에서 저기로]의 이행은 극적인 제스처가 아니라, 가혹한 [과정]이다. 그것은 방향 감각을 찾기까지는 언제나 불확실성, 실패, 탈선, 논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기본적인 사회 변혁이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증도 없다. 현대 혁명가는 19세기의 위대한 러시아와 프랑스 혁명가들과 같은 과거의 고결한 이상주의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후세대가 직면할 거대한 변혁을 목격하고자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위하여 스스로의 생활,헌신, 확신의 보기를 제공했다. 혁명에의 집념은 세계의 변혁을 추구하는 천직만이 아니라, 전혀 의미 없는 세계에서 값싼 보수의 유혹과 지위의 약속에 의해 인간의 인격 그 자체를 손상시키는 타락된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개인성을 구출하고자 하는 내면적인 충동이기도 하다.
새로운 정치가 창출되어야 한다. 곧 의회주의의 올가미와, 교육적이라기보다도 자기 권력 확대적인 미디어적 계략의 [포럼]이라는 즉흥적인 만족감을 회피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창출되어야 한다. 새로운 정치는 개인의 주변환경 – 사람들의 주택상태, 이웃의 여러문제, 교통시설, 경제조건, 환경오염문제, 노동현장의 상태 –를 둘러싸고 구조화되어야 한다. 지역센터, 협동조합, 농업센터, 그리고 마지막 주민회의라는 형태로 권력을 점차적으로 이웃과 자치단체로 이전시켜야 한다.
248쪽
[여기에서 저기로], 곧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이행은, 오랜지적 및 윤리적인 준비 기간없이 돌연히 생기는 폭발적인 변화가 아닐 것이다.
246쪽
우리시대의 가장 중대한 비극은, 우리가 더 이상, 기술을 윤리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스 사상은 높은 품질과 예술성을 갖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직인과 그가 만든 물건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포함하는 도덕적인 욕구라 주장했다. 실제로 수많은 부족민에게는 물건을 제작한다는 것이, 원재료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고, 활석, 대리석, 청동,기타의 재료에 [소리]를 넣은다는 것, 곧 그 잠재 능력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일소했다. 실제로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후자에 대한 전자의 윤리적인 어떤 책임감도 제거했으며, 기타 모든 윤리적 또는 도덕적인 책임을 무시했다.
기업이 찬양되는 이유는, 단지 다른 기업보다 덜 탐욕스럽기때문이지, 그 영업이 본질적으로 선하기 때문이 아니다.
244쪽
거대도시,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마구 뻗어나가는 도시 벨트 지대는 문화적인 균일성, 개인의 익명성, 권력의 중앙 집권화를 초래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수자원,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그것이 점유하는 지역의 모든 자연적 특징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부담을 주고 있다. 현대의 도시 생활에 의해 초래된 교통 혼잡과 소음 및 스트레스는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갖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에 공헌하고, 공동체적인 연대를 형성해 온 도시는 이제 사람들을 원자화시키고 있다. 도시는 이른바 인간의 근접성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을 은폐시키는 장소이다. 공포가 사교성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고, 조잡함이 연대를 침식하며, 사람들이 과밀한 주거에 강제되고, 교통수단과 사무소 및 쇼핑센터가 개인성의 감각을 파괴하며, 인간 조건 전반에 대한 무관심이 조장된다.
거대도시를 인간적 규모의 지역사회로 분산화하는 것은 생태적으로 건전한 사회에 불가결한 것이다.
238쪽
도시가 과거에 정의 가능한 인간적 규모의 실체를 집어삼키고 있으며, 시민은 대표를 선출하는 이름 없는 [선거민]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세금을 내는 것이고,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귀찮고 무미건조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며, 아이를 낳고, 모든 정치 생활로부터 예의바르게 물러서는 것이다. 한편 정치 생활은 국가와 그 관료에 위임되는 영역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왜곡된 논의는, 자치 도시화와 도시화, 시민과 선거구민, 정치와 통치술 사이의 결정적인 구별을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도시 전체는 기업과 같이 경영된다. 그것은 재정적인 잉여를 획득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성공했다고 인정된다,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면 실패했다고 간주된다. 시민적인 미덕, 민주적인 이상, 사회적 책임을 고무하는 장소로서 도시 생활의 [윤리적]인 내용은 간단하게 제거되고, 그 장소는 소득, 지출, 성장, 고용을 강조하는 기업가적인 심성에 의해 점령된다
231쪽
회의의 윤리적인 기초와 그 능력의 유서깊은 기준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연대 또는 우애의 이상으로서,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충성이,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의해 피와 살을 부여받은 이상이었다. 생명이 있고 활력에 넘치며 깊이 감득된 연합이, 아테네 폴리스의 많은 구성원 사이에, 중세 도시의 길드에, 자본주의 이전 세계의 마을이나 도시에 나타난 작은 사회의 끝없는 망 속에 존재했다.
친구들의 무리가 모여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토론한 그리스 향연(심포지엄)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도시의 풍요한 이웃 카페 생활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었다.
플라톤이 [전문가]에게 호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대부분 전문가를 신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잉의 전문 기능은, 사람의 성격을 특수한 관심이나 기능에 편중시켜 왜곡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하여 조금씩 알면서 하나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지 않는 것이 원만한 인격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필요에 의해 하나의 문제에 관한 지적 견해를 구축할 수 있고, 자신의 판단에 충분한 증거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강조는 폴리스가 역사속에도 소멸한 뒤에도 여러 세기 동안 영속적인 이상이 되었다.
220쪽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 존재한 혼합경제에서, 모순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공존의 결과, 도시의 국가, 연방과 국가, 직인적 생산과 대량 생산 사이에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졌다. [혁명의 시대]에 성숙기에 이른 아나키즘은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움직이지 않는 사회 법칙을 강조했다. 그 자발성은 확실히 의식성과 구조화된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자각된 것이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에 대한 [태아적인] 발전의 이론, 곧 [필요조건]과 [전제조건]에 근거한 [과학]에 깊게 뿌리내렸다.
1,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혁명가들이, 자신의 시대에 출현한 것으로 확신을 가지고 환영한 [단계] 이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한, 어떤 최종단계도 존재한 적이 없다...오늘날 혁명적 과제의 성공은, 계급, 민족, 인종, 그리고 사회적 성에 따른 특수 이익에 벗어난, 일반적인 인류적인 이익의 출현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217-8쪽
헤겔과 같은 사상가에게 이성은, 단지 우리가 기하와 수학의 다른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연역적 추론만이 아닐, 교육적 발달의 변증법과 유기적인 성장에 의해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는 과정을 뜻했다...라이프니츠의 사상에서 과학은 데카르트적 모델이 아니라 현상의 질적차원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었고, 기술은 대량생산만이 아니라 공예적 숙련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으로 연구되었다. 푸리에는 기술에 대해 강력한 생태적인 경향을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러한 목표를 왜곡하고 이성을 고결한 지성보다도 도리어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가혹한 산업적 합리주의로 환원시켰다는 점, 자본주의가 세계를 수량화하고 사상과 행위를 이원화하기 위해 과학을 사용했다는 점, 자본주의가 인간적 자연을 포함하는 자연을 착취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했다는 점과 같은 왜곡은 모두, 자연의 세계와 함께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회와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박고 있다.
210쪽
바쿠닌이 강조했듯이 국가가 [악]의 영역이라면, 통치술의 [기법]은 본질적으로 더 작은 악과 더욱 큰 악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의 영역이지, 윤리적인 정의와 부정에 관련되는 영역은 아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중앙집권주의와 보수주의,나찌주의사이의 선택을 둘러싸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이에 파시즘이 권력의 길로 돌진한 것이나, 환경주의자가 녹색당으로 국회에 들어갔으나 경쟁정당과 유사하게 변질되는 것이 그러하다.
205쪽
혁명의 과제는 오늘날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곧 계층을 철폐하고, 인간과 인간의 조화의 회복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며, 생태적으로 건전한 기술과 얼굴을 마주보는 직접민주주의에 기초한 생태적인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페미니즘은 바로 [실존적] 형태 속에 계층의 중요성을 조명할 수 있게 만들었다. 모든 사람 특히 여성이 고통을 당한 인간의 비인격적 상태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한에서, 그것은 노동의 장소와 공적 영역 일반만이 아니라 보육원, 침실, 부엌, 놀이터, 학교에도 존재한 미묘한 규칙의 형태를 탈신비화했다. 이와 같이 사회생태주의와 페미니즘은 이론적으로 서로 연관된고 서로 보완되며 탈신비화의 과정을 공유했다. 그 둘은 계층과 지배하고 하는 독으로 [문명]의 모든 전진을 타락시킨 악마와 악몽을 폭로했다. 더욱 더 광범한 과제가 1960년대 후반까지 만들어졌다. 곧 인구의 특정분야에 속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노력, 교육활동, 그리고 진지한 조직을 필요로 한다는 과제였다. 이러한 과제는 모든 전통적인 계급 노선과 지위 집단의 범위를 횡단하는 논점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 경제성장, 이익추구, 지구의 미래를 둘러싼 여러 문제는 각각 독자적인 의미에서 포괄적이고, 사회적으로는 지구 차원의 성격을 갖는다. 곧 그것들은 더 이상 하나의 논점이거나 집단적인 논점이 아니라, 범인류적이고 생태적인 논점이다.
202쪽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연데대한 지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전제가 되었다고 하는 신화 이상으로 계층과 지배를 강력하게 정당화한 것이 없었다.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그 이전의 사상은 자연에 대한 지배를 인간의 자유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 계층과 계급의 발생, 그리고 국가 등은 장래에 그 자체가 제거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200쪽
볼테르가 루소를 [인류의 적]으로 부른 것은 반드시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원생자연에 대한 열광적인 애호자나, 개인적인 은둔 또는 비전 퀘스트는 더욱 위대한 지혜를 가지고 각 공동체로 되돌아가는 방법이지만, 인간 혐오의 경우 그것은 자신의 종인 인류에 대항하는 반항이다. 곧 후자는 인류에 체현되고 있는 자연의 진화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조악한 생물주의에 쉽게 적응하게 된다. 이러한 생물주의는 자연계,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 진화에 인류와 사회를 위치시키는 길을 폐쇄한다. 인간도 자연 진화의 산물이고,사회는 그 자체의 진화 속에 자연 세계를 사회 생활로 전환되는 것을 포함하면서 진화의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은, 일반벅으로 자연의 매우 정적인 이미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를 부여한다.
198쪽
미래의 어떤 급진적인 운동동 1960년대의 신좌익과 대항문화에서 생긴 공동체주의의 실험에서 비롯된 윤리적, 감각적 그리고 반권위주의적인 유산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두가지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첫째 사람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미래의 운동은 어떤 특별한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둘째, 운동에는 자유의 이상을 더욱 확장시킬 수 있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나 새로운 사상이 있을 수 있는가?
197쪽
심사숙고보다도 행동에 중점을 둔 신좌익은 , 제3세계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제3세계 운동에 대한 숭배에 빠졌다. 나아가 자신이 속한 중산 계급의 불안정성과, 더욱 기회주의적이고 미디어 지향의 은폐된 엘리트주의를 뒷받침하는 가장 속류 마르크스주의적인 도그마의 수정으로 비약했다. 과거 1세기 동안 여러세대를 걸쳐 반복된 오류가 다시 반복되었다.
중산 계급 출신이라는 데 대한 죄의식은 이러한 운동에 자칭 노동자 계급과 흑인 집단에 대해 아첨하는 태도를 고취시킨 중요한 메커니즘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그러한 의식 경향을 따르는 자들을 전면적으로 주변화하고, 결과적으로 완전히 그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든 난폭한 초 혁명적인 열광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대항문화-1960년대
179쪽
마르크스파의 혁명적 과제는 도시적 생활양식과 공동체 사회에 대한 관심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상부구조]라는 이유로 제거되었고 대체호 [기본적인] 경제적 관심사로 취급되지 못했다. 창조적인 민중, 부모, 자녀, 이웃으로서의 인간과 그 폭넓은 관심사가 경제적인 존재로 인위적으로 재편성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혁명적 과제는 공장 시스템에 의해 초래된 노동자의 품위 저하, 문화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비인간화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 노동자는 기껏 훌륭한 노동 조합의 활동가로서, 또는 헌신적인 당의 구성원으로서 평가되었을 뿐이며, 폭넓은 인간적 및 도덕적 관심사를 갖는 문화적으로 세련된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다...자연은 [성가시고],[맹목적이며] 잔혹한 [필연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고, 나아가 노동과 기술에 의해 정복되고, 지배되며, 재편되어야 할 [자연자원]의 집합체로서만 취급되었다.
177쪽
실제로 공장 시스템은 프로레타리아를 공장의 정형화된 일상 업무에 의해 [사육]하며, 경영적 계층과 합리화된 생산방식에 순응시킴으로써 그 독립성을 파괴했다. 나아가 혁명에 대한 순수한 정열로 인도되기는 커녕, 도리어 임금이 높고 인종적으로 [우월한] 노동자가, 임금이 낮고 인종적으로 열등한 노동자와 확실하게 대립되는 가운데 노동자 내부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었다.
175쪽
고대에는 혁명의 소위 [태아]이론에 관한 보기가 될 만한 사례가 없었다. 유럽의 봉건주의는 지중해 북쪽 해안에서만 고대 사회를 대체했다. 그리고 동양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종류의 절대 군주제로 재편되지 않았던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알프스 북쪽의 유럽의 광대한 내륙부는 로마사회를 만나나 급속하게 부족제를 상실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유럽봉건주의의 자궁 속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14세기부터 18세기가지 유럽에서는 사회적 및 경제적인 혼재가 있었고, 자본주의와 국민 국가 이외의 수많은 대안도 제시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태아적] 발전과 그 지배의 [필연성]에 관한 신화는 프로레타리아 사회주의의 혁명적 과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169쪽
[가이아 가설]이 아니라 한계와 억제라는 그리스적인 관념을 결여한 소위 다이달로스가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두려운 전망이 역사적인 일정 속에서 명백하기 되기전에 우리는 결연하게 혁명의 과제와 과거 반세기 동안 더해진 새로운 요소를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시대의 [자유주의] 또는 [중도 좌파]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지적으로 너무나도 쇠약하여, 현대의 사회적 및 생태적인 문제를 면밀한 분석과는 구별되는 [분파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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