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써 다시 세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서걱거리는 무엇이 남는다. 최근 세권의 시리즈를 읽고 남는 몇 가지 불편함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그보다 앞서 그가 남다른 점을 세어보자. 그의 언어는 번역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접근이 쉬우며 우리말을 벼리고 벼려 개념어로 쓴다. 또한 보기드문 당대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작은 것들의 힘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의 세상이란 걸 크고 단단하게 말하지 않는다. 말랑말랑, 부드러움의 힘들이 서서히 팔을 뻗고 있다는 걸 느낀다. 대화의 진의를 깨달은 원효의 맥락을 잇고 있기도 하다.
내게 남는 불편함들이란 이런 것이다. 왜 관념론이라 칭할까. 굳이 말이다. 해러웨이든 누구든 불이를 넘는 방법으로 자연이나 문화라 가르지 않고 자연문화라 하면 안되는 것일까. 유물관념론은 어떤가. 관념유물론은 또 어떠한가.
한 인물의 삶-죽음은 섞여있다. 거인의 유명과 추락은 같은 이유일 확율이 높다. 그것을 피해간 거목들은 그는 살핀다. 톨스토이처럼. 그 사이 욕망과 일상 사이 스며드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만진다. 의례의 힘을, 리추얼의 유연안정성을 논한다. 즐김과 낙도의 길 역시 그의 편이다.
그는 귀신과 무의식의 귀기울임도 열어둔다. 꿈의 쓰임새를 만들고 겪는, 마음의 영양분으로 쓰는 그간의 경험으로도 보기드문 철학자이기도 하다. 젊은 사상가들이나 과학철학자들은 굳이 그 방편을 비의식이란 개념어로 확대한다. 살아있는 것도 그러하며 사이버네틱스의 것도 모두 아우르면 된다. 행성적 인지 생태계라고 칭하기도 한다.
몇 꼭지를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