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비가 온다. 좋은 하루가 되겠군 하다가 지난 주부터 보자보자했던 영화 관람이다.  어디선가 봤던, 본 듯한 하지만 누구나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 늘 멤돌고 회자되는 이야기다. 그러다 나이도 접히고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함을 후회해도 된다. 세상은 그렇듯 언제나 빗나간다. 이야기를 잘 꿴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기에 하물며 무턱대고 읽는다고 무슨 말을 하겠다 싶다.  우리 교육이 잘못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학을 하는 친구들은 철학에 별반 관심이 없다. 그저 배껴쓰거나 자신의 이해와 관련되는 정도만 읽는다. 예체능이 어린 시절 반짝하던 때의 얘기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그가 한 말이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노 워, 노 우먼 크라이. 전쟁을 반대해도 돈 벌어먹기에 급급하고, 비축 무기가 없어 정신줄을 놓았구나 깨쳐야만 그만두려 한다. 악랄한 세상은 이런 힐난의 문화계의 현상 정도로 치부하고 만다. 또 다시 일상으로 함몰할 것을 알기에 그렇다. 세 시간동안 발을 꼬길 십여 회도 못하고 마무리한다. 뒤 늦게 상영 중에 들어오는 손님들. 자리를 찾는 손님들. 편한 빈자리를 앉은 나는 내내 불안하다. 십분의  하나도 차지 않은 의자에 매너를 지키지 못한 것은 누구인가.


눈물콧물 고이거나 울컥한 적이 몇 번이다. 나와서 차로 향하는 길 비행기모드를 걷자 카톡과 메신저가 움쭐한다. 그리고 내일 가족들과 보기에 앞서 갈무리한 글이 도착해있다. 소나기는 드세고 비가 세는 줄 알았다. 그리고 단숨에 읽어낸다. 차는 미동도 않고 기름만 빼고 있다. 분명하다. 이 글로 문학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문학이라는 대양에 어떻게 항해해야하는 지 놀란 모습을 끝무렵에 발견할 것이다. 끝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와 삶들은 대체 이쯤되면 그 와류를 벗어나 다른 저짝 노을지는 쪽으로 편안하게 순품에 배를 맡겨야 할 때도 지난 것 아닌가.


법보다 문학의 시야와 삶의 시선을 곱기 그지 없는 친구에게 그지 같은 글로 기억을 되짚는다. 문학의 갈 길을 본 듯하다.



오디세이아 소개 ▼

 

오딧세이아 소개

 

2026. 8. 9.

정리 요약 이계수

 

 

1. 기본적인 정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인터스텔라, 오펜하이머 등을 연출한 미국 감독이야. 현재 56세고. 나는 이 사람 영화 한 편도 본 적 없지만, CG를 별로 안 좋아하고, 실사영화를 고집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 85일에 오디세이가 개봉하자 감상평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덩달아 오딧세이아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도 새롭게 리뉴얼되고 있네. 이런 자료들을 봐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면 되니까 굳이 안 보고 영화봐도 상관은 없어. 그래도 기본 얼개는 알고 보면 영화가 더 잘 보이겠지? 일단 아이맥스 영화로 보는 게 좋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야. 아이맥스관에서 보는 영화 사운드도 엄청나다고 하고 영화음악이 압권이라는 평도 있어. 영화 내용은 별로라는 말? 보는 사람마다 제 각각 한 마디씩 하고 있는 상황이니 보고 나서 각자 판단하자.

그러면 나는 어떤 관점에서 영화를 볼 거냐? 영화 전문가가 아니어서 뭐라 말하기는 어려워. 다만, 우선 관전 포인트는 여성 인물에게 어떤 서사와 캐릭터를 감독이 부여하는가인데, 이미 놀란이 대본작업을 할 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 <The Odyssey>의 번역자인 에밀리 윌슨(Emily Wilson)이 이 점에서도 문제가 많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네. 윌슨은 원작의 페넬로페의 캐릭터가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래서 후반부의 결혼 플롯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해. 6권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 나우시카아가 완전히 삭제된 것도 문제삼네. 독일신문 영화평을 보니 에밀리 윌슨이 놀란의 대본을 찢어버렸다는 얘기도 있어. 에밀리 윌슨은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를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여성 고전문헌학자라네. 원본만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네. 이 원서를 번역하는 학문의 세계도 남성들이 지배해온 셈이지.

참고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오딧세이아>를 독해하려면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나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 같은 작품을 읽는 것도 좋아. 마거릿 애트우드는 <시녀 이야기>로 유명한 캐나다 작가고, 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인물이지. 사실 한강 작가가 노벨상 탈 때도 유력한 후보였어. 애트우드는 오딧세우스가 12명의 시녀들을 목매달아 죽이는 장면을 끔찍하다고 비판했는데, 나도 <오딧세이아> 읽으며 제일 참혹한 장면으로 읽었어.

 

2. <오딧세이아>는 어떤 작품인가?

 

지금부터 28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진작품. 호메로스는 호머라고 불리기도 하는 인물. 내가 어렸을 때 호머이야기로 <일리아스><오딧세이아>를 묶은 책이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50)의 제2권이었어. 1권은 그리이스 신화고 제3권은 성경이야기야. 호머이야기가 그리스 신화의 일부이니 결국 호머이야기가 모든 세계문학 사실은 서양문학의 출발점인 거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진짜 혼자 썼나?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오딧세이아> 모두를 다 썼나, 하는 건 근 2000년이 넘는 논쟁거리야. 특히 18세기말부터 시작된 단일론자분석론자의 대립은 서양 고전문헌학 연구사에서 200년 넘게 지속된 논쟁거리지. 최근에는 단일론자가 조금 우세한 상황이야.

<일리아스>10년간의 그리스-트로이 전쟁, <오딧세이아>는 전쟁 후 오딧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귀환하는 이야기지. 귀환에 10년이 걸려. 그러므로 오딧세우스는 20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셈이고.

일단 나는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를 호메로스가 혼자 다 썼다는 입장을 취할게. 이렇게 이해하면 이 둘은 연결되면서도, 변증법적 발전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어. 가령, 명예에 대한 관념도 <일리아스>에서의 명예와 <오딧세우스>의 명예 관념은 달라. 그냥 쉽게 얘기하면 전쟁 때의 명예관념, 목숨을 걸고도 지켜야 할 명예관념(일리아스)은 이제 영웅의 귀환과 고국에서의 질서회복을 포섭하는 새로운 명예관념(오딧세이아)으로 확장된다고나 할까.

<일리아스><오딧세이아> 모두 24권으로 구성된 작품이야. 24권이라고 할 때 권은 두루마리 책이라는 의미이고. 책 권()의 원래 의미도 두루마리야. 24권이라고 하면 그렇게 기냐고 말할지 모르나, 예전 두루마리 기준으로 24권이고, 현재의 번역본으로는 각각 800, 600쪽 정도이니 24권이라고 놀라지 마.

24권일까? 24라는 숫자에 주목해야 해. 그리스 알파베트의 숫자가 24개지. 하루는 24시간이고. 뭔가 완전한 수처럼 느껴지지? 그런데 사실 그리스 알파베트는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전에는 그냥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고, 호메로스가 이걸 최초로 기록했다는 거지. 물론 알파베트가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반박도 있어 <일리아스><오딧세이아>가 고대 그리스 문학과 역사, 철학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야. 오죽하면 플라톤이 <국가, Politeia>에서 시인추방론을 얘기했겠어. 여기서 시인은 바로 호메로스야! 플라톤은 호메로스 서사시의 어디가 마음에 안 든 것일까? 그건 각자 읽어보면 알 수 있을거야.

아무튼 호메로스의 위상은 서양문화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사실 일리아스, 오딧세이아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역사이기도 하지. 일리아스를 보면, 그리스 각지에서 트로이를 멸망시키기 위해 누가 몇 척의 배를 끌고 트로이 해안에 당도했는지가 다 나오고, 각 가문의 역사가 나오거든. 영어로 이야기는 story, 역사는 history, 둘은 어원이 같아. 독일어는 Geschichte가 역사와 이야기라른 뜻 둘을 모두 갖고 있어.

20세기 초에 프랑스 시인, 작가인 레몽 크노는 세상의 모든 픽션은 일리아스 아니면 오딧세이아라고 말했어. 이 사람 작품으로는 <문체 연습>이라는 흥미로운 책이 있어. 이 말은 과장이지. 그렇지만 나는 이게 사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라고 느낄 정도야. 가령, 이미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만 해도 그래. 이게 우리나라로 치면 <용비어천가>에 해당하는데, 호메로스의 두 작품을 적절하게 섞어서 로마건국의 신화를 쓴 거지. 그 베르길리우스가 저승의 안내자로 등장하는 단테의 <신곡>은 또 어떻고. <신곡>에 등장하는 저승여행도 호메로스 없이는 생각하기 힘들지. 특히 지옥편 26곡은 오딧세우스의 마지막 항해을 묘사하고 있어. 르네상스 이후 고전고대의 부활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의 거의 상당 부분은 호메로스의 부활과 연결돼.

<돈키호테><오딧세이아>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볼테르의 작품인 <캉디드>도 오딧세이아의 근대판이지. 물론 강조점은 조금 다르지만. 근동지방의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신밧드의 모험은?

무엇보다 20세기 최고의 문제작 중 하나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오딧세이아>의 오마주라고 볼 수 있어. 물론 패러디의 의미가 들어간 오마주이지.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죽기 전에 읽는다면 다행일거야. ? 그건 읽어보면 10분만에 알 수 있어.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소설이라는 데, 읽기가 쉽지는 않을거야.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두고 호메로스 서사시의 패러디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어. 다른 예술작품을 모방해서 원래 작품을 야유, 비판, 풍자하는 것이 패러디의 목적이라고 해. 조이스는 원작을 야유나 풍자하려고 했을까? 그건 아니야. 조이스는 호메로스를 오히려 숭앙했지. 그래도 이 작품을 통해 조이스가 지혜로운 영웅, 정절을 지키는 아내라는 원작을 지우고 비영웅적인 주인공, 행실이 나쁜 아내라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호메로스 서사시의 흔들림없는 권위를 해체하려고 했던 건 틀림 없는 것 같아. 왜 그랬을까? <일리아스><오딧세이아>20세기 초에도 여전히 엄청난 권위를 누렸거든. 이것을 읽고 말하는 것이 교양과 학식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처럼 말해지곤 했으니까. 그런데 <일리아스><오딧세이아>가 말하는 세계를 과연 여전히 지지할 수 있을까? <일리아스>만 놓고 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할 수 있지.

전간기(戰間期,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1920-1930년대를 이렇게 불러) 때 눈 앞에 어른거리는 전쟁의 기운에 전율하면서 사람들은 <일리아스>에 대해 많은 성찰을 했어.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라는 작품이 대표적이야. 그녀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에서 전쟁이 발발한 1939년에 걸쳐 이 작품을 썼어. 그런가하면 구 동독 시절 동독 작가인 크리스타 볼프는 <카산드라> 같은 작품을 통해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남성 집단의 영웅주의적 사고를 비판했지. 작가는 <카산드라>를 통해 동독사회를 자기 비판해. 이 작품은 지금도 읽히는 책이야. 그러니 원작의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패러디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율리시스>는 호메로스 원작의 패러디라고 해도 좋을거야.

 

3. <오딧세우스>의 세부 내용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하면, 호라티우스가 뭐라고 할 것 같아. 호라티우스(BC 65 - BC 8)는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도 이 사람의 시구가 등장해. Carpe Diem! 호라티우스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특징을 그의 <시학>에서 이렇게 설명해. in medias res. 직역하면 사물의 한 가운데로. 의역하면 사건의 중심 속으로, 정도가 돼. 그의 시학에서 그대로 옮겨보면 이래.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분은 활할 타오르는 불길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에서 광채가 비쳐 나오게 한 다음 안티파테스, 스퀼라, 퀴클롭스, 카륍디스와 같은 다채로운 동화의 세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트로이아 전쟁을 노래하되 쌍란(雙卵)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곧장 종말을 향하여 나아가며 지금까지의 경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청중을 바로 사건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오딧세우스>의 첫 구절은 이렇거든. “한 사람을 제게 말씀하옵소서, 무사 여신이여, 숱하게 변전한 그이는/ 신성한 도시 트로이아를 무너뜨린 다음, 참 많이도 떠돌았습니다.” <일리아스>의 첫 구절도 아주 유명해.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이 첫구절과 첫문단에 이야기의 줄거리, 복선이 전부 드러나. <오딧세우스>에서는 한 사람이라고 시작해. 이름이 안 나와. 반면 <일리아스>에는 아킬레우스의 이름이 등장하지. 참 교묘한 첫 문장들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니 듣는 이들은 얼마나 흥미롭겠어? , 그랬어?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라고. 그 분노가 어쨌길래, ? 한 사람이라고, 그가 누군데. 많이도 떠돌아다녔다니, 어디를? 뭐 이런 식으로 청중은 흥미진진하게 듣기 시작했겠지.

아무튼 <오딧세이아>1-4권이 텔레마코스의 모험담이야. 이걸 텔레마키아라고 하지. 이게 왜 책의 첫머리에 들어갔느냐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어. 이상하다, 아니다 꼭 필요한 구성이다. 텔레마코스는 오딧세우스의 아들이야. 오딧세우스가 트로이로 갈 때 막 태어난 아이였으니, 이제 20살 정도 되었겠네. 아버지와 아들 얘기지. 그런데 24권은 오딧세우스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야. 그러니까 앞뒤로 부자지간의 이야기가 배치되어 있는 셈이지. 오딧세우스의 모험이야기는 5권부터 본격 등장해. 오딧세우스는 12개의 모험을 하지. 영화는 아마 이 부분을 거의 절반 이상 다룰 거야. 12개일까? 몰라. 하여간 12라는 숫자는 많이 등장해. 오딧세우스가 트로이로 끌고 간 배도 12. 그리고 돌아가는 배도 12. 그러다가 라이스트뤼고네스라는 식인종족을 만나고는 배 11척을 모두 잃고, 1척만 남아. 그리고 부하들이 희생될 때도 12의 절반인 6. 이런 식이지. 12개의 모험이야기가 12권까지 펼쳐지는데, 중간에 저승에도 다녀와.

왜 저승에 갈까? 그리스 영웅들은 한번은 저승을 가야, 영웅대접을 받는다는 말도 있지만, 후반부의 구성을 위해서 필요한 대목이기도 해. 최근에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를 모두 새로 번역한 이준석 교수는 1-4권의 텔레마키아도 저승여행이라고 해석해. 자기 나름의 근거와 논거를 제시하며 이런 주장을 하니까, 나처럼 비전문가는 그런가, 하며 읽게 되더라.

13권부터 23권까지는 이타카로 돌아와서 오딧세우스의 도전자들을 제거하는 이야기야. 24권은 대단원인데, 22, 23권에서 전부 죽여버렸으니까, 그 도전자들 가문에서 오딧세우스를 죽이려고 달려드는데, 제우스의 명을 받은 아테나가 중간에 말리면서 화해로 이야기는 끝이나. 참고로 아테네, 아테나, 이타카, 이타케, 뭐가 맞을까? 고대 그리스말을 현재의 표기법을 표기할 때, , , 모두 가능해. 그래서 둘 다 가능하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자.

그런데, 아니 아버지가 안 돌아왔더라도, 정통 왕자인 텔레마코스가 있는데, 왜 페넬로페에게 구혼자들이 몰려온 거지? 이런 의문이 들면, 법제사나 정치사에 소질이 있는거야. 오딧세우스 시절에는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조그만 땅의 지배자이지. 루이14세 같은 절대왕권을 가진 자가 아니라고. 세습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시대였고. 그러니 왕이 부재하면, 가장 왕이 될만한 자를 새로 뽑을 수 있는 시대였지. 귀족정이라고 해도 좋겠고.

<일리아스> <오딧세이아>가 집필된 시기는 대략 2800년 전인 BC 750-650년 경이라고 해. 그런데 사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그보다 더 오래 전이지. 대략 BC 1250-1200년 경이야. 미케네 문명의 최후기(最後期)에 해당하지. 실제로 트로이 전쟁의 총지휘관인 아가멤논은 집으로 돌아가자 마자 죽지.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가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도끼로 살해해. 그때 카산드라도 함께 죽지.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살해행위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지. 호메로스 이후의 후대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가 이를 비극작품으로 표현했어. 아가멤논은 미케네의 지배자였어.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미케네 문명의 몰락으로도 연결되는 거지. 실컷 트로이 전쟁 하고 돌아오니 나라와 문명은 망했더라는 얘기인데, 그렇게 보면, 호메로서의 서사시는 망한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갖고 쓴 회고담일지도 몰라.

아무튼, 오딧세우스가 살았던 시대는 작품보다 더 오래된 때였고, 그 시대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왕이 다스리던 때가 아니야.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게 맞장뜨면서 그를 죽이려 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아가멤논이 총지휘관이고,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왕국에 비교하면 규모가 더 작은 영지의 영주 정도에 불과해. 그런데 이런 장면이 어떻게 연출되는거겠어? 그 시기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고, 아가멤논이 총지휘관이라고 해도, 그는 primus inter pares(동료 중 1인자) 정도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왕이라도 잘못된 결정을 하면 부하가 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관념이 통용되던 시기라고 보아야겠지. 일종의 저항권의 주장인 셈인데. 트로이 전쟁 시기가 그런 시대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다만, 호메로스가 서사시를 창작할 시기, 즉 트로이전쟁으로부터 500년 후인 그 시대에는 이미 왕권이 붕괴하고 고대 그리스 폴리스 정치로 넘어가는 시기였으므로, 아킬레우스의 행동 같은 것도 충분히 등장할 수 있다고 봐.

이런 장면은 <오딧세이아>에서도 나와. 세이렌의 유혹을 견디며 항해할 때 오딧세우스는 자신을 배의 돛대에 꽁꽁 묶어버린 뒤, 만약 자기가 이걸 풀려고 하면 더 꽁꽁 묶으라고 부하들에게 미리 당부해. 실제로 부하들이 그렇게 하지. 이것을 두고, 스피노자는 이것은 잘못된 명령(나를 풀어달라)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평가하기도 했어. 법학자인 나의 시각에서 말하면, 헌법이나 법률이 이런 돛대의 밧줄과 같은 것이야. 스스로 묶었지만, 풀지 못하는 것. 이런바 자기구속인 셈이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왕, 왕권 관념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길게 말했네. 이야기 안에 이런 요소들을 찾아내어 해석하는 일이 법제사, 정치사 연구자들의 일이기도 해.

 

4. 12개의 모험 이야기

 

12개의 모험은 대략 이렇게 전개돼. 이스마로스에서의 해적질 로토스 열매를 먹는 이들 퀴클롭스 아이올로스 라이스트뤼고네스 키르케 저승 세이렌 카륍디스와 스퀼라 태양신의 섬 칼륍소 파이아케스인들의 섬. 한번 세어봐. 12개가 되나.

그리고 이 모험에도 나름의 설계가 있어. 처음의 해적질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지, 이스마로스는 현재 그리스 북동부 로도피(Rodopi) 지역의 마로네이아(Maroneia) 및 이스마로스산(Mount Ismaros) 부근의 에게해 남부 해안가로 비정되고 있어.

그 다음엔 모호해. 로토스 열매를 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인간계인지 아닌지...그러다가 점점 괴물들이 사는 나라 혹은 비인간계로 넘어가지. 그러다가 저승까지 다녀오고. 마지막이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인데, 여기는 의도적으로 인간계와 비인간계의 경계처럼 묘사돼. 이제 오딧세우스가 인간계로 돌아와야 하니까, 그 경계선에 있는 세계를 묘사한 거지. 이렇게 보면 오딧세우스는 기하학적으로 아주 정교한 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어.

전반부의 방랑회고담만 그런 게 아니야. 전반부와 후반부도 자세히 보면 교묘하게 병행관계를 이루고 있고(가령 제8권에서의 운동경기시합이 제18권에서는 오딧세우스와 이로스의 시합이 벌어지고 있어. 그런데 앞의 경기는 친선의 의미로 행해지지만 뒤의 경기는 적대적 의미를 띄지), 순환형의 전개(A B C D E F G G F E D C B A)도 있어. 이걸 ring compostion이라고 해. 11권 저승에서 (20년 사이에 이미 죽은) 어머니를 만나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순서를 잘 봐. 11171행에서 203행까지야. 21권에서 도전자들이 활의 시위를 당기는 순서와 22권에서 오딧세우스가 도전자를 활로 쏘아 죽이는 순서도 A B C D D C B A 순으로 되어 있어.

방랑회고담(트로이아 출발에서 칼립소섬에 도착하기 까지의 회상)도 그 자체 독자적인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른바 loop 구조야. 계속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보여줘. 가령 키르케의 섬에서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키르케의 섬으로 가는 식이지. 또 하나, 구조적 특징을 말하자면, <일리아스>와 비교할 때 <오딧세이아>는 계속해서 모험이 이어지니까 지루하잖아. 아무리 in medias res라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모험을 묘사할 때도 짧고-짧고-긴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어. 가령 제9권에서 키코네스인들의 마을과 로토스 열매 먹는 이들의 이야기는 짧고(23행에 불과), 퀴클롭스 이야기는 길지. 10권에서도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섬과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의 마을 부분은 짧지만, 여신 키르케의 섬은 아주 길어.

기본적으로 서사시잖아. <오딧세이아>, <일리아스> 모두 서사+시니까, 아무튼 시야. 그런데 서사, 즉 이야기가 있는 시여서 서사시야. 시니까 운율이 있어. 고대 희랍어 원문에 따르면 이 시들은 장단단 육보격(Dactylus Hexameter)으로 되어 있어. 장단단 육보격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서사시에서 사용된 대표적인 운율 형식이야. --단 리듬인 마디 여섯 개가 모여 한 행을 이룬다고 해. 그러니까 장단단 육보격을 에피소드를 풀어나가는데도 이용하여, 이야기의 지루함을 덜어준 거지.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럼, 이제 12개의 모험담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자세히 보면 싸움질 환대 싸움질 환대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게 눈에 들어와.

 

이스마로스에서의 해적질 이건 실제로 현실세계에서 한 일이지. 해적이라고 하면 그냥 도둑놈, 나쁜놈 이미지잖아. 그런데 사실 해적과 해군은 종이 한 장 차이야.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영화도 잘 뜯어보면 그걸 알 수 있지. 해적하다가 영국 군인들과 협력하고 뭐 그러잖아. 실제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와 대결할 때 해적을 많이 이용했어. 대표적인 해적이 드레이크 같은 사람인데, 바다에서 돈 뜯어먹는 짓을 해도, 그것을 국왕한테서 승인받으면 해군이고 그거 없이 하면 해적이고 그렇지. 그렇게 따지면, 정식 군대가 도둑놈들보다 더 나쁜 짓 한 역사도 많고. 옛날에 고려나 조선의 해안가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해간 왜구(倭寇)도 일본해적인데, 자세히 뜯어보면, 고려나 조선이 해상무역을 금지했을 때, 그 금지령을 어기고 억지로라도 먹고 살자고 무역선을 띄웠던 비공식 상인들인 경우가 많아. 오딧세우스 일행이 해적질을 했다고 했는데, 오딧세우스와 그의 병사들은 정식의 그리스 군대잖아. 그들이 해적질을 했다고 하니, 그게 합법적인 전쟁은 아니었다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돼. 아무튼 이 해적행위 중에 그들이 얻은 귀한 보물 중 하나가 마론에게서 받은 포도주야. 이게 나중에 폴리페모스를 취하게 만드는데 이용되지.

 

로토스 열매를 먹는 이들 해적질도 정도껏 해야지, 너무 심하게 약탈하니까 키코네스인들이 옆 마을 사람들까지 불러서 반격을 해. 오딧세우스 일행은 배 한 척마다 여섯씩 죽었다고 나와. 대략 50명이 타는 배, 12척이 항해를 했는데, 배마다 여섯씩 죽었다고. 여섯이라는 숫자도 자주 등장해. 주로 부하들이 죽을 때 여섯이 죽었다고 나오지. 그래서 도망을 가는데, 바다에서 9일 동안을 표류해서 로토스 열매 먹는 이들의 땅에 상륙해. 처음 표류할 때는 어디서 어디로 갔다고 나오지만, 로토스 섬에 도착했을 때는 어디라고 안 나오지. 정확하게 말 안해. 현실세계에서 비현실 세계로 넘어간 거야. 9일 동안 표류한 이유도 그거지. 현실세계에서 비현실세계로 넘어가야 하니까. 9라는 숫자는 꽉 찬 숫자고, 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셀 수 없는 숫자지. 그러니까 9일을 표류했다는 건 셀 수 없는 시간을 표류했다는 뜻이야. 이 섬에서 도착하자 오딧세우스는 전우들을 먼저 보내 이 땅에서 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아 오게. 첫마디가 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누구냐라고 묻지. 이 질문이 중요한거야. 고대 그리스 말로 빵은 Sitos.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거 안 먹고 로토스 열매를 먹네. 이게 뭐지? 연꽃 열매라고 하는데, 여기에 마약성분 같은 게 있나 요즘 학자들이 연구해봤는데, 그런 건 없다고 해. 오딧세우스 부하들은 이걸 먹고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해. 이것을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마음으로 표현해. 오딧세우스는 자본가니까 노동자들을 다그치지, 그만 먹고 가자고. 그래서 억지로 끌고 가.

퀴클롭스 이 다음이 분수도 모르고, 법도도 모르는 퀴클롭스들의 땅이야. 그곳은 손으로 뭔가를 심지도 않고, 밭을 갈지도 않지만, 모든 것이 자라나는 땅이야. 그들에게는 계획을 의논하는 회의장도 없고, 법도도 없()”(9, 108) 서로 교류도 안 하지. 농사와 정치제도가 없는 곳이니 인간들이 사는 땅은 아닌 셈이지. 게다가 폴리페모스는 외따로 떨어져 살며 가축들을 먹이며 지냈다고 해. 남들과 왕래도 없고, 떨어져 지내며 무도한 짓에 능통한 자였어. 인간이란 함께 사는 존재여야 하는데, 이 자는 완전히 로빈슨 크루소 같은 인물이지. 퀴클롭스 섬에서의 에피소드는 또 얘기할 게.

아이올리아 다음은 아이올로스가 다스리는 아이올리아야. 아들 딸 각 6명이고, 아들 딸이 부부기도 한 이상한 나라였지. 근친상간이지. 여기서 한달 동안 환대받고 지내다가 아이올로스의 도움으로 다시 항해를 하지. 아이올로스는 그들의 여행에 방해가 되는 모든 바람을 아습 황소의 가죽을 벗겨내어만든 자루에 담아, 은으로 만든 끈으로 꽁꽁 묶어서 건네줘. 그러고는 제퓌로스(서풍)를 불어주지. 서풍이라고 하면 동에서 서로 불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기상학적으로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기준으로 해. 그러므로 서풍이라고 했으니 퀴클롭스의 섬이 오딧세우스의 고향에서 한참 서쪽에서 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래서 아흐레 밤 낮을 항해해서 열흘 째가 되자 고향의 들판이 보이고, 심지어 불을 피워올리는 게 보일 정도로 고향 앞까지 도착해. 여기서도 아흐레 밤낮을 항해했다는 말이 나오지. 비현실세계에서 현실세계로 거의 도달하는 장면이야. 9일을 지나. 그런데 열흘째 되는 날 전우들이 그만 자루를 풀어버리지. 마침 그때 오딧세우스는 잠이 들었고(이 사람은 중요한 순간마다 잠이 들어버려), 부하들에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안 알려준 상태야. 부하들이 오딧세우스 지만 좋은 거 받았나, 그러면서 열어본 거야. 그러자 온갖 바람이 나와서 다시 원위치가 돼.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딧세이아>에는 이처럼 되돌아감이 자주 등장해. 오딧세우스의 전체 여행자체도, 이타카에서 출발해서 트로이로 갔다가 다시 이타카로 돌아가는 이야기잖아. 그 속의 여행 하나하나도 보면, 이렇게 loop 구조가 자주 등장해. 이렇게 되니까, 오딧세우스는 배 밖으로 몸을 던져 바닷속에서 죽어버릴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낙담해(10, 51). <오딧세이아>에서 유일하게 자살을 생각하는 장면이야. 다시 아이올로스 왕에게 도와달라 부탁하지만, 이번에는 거절하지. 왜 그럴까?

라이스트뤼고네스 이번에는 엿새를 거쳐 이레째에 라모스왕이 다스리는 가파른 도시, 라이스트뤼고네스들이 사는 텔레필로스에 도착해. 여기가 어디냐?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티데스는 너희들이 여행한 시칠리아 섬 어디라고 말하지만, 로마 시인인 호라티우스는 라티움 지방의 포르미아이(Formiae)에 있는 어디라고 보기도 해. 그런데 오딧세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밤과 낮의 길이 서로 가깝고, 양편에 깎아지른 바위가 이어진 포구가 있다고 해. 그래서 천병희 선생이나 이준석 교수는 여기는 백야(白夜)의 피오르가 연상되는 북유럽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해. 놀런의 영화에도 라이스트뤼고네스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매우 웅장할 것 같은데, 어떤 지형을 배경으로 그릴지 잘 보기 바래.

여기서 12척의 배중 11척이 모조리 파괴되고 전우들은 그 자들 한테 잡아먹혀. 사실, 방랑을 하는데, 12척이나 필요한 건 아니지. 이야기 전개상으로는 배 1척으로도 충분하니까. 호메로스가 이쯤해서 정리한 걸로 봐도 되지만, 이 사건 이후 오딧세우스는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신중하게 행동해.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하는 쪽으로 성장해. <오딧세이아>를 하나의 성장소설로 본다면,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면모 때문이지. 여러 역경을 거치면서 조금 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신중해지고, 세상을 더 넓게 보는 시각을 갖는 것 말이야.

 

키르케 바로 그런 면모는 키르케의 섬, 아이아이아에 도착했을 때 발휘되기 시작하지. 먼저 정탐을 위해 부하들을 보내. 두 조로 나누어 보냈는데, 한 조의 대장이 에우륄로코스라는 인물이야. 이 사람이 보니까 키르케라는 신인지, 여인인지 모를 자가 자기들을 부르는 거야. 그래서 다 따라갔는데, 자기만 이상해서 남았는데 보니까 갸들이 모두 키르케가 주는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만 도망쳐 왔다고.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되는 이야기는 어디서 본 것 같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엄마아빠가 돼지로 변하잖아. 신들이 먹는 음식을 먹고 말이지. 다 이런 얘기에서 나온 거야. 에울륄로코스가 어서 도망가자고 하니까, 오딧세우스가 이렇게 말해. “에우륄로코스, 정 그렇다면 너는 여기 이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속이 빈 검은 배 곁에 있거라. 하지만 나는 가야겠다. 내게는 그래야 할 강력한 필연이 있으니까.” 리더로서의 각성이 드러나는 대목이야. 키르케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오딧세우스는 헤르메스를 만나. 이 신으로부터 그는 모올뤼라고 불리는 약초를 얻어. 그가 이것을 지녔기에 오딧세우스는 키르케의 음식을 먹고도 돼지로 변하지 않지. 여기서 1년을 보낸 뒤 오딧세우스 일행은 키르케의 조언을 듣고 저승 여행을 하지.

 

저승 저승에서의 일화도 아주 기하학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조로 이야기되고 있어. 11권 전체가 저승 이야기야. 이곳에서의 가장 중요한 만남은 테레이시아스와의 대면이야.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의 왕>이나 <안티고네>에도 등장하는 맹인 예언자이지. 호메로스도 맹인이지. 눈이 멀면 다른 게 보이는가봐. 아니면 그리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이 사람으로부터도 다시 한번 헬리오스의 황소는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를 듣지. 저승에서 돌아오면 어디로 갈까? 다시 키르케의 섬이야. 그곳에서 출발했으니, 그곳으로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여기서도 순환구조, loop 구조의 모습이 나타나지?!

 

세이렌 또 다시 귀향을 위한 길을 떠나는 오딧세우스 일행에게 키르케는 앞으로의 여정을 알려줘. 먼저 세이렌들에게 가 닿을 거다, 그 다음에는 스퀼라와 카륍디스를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나면 트리나키아 섬에 닿게 된다. 그곳은 소 떼와 튼실한 양 떼가 풀을 뜯고 있는 곳인데, 소 떼, 양 떼 모두 다 헬리오스의 것이다. 그것만은 손대지 마라, 안 그러면 전우들을 죄다 잃어버린다고 경고해. 이 말을 듣고 출발해. 사이렌이 세이렌에서 온 말이야. 세이렌은 낭랑한 노래로 사람들을 홀려. 독일에 로렐라이 전설이 있지. 이것도 결국 세이렌 전설이야. 그러면 독일 사람들이 로렐라이 전설을 세이렌에서 가져왔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오딧세이아> 자체가 호메로스 시대의 민담, 각 민족의 전설 같은 것이 하나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간 거니까, 독일 민족에게도 예전부터 그런 민담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이 세이렌의 이야기는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중요하게 분석해. 앞에서도 말했지만 돛대에 자기를 묶는 얘기가 나왔잖아. 이성에 의한 자기절제, 자기구속. 아도르노는 여기서 근대적 시민, 계몽이성이 탄생하는 순간을 발견해내. 그런데 내 생각엔 좀 어거지인 것 같아. 괜히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계몽의 변증법>은 사실 안 읽어도 돼. 그 취지만 이해하면 되지. 원문이 더럽게 어렵고, 번역자도 최선을 다했지만,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돼. 나중에 독일어로 읽을 능력이 되면 독일어 원서로 읽는 게 차라리 나아. 신화에서 벗어난 근대적 이성이 다시 신화적 세계로 빠지는 타락이 일어난다, 나치스는 그걸 보여준다, 뭐 대략 그런 내용이야. 서사시와 신화가 다른 점도 바로 이 이성의 탄생이지. 신화의 세계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잖아.

세이렌의 노래에 오딧세우스는 귀는 열어두고 있어. 몸만 묶었지. 그런데 전우들은 귀도 막혔어. 밀랍으로 귀를 다 막았거든. 여기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계급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아도르노는 말해. 요즘 시대라면 마구마구 헛소리를 떠드는 유튜버들이 세이렌에 해당하지 않나 하는 얘기도 있어.

 

스퀼라와 카립뒤스 이곳은 거친 파도가 치는 곳이지. 사실, <일리아스>와 비교하면 <오딧세이아>에는 신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아. 그 대신 카륍디스와 스퀼라 같은 존재들이 많지. 이것은 자연의 신격화라고 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 할 때 영어 표현에 "between Scylla and Charybdis"이 있지. 이것도 여기서 온 거야. 그나마 스퀼라 쪽은 어찌어찌하면 살 수는 있어. 카륍디스는 다 죽어. 그래서 스퀼라 쪽으로 가. 6명의 동료를 잃고 벗어나지. 이건 공리주의라고 해야 하나?

 

태양신의 섬 드뎌 여기서 사단이 나. 그렇게 경고했건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지. 이 때도 오딧세우스는 잠이 들지. 부하들은 경고를 무시하고, 오딧세우스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어. 앞의 바람자루 사건 때는 부하들이 모르고 사고를 쳐. 그러나 이 때는 오딧세우스가 세 번이나 미리 경고를 해. 그 사이 오딧세우스도 성장한 거지. 정보는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부하들은 왜 그랬을까? 한 달 동안 폭풍이 쳐서 배를 띄어 나갈 수가 없었어. 가진 건 다 먹었고 먹을 건 없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하며 먹었던 거지. 결국 제우스가 보낸 폭풍에 다 죽고 드디어 이제 오딧세우스 혼자만 남아 바다에서 난파한 채 이리저리 떠밀렸는데, 아뿔사 다시 스퀼라와 카륍디스네. loop 구조! 거기서 커다란 무화과나무를 붙잡고 빠져나와서 매우 긴 나무 판대기를 겨우 붙잡아 그 위에 올라타. 두 손을 노 삼아 저어 드디어 아흐레 동안 실려가다가 열흘째 밤에 오귀기아 섬 가까이에 도착해. 거기엔 인간의 음성을 지닌 무서운 여신, 머리를 곱게 땋은 칼륍소가 살고 있었지.

 

칼륍소 이곳에서 오딧세우스는 7년을 보내. 여러 얘기해볼 수 있는데, 7년이나 여기서 보냈을까? 12척의 배로 출발해서 혼자만 남았잖아.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고 여정이었으니, 낙담했겠지. 이러곤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면 또 뭐라고 말할건가, 스스로도 한심하고 앞이 안 보였겠지. 그런데 아름다운 여신 칼륍소가 같이 살자하니, 애라 모르겠다, 회피심리 같은 거 아니었을까? 여기까지가 12권이야.

 

파이아케스인들의 섬 - 그러면 칼륍소의 섬을 떠나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에 도착하는 여정은 어디에 묘사되어 있을까? 그것은 다시 56권으로 돌아가야 해. 특히 6권에서 나오시카아를 만나고, 그곳의 왕궁에 가게 되고, 거기서 파이아케스인들에게 자신의 방랑담을 들려주기 시작하는 구성이지. 9권부터 12권까지가 오딧세우스가 얘기하는 방랑이야기이고. 이렇게 보면 구성상 1-4권 텔레마코스의 이야기, 5-8권은 오딧세우스가 자기 방랑이야기를 하기 위한 빌드업, 즉 오딧세우스가 칼륍소의 섬을 떠나(5), 나우시카아를 만나고(6), 알키노오스의 궁전에 도착하고(7), 파이아케스 사람들에게서 접대를 받고, 자기 얘기를 들려주기를 요구받는(8) 구성으로 되어 있으니, 이야기 짜임새가 대단한 거지. 그러나 그 전에 제1권에서 이미 신들이 회의를 해. 칼륍소에게 벌써 7년째 잡혀 있는 오딧세우스를 이제는 집으로 돌려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포세이돈이 반대하지. 마침, 포세이돈이 아이티피오스(에티오피아)로 놀러 간 틈에 잽사게 아테네가 칼륍소에게 가서, 그만 놓아줘, 라고 말하지. 신들의 명령이야!

 

5. 환상세계를 방랑하는 의미

 

사실 제일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그렇다며 내용면에서 도대체 오딧세우스가 방황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걸 생각해보아야겠지. 이것과 관련해서는 이미 여러 설명이 나와 있어. 대표적으로 <계몽의 변증법>을 쓴 아도르노 같은 이들이 오딧세우스의 방랑을 분석하지. 그런 건 철학시간에 배우고.

이상한 세계로의 방랑은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놀런 감독이 그린 오디세이도 그런거겠지.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인 셈이야.

원작인 <오딧세우스>는 일상으로 먹는 음식(-곡물을 먹는가 아니면 육식만 하는가, 심지어 인육을 먹는가=카니발리즘), 농업(농사를 짓는가? 아니면 아예 농사 없이 살거나 단순 목축만 하는가), 결혼제도(근친상간이 이루어지는가, 가령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을 지배자 알키노오스는 조카딸과 결혼하고, 바람의 섬 아이올리아의 왕 알리올로스에게는 66녀가 있지만, 이들은 또한 부부이기도 하다), 법과 의회등 정치제도(퀴클롭스들은 모여살지 않는다, 폴리페모스가 불러서 왔지만 회의장도 없고 교류도 없다. 서로 무관심하다), 손님에 대한 예절과 신에 대한 희생(폴리페포스가 오딧세우스에게 한 말, 9272행 이하)의 관점에서 이 질문에 답해나가.

방랑에 대해서 더 얘기해보자. 나는 이것이 환대라는 <오딧세이아>의 중심테마를 풀어내기 위한 장치처럼 생각되기도 해.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주 중요한 얘기이고. 최근에도 스페인에서 난민사태가 발생했지. 그런데 그 사건들도 그냥 표층의 이야기만 신문보도나 숏폼 기사로 읽으면 극우가 되기 딱 좋지. 심층의 이야기들을 읽어야 해. 난민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런 질문부터 해야지. <울지마, 팔레스타인>이라는 책이 있어. 한국인 활동가들이 쓴 책인데, 이 책의 카피에 이런 말이 있어. “유대인이 국민이 되자, 팔레스타인 사람은 난민이 되었다.”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실제 현실에서 우러나온 말이지. 오늘의 국민이 내일의 난민이 되는거야. 조선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했잖아. 이제는 소수가 되었지만 자이니치 중에도 아직도 난민같은 삶을 사는 분들이 있어.

방랑은 환대를 소중하게 만들어. 방황하는 자에게, 나그네에게 환대는, 손님접대는 생명이자 안식이지. 옛 희랍말로 이것을 크세니아(Xenia)라고 해. 그 숱한 나라와 도시를 방황한 오딧세우스에게 무엇보다도 절박한 것은 환대야. 그런 그를 기다린 사람 중에는 외눈박이 퀴클롭스족인 폴리페모스도 있지. 나는 외 외눈박이일까 생각해봤어. 자아가 비대한 거라고 느껴. 자신을 바라볼 눈밖에 없는거야. 먹고사는 동물적 욕망의 눈 외에 타인을 바라볼 눈이 없는 자. 그래서 그는 오딧세우스가 제우스가 말한 환대의 법을 말하자, 난 그딴 것 몰라라고 말하지. 제우스의 법은 자연법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오딧세우스가 방랑하던 시대는 국경없는 시대였어. 바다는 물론이고 땅에도 선이 그어지지 않은 시대지. 과거의 지도를 보면 여기까지가 그리스, 여기는 트로이, 뭐 이런 그림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인의 상상으로 그린 선긋기 일뿐이야. 우리나라 삼국시대 지도도 마찬가지야. 대략 그 정도의 영역을 신라가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뜻이지, 거기에 무슨 38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국경이 없던 시대이자, 추방도 횡행하던 시대야. 요즘처럼 공짜로먹고 재우는 감옥이 없던 시대니, 범죄자든, 아니면 생각이 다른 사람이든, 도전자든, 지배세력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추방해버려. 추방된 사람들은 어디로 가겠어. 다른 땅으로 가겠지. 그런 나그네들을 환대하라는 얘기야. <일리아스>에도 보면 의도치 않게 살인을 하고 다른 나라땅으로 가서 몸을 의탁하는 얘기가 군데군데 나와. 아킬레우스의 둘도 없는 전우, 파트로클로스(거꾸로 하면 클레오파트라)도 그런 인물이야. 그 파트로클로스를 아킬레우스의 아버지인 펠레우스가 받아주었다는 거지. 왜 그랬을까? 그 시대는 인구가 국력이야. 크게 문제가 없다면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공동체를 더 튼튼하게 하는 수단이 되었을거야.

너희가 유럽을 여행할 때 들고 간게 여권이고 비자잖아. 그런데 여권이라는 것도 19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어. 1차 대전 직전에 여권이라는 게 발명이 돼. 제국주의 전쟁을 전후하여 이런 제도가 만들어진 거지.

다시, <오딧세이아>로 돌아오면, 호메로스는 환대의 법이 통용되는 땅을 인간들의 땅이라고 본거야. 오딧세우스 일행을 잡아먹으려는 자들, 위협하는 자들이 사는 땅은 인간 같은 것들이 살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아닌 동물들 <오딧세이아>에는 신, 인간, 동물이 등장하지 혹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놀란은 지금이야말로 환대가 필요한 시대라는 걸 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6. My name is nobody

 

오딧세우스의 이름찾기에 대해 말해보자. <오딧세이아> 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에피소드는 퀴클롭스와의 대면이지. 그와의 마주침을 어찌어찌 극복하고 벗어난 오딧세우스는, 이 괴물아, 내 이름은 오딧세우스다, 라고 말하지. 부하들이 말려, 그러지 말라고. 그런데 이 영웅은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지. 나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딧세우스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 전의 이야기가 있지. 퀴클롭스의 동굴에 갇혔을 때, 그리고 오딧세우스도 그에게 잡혀 먹기 일보직전에, 오딧세우스는 환대의 예를 말하며, 그에게 포도주를 먹이는데, 포도주가 맛나니까 폴리페모스가 물어, 너의 이름은? 그러자 그때 그가 한 말이 my name is nobody. 오딧세우스 일행이 합심해서 동굴 안에서 발견한 올리브나무 목봉 같은 걸, 불에 달구어서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그가 아파서 소리내자, 그의 동료들이 와서 물어, 무슨 일이야, 누가 이랬어, 그러자 그가 말해. nobody라는 놈이 그랬다. 이 말을 듣고 왔던 사람들이 다 돌아가. 그리스 말로 Outis는 우리말로는 흔히 아무도 아닌자로 번역하지만, 이준석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말과 달리 인도유럽어에서는 이다있다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있지도 않은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닌 자라고 옮길 수도 있다고 해. 여기서는 아무 것도 아닌자 갑자기 김건희씨가 생각나네. 특검에 출석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말했지 보다는 있지도 않은 자라는 번역이 나아보여. 그래야 다른 퀴클롭스들이 있지도 않은 자가 그랬다는 답을 듣고 돌아간 게 설명이 돼.

다시 오딧세우스의 이름 찾기로 돌아와보면, 그렇게 오딧세우스가 위기에서 벗어나자, 나는 도시의 파괴자 오딧세우스”, “이타카에 집을 둔, 라에르테스의 아드님이라고 외치지. 이것이 그의 이후 방랑을 힘들게 만들어. 폴리페모스의 아버지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거든.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오딧세우스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가더라도 쫄딱 망해서 가게 해달라, 기도하지. 그래서 이후 오딧세우스는 계속 방랑하는거야. 거의 10년을. 사나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말이야. <일리아스> 9권에 보면 오딧세우스 등이 전투에서 빠져 있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러 가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어. 그때 아킬레우스는 나는 내 고향 뮈르뮈돈으로 돌아가겠다, 이틀이면 돌아간다, 뭐 그런 얘기를 해. 그러니까 트로이에서 이타카도 사나흘 거리밖에 안 된다고 봐야지.

폴리페모스 이야기는 오딧세우스 이야기의 중심되는 에피소드이긴 한데, 호메로스는 이게 아니라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를 잡아 먹은 이야기를 <오딧세이아>의 중심 이야기로 내세워(1, 8). 어쨋건 이 이름 감추기와 이름 드러내기는 이후의 스토리 전개에서 아주 중요해. 놀런은 이 대목을 빼버리는 것 같은데, 이게 빠지면 사실 후반부에서 오딧세우스가 철저히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거지 노인으로 변장해서(아테네가 도와주지), 야금야금 자신의 적대자들을 제거해나갈 계책을 세우고, 실제로 실행하는 플롯을 이해하기 힘들지. 이름이 지워진 자에서 다시 자기 이름을 찾아가는 자라는 빌드업이 여기에서 시작되는 거야. 그러므로 퀴클롭스 섬에서의 실패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어. 오딧세우스가 드디어 이름을 밝히는 건, 구혼자(적대자) 중의 우두머리인 안티노오스를 죽이는 바로 그 순간이야. 안티노오스도 놀런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해.

과거에 이름은 지금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 조선시대 궁중비화도 보면 저주물품을 땅속에 묻을 때, 바로 공격 대상자의 이름을 적어야 효과가 있다고 믿었어. 이름은 곧 자신의 정체성인 거지.

<오딧세이아>에는 우티스 말고도 여러 의미 있는 이름이 등장해. 안티노오스도, Anti()+Noos(정신). 이 정신에는 제우스의 법도 포함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는 신법, 자연법에 반하는 자야. 칼륍소의 이름은 매장, 숨김을 뜻해. 오딧세우스를 7년을 붙들어놓은 여신이지. 그녀는 오딧세우스에게 영원한 삶을 제안하지. 그런데 영원한 삶은 영원한 죽음이야. 성서의 제일 마지막 책이 요한계시록이야. ‘계시라는 말은 드러내 보여준다는 거지. 묵시록이라고 해. 이 계시록을 Apocalypse라고 해. 칼립소와 연관된 말인게 보여? 퀴클롭스야 원을 뜻하는 퀴클로스(kyklos)와 눈을 뜻하는 옵스(ops)가 합쳐진 말이니까 별 상징적 의미는 없지.

그런데 나는 이름 찾기를 조금 다르게 해석해. 오디세우스가 자신을 nobody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기지(奇智)가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지.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전쟁 트라우마고. <일리아스>를 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그 죽이고 죽는 전쟁에서 얻은 트라우마가 오딧세우스를 완전히 장악했다면, 그는 나는 누구인가, 라고 생각했을거야. 놀런의 영화도 이런 쪽에 초점을 맞춘 것 같은데 물론, 이런 해석에 에밀리 윌슨은 매우 비판적이야. 오딧세우스가 얼마나 multidimentional한 사람인데, 그렇게 그리냐 하면서 만약 그렇게 본다면, 오딧세우스의 이름찾기는 단순히 감추었던 이름을 다시 꺼집어내어 발화(發話)하는 과정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과거를 잊고 평화와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 그야 말로 오디세우스만의 오딧세이아라고 생각해. 놀런의 영화가 이 부분을 어떻게 그리는지 같이 한 번 잘 찾아보자.

 

7. 일단 마무리하며

 

근대 소설이 태동하기 전에는 이야기가 있는 곳마다 픽션이 전래 없는 일이나 있을 법하지 않을 일을 다루었다고 해. <아라비안나이트> <서유기> <데카메론> 같은 내러티브는 하나의 기이한 사건에서 또 다른 기이한 사건으로 유쾌하게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펼쳐지지. 그 스토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일, 있을 법하지 않을 일을 즐겁게 제재로 한 것들이지. 레몽 크노의 말마따나, 그런 픽션들의 원조가 <오딧세이아>잖아. 그래서 나는 <오딧세이아>를 읽거나 보는 것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해.

왜냐하면 (근대) 소설은 내러티브의 원동력이 되는 예외적인 사건, 순간=계기를 은폐하고 일상의 디테일을 강조하기 때문이야. 확률의 관점에서 개연성이 낮은 사건, 순간, 계기들을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으로 은폐하고 추방하여, 더는 사고할 수 없는 것’(the unthinkable)으로 만들었어.

우리는 이미 고정된 일상의 디테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배자는 지배자고, 노예는 노예다. 부자는 부자고, 가난은 어쩔 수 없다. 세상이 이렇게 된 게 내 책임이냐, 내 일이나 잘하자, 새로운 세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어. 그런 예외적 사건, 순간, 계기 같은 건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이미 이렇게 체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럴 때 <오딧세이아>는 말을 걸어와. 아니야, 세상은 여전히 놀라운 예외적 순간들을 준비하고 있어. 방랑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봐. 너가 모험하고 방황하고 다시 되돌아온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 그리고 조금씩 다시 가보는 거야. 사나흘이면 갈 길이었지만, 10년만에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야지. 그곳에 가도 또 다른 과제가 있을거야. 그래도 가야 해. 여기서, 로토스 열매만 먹고 퍼질러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영원한 삶 같은 건 없어, 그건 영원한 죽음이야. <오딧세이아>는 이런 놀라운 인식의 확장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친구 이계수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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