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세미나 [티벳]
서툰 티벳 읽기
겐둔 쵸펠 (1903-1951)
- 시서화, 역사에 능하였으며 인도독립운동을 한 맑시스트 라훌과 티벳 고서들을 찾아 고증하였고 사후 그가 저술한 티벳 역사서가 최근 출간되었다 한다. 티벳의 독특한 토론 방식인 문답식 논의에 그를 당해낼 자들이 없었다하며 라싸, 포탈라, 인도로 여행하며 많은 작품과 글들을 남겼지만 소실되어 그리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다 한다. 카만수트라도 티벳어로 번역하여 배포하였고, 티벳혁명당을 창당하였고 티베트 미러? 신문을 만들어 보급하였으나 티벳정부에 밀고 되어 포탈라궁 감옥에 3년 수감되었다. 감옥은 개인의 피폐로 이어졌으며 몇년 뒤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다.
1.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료나 관점들
2. 겐둔쵸펠과 아마아데
3. 티벳이란 명사를 가져오는 일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새롭지도 않다. 그곳에 붙어있는 동사들을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오는 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산재해있는 티벳 여행서 버전들이나, 달라이라마아류버전의 인권이나 독립을 하고자하는 민족으로 어렵겠네류가 티벳을 다시 읽고자 하는 이유만은 아닐 것 같다. 하나의 명사에 포획되는 순간. 당신의 눈은 어두워져 다른 것을 볼 수 없다. 티벳에 집착하는 순간 지금여기와 비교할 수 없다. 당신이 명사사냥을 끊임없이 하는 순간 지적포만감은 들겠지만, 또 다른 사냥거리를 찾아 포획하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다. 그리고 잊혀질 뿐.
인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해보거나, 인권을 빌미로 행해지는 추태같은 국제정세와 정치의 이면을 보거나, 민족주의의 시선에 가져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민족이란 이름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목이없는자의 역사들은 있기나 한 것인지? 목이없는 자의 시선이 있다면 어떻게. 자본의 끝단에서 반복되고 재생되고 삶이 허물어지는지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티벳에 다녀온다는 일이 여유와 휴식으로 환원되어 자신의 행위에 느낄 것도 느끼는 것도 더는 없는 일상만이어서는 되는 것일까?
시선의 높이가 높아져 영웅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가져가는 일 역시 개인적인 선택에 문제다. 더 이상 그에게서 가져갈 것은 없다. 높아진 눈높이에 그가 들어올 길은 없다. 가로막은 생각에 그는 겐둔 쵸펠일 뿐이다. 고정된 생각과 장벽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그 시선을 넘어서는 것이 함께하는 여행과 관점, 앎으로 새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가 취하는 버전과 앎과 사상은 특출난 인물로만 그려지는 그런 것일까? 제한된 조건과 삶의 경계를 월담하는 일. 우리는 그 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닐까? 겐둔 쵸펠이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지금의 우리의 습속은 비교 불가능한 버전인가?
4.
언어가 있다는 것은 풍요로움은 아닐까? 신화와 조망되지 않은 책들. 문화들이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다. 학자들의 손에 그 풍요로움은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이백년쯤 뒤, 티벳의 고서들이 전혀 새로운 각도로 조망될 때, 그 언어가 소멸되어 멸종되지 않는 이상. 또 다른 문화가 자랄 씨앗은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의 광풍이 송두리채 지구를 휩쓸고 지나간 날, 다음 언어의 구역으로 자치와 분권, 먹을 거리, 입을 거리, 나눌 거리들이 새롭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보증도 없고, 그렇다는 보증도 없다.
그렇게 세상이 명사에 포획되지 않는다면 티벳인이면 어떻고 한족이면 어떻고 위그르인이면 어떻고 조선족이면 어떨까? 싶다. 최소한의 싹이라도 남는다면. 아마존 정글의 말과 종족을 없애는 속도에 과연 남아날까 하는 우려가 더 크지만, 나랏말쌈도 대를 끊길까 걱정도 될 정도로 광폭의 속도는 전지구적이지만. 말과 글을 지킨 까닭에 그래도 퇴화하지 않는 익숙한 것들이 되살려낼 수는 없는 것일까? 끼리끼리가 아니라 더 친하고 익숙한 것의 색깔들로 조화는 꿈꿀 수 없는 것일까?
5.
우리나라 지식인론
5.1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사에 익숙해있다. 명사를 먼저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를 먼저이야기한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늘 명사를 이야기한다. 그것도 유행에 기생하는 명사를 이야기한다. 헌데 더 가관인 것은 그들의 몸은 악의 문답인 이분법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변신은 늘 파격적이다. 극단을 오간다. 늘 몸은 흑백을 가리며 머리만 끊임없이 변신하는 것이다. 이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명사의 변신에 혹하고 마음을 빼앗긴다. 그들이 동사에 아무런 미동도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잊은 채로 말이다. 그 덕에 늘 명사를 갖은 유령만 배회한다. 더욱 더 못 믿을 존재로 지식인의 가치가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명사만 갖는 지식인들은 늘 현실에 음으로 기능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