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힌 부분 펼치기 >>

 낙엽.

0. 서푼짜리 뜨문뜨문 독서가 이어지는 것 같다.

0.1 갑자기 눈을 뜨게 된 장님은 보이는 것이 너무 많아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없었다. 박지원은 재맹아설화를 이야기하면서, 다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 그제서야 더듬더듬 장님은 제 집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벽"(마니아)과 "치"는 눈뜬 장님이 다시 눈을 감고 다시 시작하는 제 모습이라고 한다.주체파악을 한 연유에 생긴 집단지성의 흐름이라고 봐야한다고 한다. 주체도 없고 베끼고 전달하기에만 익숙한 지금의 모습은, 쏠림만 있는 것은 아닌지? 학자는 드물고 중개상만 있는 것은 아닌지?

학문은 학문이고, 삶은 삶이고, 학생은 학생이고, 전문가는 전문가이고......어찌어찌하다보니 정보는 홍수로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경계를 섞지 않는다. 더구나 삶과 직교시키지도 못한다. 그런면에서 덧보태어 "지기"와 "붕우"를 갈구한 18세기 지식인은 집단 공진화의 싹을 배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체작업의 시도도 그러하고... ... 어떤 면에서 너무들 재미만 가져가는 것 같고, 그리스인의 삶의 궤적에서 찾는 것보다 이렇게 가깝고, 이땅에서 벌어진 일에서 찾는 것도 의미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일연의 흐름으로 실마리를 19세기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많이 기다려진다.

1.  뇌과학류의 발전이 너무도 빠른 것 같다. 프로이트, 라캉이 뭉뚱그렸던 일련의 정신분석학의 맹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유전자와 호르몬, 뇌의 변화를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 밋밋함의 이해가 아니라 누구나 그 굴곡을 알 수 있고, 다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먼 일은 아닐 듯 싶다. 앎이 과도해 또 다른 환원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지만. 

2. 또 한가지 조선 지식인의 자의식이 변모된 주요 축이  "도 道"에서 "진실"로, "옛날"에 대한 가치지향이 "지금"으로, "저기"에 대한 관심이 "여기"로  바뀌었다는 전제가 있다. "그때 저기의 도"를 추구하던 이전의 가치관이 "지금 여기"의 "진실"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관과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3. 2의 지점에서 보면 지금의 지식인이나 지식인을 빙자한 활동 습속은 설명되지 않을까? 엔엘피디나 계파의 원류가 지적 원천을 제공하는 것이 무슨 이즘에 전도된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그때저기를 지금여기에 주입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마술에 걸린 것도 아닐테고, 끊임없는 퇴행이 되풀이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