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의 탄생>
<아일랜드> 대니보이-기네스- 보이콧 대위
<내친구 빈센트>
<경계선 넘기>

 

조지 버나드 쇼는 칼 맑스에 영향을 받아 당대의 진부한 상업극을 비난했다. 그는 사회와 정치 개개혁에 관한 자신의 견해와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극작품을 썼다. 웃음을 수단으로 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해 "사상희극"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기존의 극 형식을 타파하고 도입부, 상황설정, 토론이라는 세 단계로 구사했다.  [인간과 초인],[바바라 소령],세인트 존 등이 있다. (71쪽 요약)

아일랜드가 낳은 또 한사람의 천재 극작가는 오케이시다. 그는 더블린의 빈민가 인물과 생활을 극의 소재로 삼았다. 인생의 전반 40년을 빈민굴 주민들과 막노동꾼 사이에서 보냈기때문에 직접 경험한 인물들을 무대에 올렸다. (73쪽 요약)

조이스의 첫작품 [더블린 사람들]은 3년에 걸쳐서 쓴 14편의 단편과 1편으 중편을 모은 것이다.  더블린 시민들의 시대착오적인 영웅주의, 종교적 맹목성, 속물근성 등을 '마비'라는 주제를 통해 다룸으로써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율리시즈]는 오디세이를 모방해 평범한 봉급생활자인 블품의 방황을 통해 현대인의 내면과 일상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고자 했다.(77쪽 요약)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에도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풍부한 구전문학이 존재했다. 5세기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들이 가져온 문자로 이러한 서사들을 기록했다. 예이츠는 이를 두고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이야기의 보고"라고 말했듯이 초기 아일랜드 게일 문학은의 서사는 크게 신화사이클, 얼스터 사이클, 페니어 혹은 오시안 사이클, 왕 혹은 역사 사이클고 나뉜다. 이 4개의 사이클 외에도 기독교 이전 세계에 존재했다. 저 세상의 항해와 모험을 다룬 이야기들도 있다.(68쪽 요약)

뱀발.

일터 출장 오고가는 길, 집안행사로 오고가는 길 마저 읽다. [경계선넘기]는 얇은 책인데, 아직 경계선을 넘고 있다. 졸다 수면제로 좋다.

1.  30대 초반의 체육교사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겨울철 할 수 있는 운동을 생각하다 농구를 만들었다. 바스켓 볼도 아니고 네이스미스볼도 아니고 바스켓볼은 10피트의 골대높이와 규칙 등 120여년이 되었어도 변한 것이 별반 없다. 바스켈에서 백보드가 생긴 것도 한참 지나서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니 인종차별도 다른 것과 꼭 같은 패턴으로 여기게 이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상상력과 규칙의 경직성은 여전히 경기자와 관람자를 모두 옭죄이고 있었던 것 같다. 점프라는 행위자체가 인정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는가? 점프슛이라는 불꽃놀이가 농구사를 화려하게 다시 쓰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어지는 수비,패스의 기술 만큼. 슛도 두손으로 던져야된다는 강박에 늘 시달려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한 손, 점프 슛의 묘미. 24초룰.

3점슛이 최근에서야 생겨났다고 하는 분들 역시 오해다. 초기에 이미 양쪽 측면에서 넣게되면 3점슛을 준 적이 있다고 한다. 정착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2. 보통사람 프렌들리 빈센트를  가져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날조된 미술사에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지금. 그 당시 시대를 안고사는 이들의 고민의 흔적을 불어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이 없는자나, 겨우존재하는 자들, 열외자들을 화폭에 옮겨담으려고 했던 빈센트를 모두 정신나간 짓으로 본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무엇일까? 숨겨져버린 일상은 어디에도 숨쉴 곳이 없는 세상은, 빈센트의 눈으로 본다면 어이할까? 그 어처구니 조차 없는 세상은 아닐까?

아무도 그려주지 않는 그들. <감자먹는 사람들>의 굵은 손마디를 그려내고, 울먹한 마음을 보이지 않을까? 


3.  이어찾다보니 지식채널 e-대니보이가 있다. 아일랜드. 로마도 가지 못한 곳. 5세기나 되어서야 기독교가 자리잡은 곳. 그동안 아일랜드는 시간을 번 것은 아닐까? 정령과 영혼을 고스란히 남겨둔 것은 아닐까? 암흑이라 여기는 중세에 그들은 꽃을 피웠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를 꽃피운 것은 아닐까? 유럽문화의 갈라파고스?? 모른다. 어줍잖은 이름매기기가 만용인 듯 싶다. 지금도 인구는 채 600만이 되지 않는 것 같다. 160년전의 인구가 800만. 150만이 굶주림으로, 죽음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부르다가 지쳐죽을 이름들 [대니보이]는 그들만의 노래는 아니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말과 몸짓과 춤과 노래, 사랑을 막아서는 일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자본주의가 잔혹하게 훑고 지나가는 19세기말 수많은 사람들. 그림으로 글로 춤으로 음악으로 시대를 열어 놓고자 한 것은 아닐까? 비록 거름이 될지라도...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다시 되새김질 될 수 있다면.  그들의 삶과 노래가 이 시선으로 녹을 수 있다면, 아니 이 시선에 그들의 삶과 피와 고통과 슬픔이 스며들 수 있다면...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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