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낯익은 저자인 책을 들여놓고 깜박한다. 책평상에 올라온 녀석이 눈길에 들어온다. 



'물질대사'개념은 마르크스 <자본론> 고병권 해설에서 가늠한 적이 있다. 일본 소장 마르크스 학자들도 이 개념으로 현 상황을 다시 살펴보는 흐름도 읽혔다.

 후기 마르크스는 과학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들은 이천년대에서나 노트들이 출판이 시작된 연유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큰 시야와 안목을 확보한다고 해서 여전히 그것이 맥락을 잘 짚고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인류세와 자본세라는 명칭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더 이상 급진스러운 관점이나 사건을 세상을 뒤바꾸진 못한다. 그런 관점자체가 문제인 시대다. 진리를 꿰어 찰 수도 없고 그것을 수도꼭지처럼 조였다폈다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것도 더 이상 대단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해탈하고자 하는 스님이 동안거 하안거 자물쇠를 걸어잠그고 면벽 수양하다 돌아가시는 것처럼, 해탈 그 자체를 백안시할 수도 없다. 여러가지 방법들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그 방법은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마음들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바람과 안개같은 것이기도 하다. 


막 읽기 시작하고, 아니 이미 거의 안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내야할까가 고민이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하게 된다. 토머스쿤의 패러다임, 물리화학의 진리들의 발견은 마치 산을 정복하듯 형상화되고 묘사된다. 봉우리라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모습의 설명이 놓치게 되는 것은 무얼까. 자꾸 보다 더 낫다. 더 나은 진리가 있다. 그것이 있으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뭔가가 생긴다. 더진, 참진 묘진...진리를 획책하는 아이러니가 생기기 마련이다. 형이상학이고 거리가 멀다.


그래서 매독의 역사가 아니 의학사가 그렇듯이 진리라는 것은 저 산위에서 내려오는 물방울들이라고 형상화를 해보자는 것이다. 물방울은 물방울을 시기하지 않는다. 내려오면서 모이고 또 커지고 또 내려오다 강물도 되곤한다.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다. 최고이고 낫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발라내서 그것이 진수라고 자랑하지 않는다. 우뚝 서지 않는다. 모든 것이 진리다. 고체 지향의 서양철학사는 모든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죽이고 부수고 악마화하고, 미친 놈년취급하고 때려부수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발가벗은 고*하나 남긴 모습으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물방울의 형상화는 애처롭지만 부드럽다. 고체의 역사는 죽이고죽이고죽이고의 역사이기도 하다. 살은 자의 논리로 묘비명을 만들고 살은 자만의 탑을 쌓는다. 그러지 죽은 자의 숨결은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다 화형시키고 불태웠으니 무엇이 남아있겠는가. 방법까지 철두철미하게 뿌리를 삭제했다.  부드럽고 애처로운 손짓을 따라가보자. 죽은 자들은 안개처럼, 기화한 물방울들은 구천을 떠돌다가 내린다. 안개로 안개비로 싸락눈으로 이슬비로 내린다. 어느 물방울하나 요긴하거나 쓸모없는 것들이 없다. 그렇게 산 것과 죽은 것들이 태어날 것 빛날 것 가물거릴 것들로 다시 홀연히 슬며시 온다.


뭔가 깃발을 꼽듯, 쟁취하듯 빼앗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저절로 제 자리 찾아가게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들이, 살려고 하는 것들이, 살아내려고 하는 것들이 서로 부드러움에 애처러움에 포근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낙숫물처럼 똑 똑   바위에 구멍내는 일이기도 하다. 과정이 결과를 삼킨다. 오랜 도제살이처럼, 잊어버리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살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