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로지 브라이도티의 3부작을 읽고 있다. 밑줄을 그으면서 큰 흔들림없이 차곡차곡 읽는다. 2002년작 <변신>과도 잘 연결된다.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단호하다. 그리고 열린 그릇같은 계보학적 방법론으로도 읽히는 페미니즘은 더 매력있다. 진작 읽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다가도 이렇게 지도제작의 관점에서 이정표를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무척 흡족한 느낌이다. 바슐라르가 들뢰즈와 미셸세르의 박사논문을 지도했다는 사실과 조르주 캉길렘이 푸코와 들뢰즈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확인하게 된다. 잘된 작품은 여러 번 교차횡단하면서 읽어야 한다. 뤼스 이리가레를 호명한 것도 시리즈를 읽게된 계기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잘 정리시키는 저작이다.





"우리"


하나도-동일자도-아닌-서로-다른-우리 we-are-not-the-same-but-we-differ는 모두 이 상황에 함께 있다."







"'脫이분'이라는 싹"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

효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고방식을 말해보자는 것
이다.  
자연과 문화. 나눈 둘. 
남녀를 지운 젠더(문화)는 
사회 구성물이다.라는 메시지. 

방식으로만 보면 이것이 
이분의  전형텍스트다. 
효용에 눈감는 무지로 
거꾸로 백년이 무용하다. 


이런 방식은 '덫'처럼 
사유의 구석구석에 
놓여져있다. 
당신이 인식하며 가르는 사이사이, 
좋고나쁘다라고 하며 
분류하자마자 걸린다. 

벗어나고자 하는 걸 빼닮는다.


그러니 어쩌라구. 문화자연. 자연문화. 
그게 낫다. 나을까
생각을 고쳐먹으면 벗어날 수 있는건가. 
네버. 절대로. 
좋다나쁘다의 구름낀 
하늘은 게일 수 없다. 


몸을 끄-으 ㄹ 며, 
몸과 마음을 물들이는 문제다. 
뫔. 시공간축  
앞뒤로 끌며 나아가는 일이다. 
부챗살처럼 펴지는 관계들. 
그걸  몸의눈이 생겨 바로 보며 서는 일이다. 
언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쇠감옥  창살은 
너무도 견고하고 뜨거워 
비집고 나갈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어쩌자고. 
가고싶어도 나가고 싶어도 
방조차 바꿀 수가 없다. 이래서일까. 
이 쇠사슬. 발목을 옥죄는 쇠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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