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독서 스케치

<정약용의 형제들 1>, <역관>, 이덕일 편을, 김훈편을 돌려주며 빌렸다.(밥벌이의 지겨움을 보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집에 막 도착하니 우편함에 <황해문화>가 꽂혀있다. 제목을 보다 최장집교수님의 글이 맘이 간다. 처가 기제사가 가며 차에서 본다. 처남이 술고픈 소리를 하지만, 밀린 독서도 있고 피곤한 일주일이라 조신하기로 했다. 제사뒤 탁주로 마무리했다.  집에 돌아와 <정약용>편을 들었건만 왜 이리 졸리는지 한페이지가 정지한 채로 연신 머리는 곤두박질을 쳤다. 황급히 수습하니 아침이다. 부연 아침 거실 안쪽 햇살이 향긋함을 많이 품었다. 조금 더 본 다음...또 잠이 들었다. 낮잠. 하루의 반을 잠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약용의 집안과 스타일을 좀더 꼼꼼이 볼 수 있다.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과 아귀가 맞는 부분이 많아 전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화자가 아니라 멀리서 보는 정약용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제도권에 있으면서도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노력한 점이 남다르다. 그의 노력 역시 대단한 경지를 넘어선다.  <목민심서>도 읽지 않은 거짓 독서가로 천주교와 유교의 연관성, 남인과 벽파의 맥락도 짚어볼 수 있어 좋았다.

한편, <그리이스의 비극에 대한 편지>도 이어서 읽는 데, 생각은 겹친다. <황해문화>의 최장집교수님의 민주화와 시민에 대한 평가, 지적이 염두에 두어진다. 제도권과 접촉면-접촉공간의 축소의 과정은 민주화의 성과와 반비례하여 나타났다. 운동권 역시 이에 대한 판단도 부족하고 미흡하여, 운동관점에 치중하여 이 영역이 협소해졌다. 대단한 불행이다.  온정주의적 복지와 혜택이 제도권의 할 일이 아니라 접접을 만들고 넓히는 것이 진정한 몫이다. 낭만주의가 가져올 것은 별반 없다. 이 영역에 대한 관심을 재고한다라는 취지의 논문으로 여긴다.

김상봉교수의 <그리이스의 비극>에서 니체와 들뢰즈가 심한 냉대를 당한다. 욕망과 쾌락이란 꼭지 역시, 고통과 슬픔의 코드만큼은 되지 않는 듯 싶다. 그리고 고통과 슬픔이 왜 가지지 않는자에게 더욱 더 비루함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순진한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과 슬픔의 접선을 만들어내야 하는지? 그 접점을 통한 눈물의 렌즈가 어떻게 세상을 넓게 깊게 볼 수 있게 하는지? 그 고통과 슬픔을 덜어낼 수 있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니체와 들뢰즈에 행여 경도되었다고 느끼거나 심취했다고 여기시면 한번 에둘러가도 좋을 듯 싶다.

일요일, 일터 동료 결혼식에 김홍도거리가 생긴다는 괴산에 다녀왔다. 김홍도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도시스럽지 않은 피로연이 볼 만하기도 하지만 무척 아쉽다. 돌아와 마저 책을 읽다가 김영사의 표정있는 역사 시리즈 <역관>을 보았는데, 멀미나는 줄 알았다. 이렇게 성의없이 돈 벌 욕심이 선명이 드러나는 책을..2/3쯤 보다 덮다. 욕심도 알 거리도 더 이상 없는 듯 하다.

 뱀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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