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되새김(4) (강연)
-강연 코멘트 또는 비평(?)

1. 고*숙: 강연은 좋았다. 다산과 연암의 비유는 흥미롭고 진지하다. 진행중인 사극에 빗대어 신선한 맛을 주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삶과 앎의 경계가 없어야 하고 함께가야 한다. 20세기 인문학은 다산과 같은 분류체계, 엄중함, 지식과 삶의 간극이 아니라 연암과 같은 유희, 앎과 삶, 유목이 필요하다라는 논지로 이해하였다.

연암전령사, 전도사를 자처하는 모습에 몇가지 생각이 겹친다. 지금 여기와 다른 삶과 앎에 대해 다루어졌다. 수차례 로마, 그리이스, 유럽, 러시아를 전전하는 지식인들의 모습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지식인이 아닌가한다.그런면에서 18세기의 지식인과 지금여기의 비교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선명히 드러내는 연암과 다산의 비교도 좋지만, 18세기 지식인들의 삶과 앎의 비교가 있으면 어떨까 싶다.

지금으로 가져오고 나눌 수 있는, 그 풍부함 속에 예민하면 어떨까? 설령 연암의 길이 그러하더라도 깊숙한 침잠과 변화는, 조선 사대부와 양반들을 맹비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던 20-30년전의 풍토와 격차가 너무크다 싶다. 좀더 대중적인 강연, 현실의 고리를 풀어가고 싶다면 오목렌즈보다 렌즈에서 시작하면 어떨까싶다. 판단역시 유보시키는 편이 입문하기에 더 좋은 것은 아닐까?

번역도 제대로 되지 않은 현실에서 지식그물망사이에 재해석되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나온다면, 그때가서 그 사람의 전도사가 될 것인가? 제도밖만이 아니라 제도안의 곁의 사유까지 넓힐 수는 없을까? 좀더 입체적인 접근은 어떨까 싶다. 연암이 가장 입체적이고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라면  할말은 없다. 문체 역시 상대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어느 체가 좋다는 것 역시 유용과 무용을 가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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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호: 뇌과학 관련해서 흥미있고 열정적인 강의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논리, 전제에 대한 생각앓이는 강연내내 있었다.  논조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나 창의성/필링에 대한 사례는 굳이 뇌과학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직립보행이나 언어의 생성으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뇌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접근으로 새로운 결과가 나오리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뇌과학 환원론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란 종이 우수하다라는 또다른 진화론에 엮이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수차례 수유+너머와 토론되고 논의되었을텐데.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진화론이나 뇌중심적 사고 역시 전제에 대한 관점을 사유하지 않을 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주 언급된 것은 아닌가?

3. 대중강연에 대한 생각은 연사의 훌륭함이나 여파, 새로운 길에 대한 초입에 들어서는 분들에게 좀더 명민하면 어떨까하고 주석을 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자리라면 굳이 필요하겠는가? 주제넘는 소리나 느낌 정도로 이야기를 하게된다. 강연이 새로운 앎을 통한 관점의 전환, 사고의 차이를 낳은 것에 긍정한다. 하지만 앎이 너무도 선명하고 여유가 없어, 자극하는 것인지?보다 의도하지 않지만 교화-감동-세뇌의 경계에 가까이 있다면,  다른 생각길에 접어드는 사람에게 길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수위와 전제에 대해 고민이 더 있으면 강연자와 청중의 호흡, 다른 생각길에 유연성이 좀더 있지 않을까 싶다.

 
 4. 통섭은 무엇을 위한? 왜? ..그 전제에 대한 질문은? 학문의 출발점에 대한 고민은 논의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 다른 유행? 돈벌기 위해? 왜 돈을 버는 것일까?는 들어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 서로 연결되거나 아파하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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