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나무> 산 정상에서 물방울을 데굴데굴 굴린다. 정상과 계곡을 따라 내려오고 내려와서 지금의 바닥면까지 흘러왔다. 중간에 끊긴 것도 있고, 계통을 달리하여 정착한 것들이 있다. 다양한 종이 산의 입구에 있다. 영장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 곤충이 많다. 개미, 벌, 영양, 비비원숭이, 펭귄, 새. 그 내부관계를 살펴보면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가 기본이다. 종이 살아가기 위해 이기주의는 별반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이타주의를 위한 이기주의이다.
이렇게 보면, 종은 우열도 없고, 선택받을 일도 없다. 유유히 산정상에서 줄기줄기 내려왔을 뿐이다. 좀 더 안정적인 선택을 하였을 뿐,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의 역사는 역시 사회학의 역사이다. 새들의 지저귐, 벌들의 동선, 개미들의 분화. 뉴런과 신경계, 뇌의발전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된 것이 아니다. 언어역시 그러하다. 알기 위해 언어가 생긴 것이 아니다. 삶이 앎이다. 문화의 표류가 그런 문화를 갖기위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종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 구사하는 언어를 바탕에 둔 앎이란 것이 있던 것은 아니다. 종이 시간이란 축의 나뭇가지를 길게 오래 가지려고 하면, 틀에 갇혀 있는 그물의 경계에 흔들리고 넘어서야 한다. 의사소통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한다. 정보가 많다고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을 통해 받아 들여지는 것이다. 받는 사람의 수용여부에 따라 달린 일이라 한다. 의사소통은 그런 것이라한다.
그것이 문화의 표류일지, 자본에 영혼을 팔은 언어란 한계에 흔들리며 자멸할 수밖에 없는 종에 대한 이기주의일지 모르겠지만, 안다는 것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그 새로운 앎에서 출발하여 표류와 다른 세계에 대한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비단 영장류라는 종의 말살이 아니라, 숱하게 말살 당한 종의 괴멸을 스스로 저지를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앎이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앎의 앎에서 출발한 소통이 '나만'과 진리를 가장한 '객관적진리'의 사이를 꿰뚫고 가는 중간길이라 한다
꼬리. 다윈의 진화론에서 선택론에서 의식을 구해낸다. 극히 제한적인 이론인 적자생존에서도 구해핸다. 언어로 출발하고 앞의 것에 가세하여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행위에 대해 다시보게 한다. 생물학과 사회학적 역사 사이엔 간극이 없다. 마치 정신이나 의식이, 독립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무의식의 세계가 사회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돌아다닌다고 인식한다면... 학문간의 경계는 애초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구별을 지어 만나지 못하게 했을뿐. 정신분석학도 지극히 생물학적이다. 문제의식에 있어 두 권의 책이 겹친다.



<말들의 풍경> 이오덕 민중언어주의, 프랑스 NAP의 친자본 친구구분법(섬뜩하였다. 자본의 그림자를 투영하여 친구의 관계를 지칭하는 언어가 남다르다.- 친구(거의 모르는 사람), 좋은 친구(친구), 사적인 친구(주치의,전담변호사, 회계사), 절친한 사이(밥한번 먹는 사이), 검소하다(극도로 인색하다), 먹고살 만하다(매우 부유하다) 그 친구는 자식 복이 없어(그 친구 아이가 마약을 해) 걔들 문제가 많아(걔들 이혼했어)- 강남이 이럴까? 자본에 의해 이렇게 언어마저 구획되고 고정된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아니 이미 친구란 규정이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아닌 것처럼 생각을 부여잡고 있는 것인가? 다양한 모습으로 보는 우리말들의 풍경이 무척 다채롭다. 새삼 누리꾼들이 쓰는 용어의 풍경도 잘 잡힌다.
<원교와 창암글씨에 미치다>, <완당평전>에서 스친 기억들이 되살아나다. 원교를 높이친 것 같지 않던데, 그 사람 맞는가? 읽다보니 그 노친네였다. 왕희지-구양순 매니아를 추사가 몹시도 경멸했던 것 같던데, 말년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 그를 찾았으나 이미 숨을 거두었고 묘소에 찾아가 묘비를 적었다는 기억이 난다. 원교는 밋밋하였다. 창암은 다시보게 되는 것 같다. 추사가 귀족적이라면, 창암은 민중적? 글씨의 울림이 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추사가 비단이나 종이 먹을 까탈스럽게 골랐다면, 창암은 있는 어느 것이나 쓰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했다고 한다. 호남의 두 명필의 글씨의 울림을 느껴볼 수 있도록 세밀히 썼다. 통사에는 미치지 못하여 맛이 떨어진다. 세분의 글씨가 함께 있다는 해남 대흥사에 가보고 싶다. 배경에 대해 좀더 알고 싶다면 <사도세자의 고백>, <완당평전>을 보시면 좋겠다.
<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보시면, 돈 벌 수 있다. 지난 영수증과 홈페이지 들어가는 수고만 하시면, 연말에 기쁜 소식 아닌가? 그렇게 보시다가 현실에 마음 한번 주시길. 기부에 대해 세밀히 고민해보자. 펀드에 너무 많이 투자하지 마시고 사회에 투자 한번 지대로 해보자. 맘먹고 지대로 아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