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쉽사리 입에 맴돌지 못한다. 비문이기도 하고, 한참을 다시보고 나서야 뒷말을 있는 말이 앞 문단을 가르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르그송 당신 말을 잘 못알아 듣겠으니 한마디로 정리해달라는 사교계의 부인들의 조크에 이렇게 반응했다 한다. <의식적....어쩌구 저쩌구의 시론>은 초기에 잘 읽히지도 않았다고 한다. <물질과 기억>이 인기를 끈 후에서야 읽히지 시작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베르그송은 <의식적 어쩌구...>를 <<시간과 자유의지>>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싶은 듯하다. 시간과 자유의지.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길은 베르그송에게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관념. 결정론과 목적록. 분석의 기초를 무엇으로 가져갈 것인가? 이분법의 울타리에 갇혀 진자처럼 왔다갔다만 하는 사유의 철학의 유물론과 관념론이란 집착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끝까지 제 것으로 꼬리표를 달려고 하는 아집.  필연은 그렇게 기회를 잃어버리고 자신이 우연에 풀려날 수 있다는 미지의 것을 사유하지 못한다. 


토끼와 거북이. 제논의 역설처럼  우리는 공간을 잘게 쪼개서 무한으로 근사하는 사유에 집착하면, 시간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베르그송은 그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시간과 자유의지.  자연스럽게 공간 속의 한 물체로, 공간이나 장소 가운데 관조하여 바라보는 고체로서 사유를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물은 이렇게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사물 내부의 변화. 시간을 통해 소외, 반성 의외의 면들이 포착되는 것을 포함하여야 전일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흐름이 아니라 정지한 찰나의 순간으로 사유한다. 그것이 문제다. 더구나 고질적이다.


그래서 지속을 말하며, 기억을 말하며, 경험을 논하며, 느낌을 얘기해야 한다. 심신은 이렇게 제3의 생각을 끌어들였을 때만 분리되지 않는다. 경험, 느낌, 깨달음은 과거를 가져오며, 현재를 다른 미래로 이어준다. 과거-현재-미래가 결코 분절된 것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은 스피노자가 얘기하고 베르그송이 다짐하듯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이란 삼요소로 삶은 느끼고 자신의 관심사와 관점으로 이루어나간다. 그때 그때 감정들은 신체와 어우러지며 감정의 파노라마를 이루어 앞으로나를 이루어간다. 그 세가지 요소때문에 각자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홀로 살 수 없기에 나와 집단, 현실이라는 인식의 삼요소 역시 저 바다라는 인식의 지평을 향해 달리 지천으로 강으로 모여가며 사회적으로 농축된다. 이것이 거대한 흐름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살아있내는 모든 것들은 서로로 향한다.


브루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라고 했듯이 스텡게르스는 문명화되기를 말하고 스스로 자신의 성을 만들어갔던 과학의 물결 역시 연관성의 게임이라는 자각이 있었더라면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라는 것은 직선으로 이어진 평탄대로가 아닌 것이다. 지나온 모든 돌보지 않았던 모든 부분적 연결의 생태를 인지하고 느끼거나 깨달을 때야 비로소 모던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학문의 재학문이 있어야 하고 사상의 재사상의 역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결코 더딘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지를 알고 느낄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아직도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따로 보는 공간론자이기에 그것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양자터널링처럼 당신의 작은 앎이 과거-현재-미래를 스치듯 잇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마 시간의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 작은 깨달음들이 모여 번질 수 있을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 우연의 여신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도 우리의 미래세대들도 다 잘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만 우리만 잘 살아내야한다는 강박을 벗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이 한 방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길게보는 길로. 지금도...


#달팽이책방

#이런이론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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