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폭력의 '이웃으로서의' 나의 의도적 방관"

자본화=사물화=상품화의 등식이 맞나요? 거래를 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사물이 내포하고 있는 분위기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위기와 사물이 결속하고 있는 아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안타까움이라든가, 인간관계라든 것이 섞여있으면 곤란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잘려나갈 때만이 거래의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다른 뿌리나 잔가지들이 많으면, 아픔만 떼어낸 사물이거나. 다른 편으로는 확장하거나 늘리는 작업이 병행되겠군요. 오감이나 영혼의 영역에도 어김없이 세트메뉴로 침범해오겠군요. 기능+오감, 기능*경험들 말입니다. 폭력이 될 수도, 맛이 될 수도. 아쉬움이나 아픔까지 들어오겠군요.

그렇게 속도를 매개로한 공간에 분위기에서 탈출한 사물은 지속성을 가져서는 곤란하죠. 끊임없이 소비되고 유통되어야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사물화된 폭력이나 아픔에 대상자가 연연해하면 곤란합니다. 통곡하고 지난 일들의 아픔까지 고스란히 새겨지는 일은 정말 피곤한 일이죠. 사람들의 의식도 팽팽하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세련되거나 효율적이거나 생산적인 자본주의 언어로 대치 됩니다. 그것에 익숙해진 자본주의 인간은 사물을 얻은 것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욕망과 현실의 차이는 이 분위기를 소유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배고프게 될 운명입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얻고 싶어합니다.

상품이 된 폭력이 반찬이 되고 안주거리가 되고, 하루라도 복용하지 않으면 안절부절합니다. 알리바이를 성립해주는 일회성 연민은 더 이상 그것이 담고 있는 아픔이나 연결성의 분위기로 광맥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형 기계인간은 늘 이렇게 외롭습니다. 아픔을 느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물의 순환에 넋과 영혼을 빼앗겨서 더욱 외롭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자본주의 형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기때문에 더욱 외롭다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개념도 속도에 응축되어서 사물화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친구라는 종류도 분간이 되어야 거래가 가능합니다.

속도에 쓸려나가고, 박제화되는 욕망은 더욱 커지고, 더욱 더 외로워지는 자본주의형 인간은 안타깝게도 개조되고 끊임없이 복제됩니다. 더 이상 예외는 없습니다. 진지도 마을도 공동체도 없기때문이죠. 분위기에서 떨어져 나가 빠른 속도로 사물화된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일까요. 더욱 더 외로워지고 외톨이가 되는 세상에 사물을 늘려 쪼개고 찢고 분위기를 이식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자본주의사회는 시간이 참 빨리가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획일화되고, 평균화되어, 모두 똑 같은 것으로 환산되는 것이죠. 사물이 아니라 우리는 사건에 따라 움직여야 될지 모릅니다. 연애편지 한장, 어릴 때 책가방 공책한권, 노트한권, 운동회때 받은 공책한 권, 그리고 그 숱한 것의 기억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는 사물에게 사건이 있었고, 그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웃음과 안타까움을 머금게 만듭니다. 사물이 먼저 있던 것이 아니라 사건과 분위기가 녹아있습니다. 그 시간은 물리적으로 동일하게 환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엄마아빠에게 아이에게 기억의 공유와 함께라는 공간이 배여있습니다. 어쩌면 시간에 모든 것을 내어줘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시공간이 분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품화된 사물화된 일상에 이 억지 앎을 들이댑니다. 일회성 연민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만들어진 욕망은 기어코 맘에 둥지를 튼 이상 채우게 만듭니다. 결국 구매하고 사게 됩니다. 하지만 욕망과 소유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강이 있습니다. 이물감만 그득합니다. 그 사물에 팽당하거나 팽하거나 정말로 짧은 순간입니다. 이렇게 분절되어 따로따로 노는 욕망은 외롭습니다. 더 많은 분절을 의도적으로 만들기에 더 더욱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인데 갈기갈기 찢겨져서 더욱 아픕니다. 우리 마음은 아무런 결속력 없는 천개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도에 지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자본주의형 인간으로 개조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자본은 개조하려하지만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접합시켜야 합니다. 떨어져 외로운 아픔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속도를 늦추면서 보도록 해야합니다. 그냥 지나친 것들을 시간과 공간 사건을 기억을 돌리면서 접합시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떨어져나간 인간적인 관계, 기쁨을 사건과 사물을 끼워맞춰야 됩니다. 공간을 늘리고 만들어야 합니다. 평평한 시간이 사람마다, 사건마다 달리 흐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시간은 천천히 갈 수 있습니다. 시간은 살아움직일 수 있습니다.

 

080107

.1 자본주의는 분위기(아우라)로 서있는 사물을 상품이란 컨베이어로 나른다.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으로 잠재된다. 그리고 만들어져 허기진 욕망은 끊임없이 빠르고 간편한 것을 소비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는 별반 사물과 기억도 사건도 시작하지 않는다. 연애편지와 사진 한장에 그토록 애틋함이 묻어있는 사건들의 연속은  끊임없이 잊혀진다. 과정의 기억은 무용한 것으로 치부되고 끊임없는 겉재미에 농락당한다. 그 안을 맛볼 수 없다. 예술도, 기술도, 건축도 복제되어 떠돌아다닐 뿐이다. 영혼마저도 복제된다. 끊임없는 소외의 쳇바퀴를 돈다. 외롭다. 죽도록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가진놈은 가진대로, 없는놈은 없는대로, 무한생성되는 욕망에 포로가 되어, 그것을 채워놓을 길이 없다.

5.2 점과 점이 만나 사건으로 발화하지 않는다. 사물로 유통되어버릴 뿐이다. 생성된 욕망의 유효기간만큼. 앎의 기억이 사라지는 시간까지. 사람도 용도로 욕망의 포로로 소비된다. 그런면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점과 점을 늘리거나, 선과 선을 찢어 벌리거나 면과 면을 늘리거나, 공간과 공간을 비집고 벌리는  짓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 인간-인간이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나칠 것이다.

5.3 길들여진 맛에 반란하는 것이 가능할까? 길들여진 에너지에 반란하는 것이 가능할까? 길들여진 탐욕스런 욕망의 속도를 줄이는 것이 가능할까?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시공간을 돌봄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외로움과 외로움의 기관차가 정면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나지 않고서 외로움의 실체를 실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섭다. 자본주의 기관차의 연료가 바닥이 나거나, 자본주의 기관차가 더 이상 돌아다닐 곳이 없거나, 인간이란 엔진으로 갈아끼워 조금 수명을 연장하거나 하지 않을까?

5.4 욕망과 소외란 두바퀴가 속도에 응축시키는 공간과 사물을 느리게 가게 할 수 없을까?
5.5 분위기를  사물에 붙여 끌고 갈 수는 없을까?  숨이 죽은 시-청각에서 촉각, 미각, 후각, 육감을 되살려낼 수는 없을까? 재미가 사람을 축으로 복원될 수 없을까? 미각, 촉각....익숙한 겉재미에서, 횡행하는 관계의 소원함에서 자신의 맛과 자본에 길들인 맛을 비교할 수는 없을까?

노 로고, 나오미 클라인

나오미 클라인-충격 독트린; 재난 자본주의의 등장

노 로고를 번역본(랜덤하우스코리아)을 구하지 못해, 교보에선가 할인판매를 할 때 원서를 구해다가 대략 요점을 훑었던 바 있는데, 새 책이 번역되고 있다고 하네...

게다가 요점 정리도 되어 있다! 캬캬캬...

노 로고의 경우, 절판되었고, 구하기 힘들다는데 굳이 사서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대 산업과 자본과 기업, 소비주의의 만연 등의 사회적 배경 속에 개인이 독립적으로 취할 수 있는 선택이란 없다는 결론이다.

자본과 산업, 광고 이런 것이 잘 결탁되어 인간의 소비에 대한 욕망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공공성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스며들고 있는가의 문제를 꽤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데서 나오미 클라인의 작업들이 의미가 있다.

보드리야르의 책들에서 보이는 소비사회의 특징들을 거론하는 것들에서 좀 더 고전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바이고, 이 책은 그것을 직접적인 기업명과 사례로서 확인해주는 가장 최근의 책들이라 볼 수 있겠다.


# by 파란딸기 | 2008/01/09 18:03 | 생협 | 트랙백 | 덧글(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