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가 동거하여 생활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그 사회의 안전망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라 한다. 16세가 독립할 수 있느냐? 안타깝게도 오이시디 국가 가운데서 소득 만불과 만오천불 사이에서 형성된 사회적 성장자산이나 지표가 이 사회에선 부재하다고 한다. 16세 독립(근근이 살 수 있는)을 둘러싸고 있는 사면초가의 환경은 탄력근무를 적용한 알바시장 역시 최저임금선상에서 2천원대를 받으며, 국가에서 외면하는 대학등록금, 끊임없이 유혹하는 소비시장은 애완동물?류로 길들여지게 하거나 사회를 나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하는 강박환경들 뿐이다.
+ 20대에 대한 저자의 수평적 시야 확산은 여러 준거틀을 보여준다. 프랑스의 10대가 쟁취한 대학의 국유화를 통한 개혁, 독일의 유겐트 세대가 회의적이지만, 철저한 분권이 가져온 훌륭한 사례나 알바만 해서도 2-3백은 받아 독립할 수 있는 호주, 제한적이지만 직장내의 철저한 보장체계의 미국은 뭔가 제도적으로 지금보다 개선된 삶의 구조를 가져온 것을 선명히 볼 수 있다. 반면 결혼연령이 높아지는 영국의 모습과 단카이란 덩어리로 무색무취하게 취급받는 일본의 버블붕괴로 맞는 삶의 피폐, 68세대보다 큰 경험을 가진 386세대의 불감증까지, 서투르지만 <세대>라는 틀로 이렇게 확연히 제도-삶을 차이는 증명해보이는 저자의 능력이 존경스럽다.
+ 그 와중에 있는 이땅의 <88만원세대>는 자본에게 역시 덩어리로, 민족주의나 럭셔리한 사치품으로 쉽게 쇼핑하게하여 이윤을 취할 수 있는 부류로 취급되고 있다 한다. 과연 이 <인질>의 구출이 가능한가?
+ 노동안정성을 확보하고 다안성(다양성과 안전성) 생존이 가능하고, 알바가 살 수 있고, 20대의 예술가가 나오게 할 수 있으며, 진지를 구축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 중고등학생의 나이에 맞은 4.19혁명, 대학민주화, 아니 고등학교로 고스란히 전이된 세대들과 달리, 지금 20대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오감으로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철저히 단절된, 자발적복종과 내면화의 과정이 심화된, 철저한 자본의 흐름만 온몸에 체감되고 있는 세대는 아닐까? <16세 독립>에 당신의 자녀가 한다고 하면 찬성하세요? 라는 질문에 머리 속 대답과 현실의 대답은 확연히 갈라진다.
-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한번도 회의를 할 수 없는 어린이 학급회의, 두발-교복자유화가 된지 27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자발적 복종을 하는 청소년, 퇴행하는 학칙. 인질은 더 이상, 자신이 인질인지 모른다. 더 안락함을 요구할 뿐, 인질이 구조되길 바라지 않는다. 두렵다.
- 자식을 볼모로 잡힌 부모 역시 인질이다. 자식때문에 자신을 삶을 불쑥 떼어놓는다. 언제 짤릴 지 모르기때문에, 노후때문에, 불쑥 사버린 집에 궤어넣어야 하는 빚때문에 부지불식간 인질이 되어버렸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자식교육- 노후 -집]에 대한 고정관념에 벗어날 수 없는가? 삶을 저당잡힌 <인질공화국>에서 먼저 관점을 해방시킬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프랑스 10대가 바꿔낸 대학 국유화와 그 대학 인재를 그 지역에서 할당제로 뽑아 대학서열화에 균열을 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마음과 고민을 한 곳에 모은다면, 돋보기로 햇살을 모아 태워버릴 수 있다면 다른 부수적인 것이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노후에 백만원만 보장된다면, 왜 그다지 정년연장을 꿈꾸며, 퇴직과 고용없는 성장을 요구할까? 오히려 젊은이들이 일하게 양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집이 재산이 되어, 그 빚을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하는 것일까? 세계 11위를 자본주의국가가 이렇게 어이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 기막히지 않는가?
- 내새끼만, 내가족만, 내회사만 어느새 사라진 우리라는 용어를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은 대체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저자의 균열내기, 준거의 틀은 평이하고 쉽다. 왜 세상은 쉬운 일을 돌아돌아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상식과 인권은 인질공화국에서 숨쉴 수 없다. 내새끼만 회자되는 사회에서 조금도 그 상식과 인권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 부모가 8시간 노동할 근로기준법이 있다면, 아이들도 8시간 이상 공부하지 말아야 권리가 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할 수 없게 만들고 공부하는 공부기계로 전락시킨, 노예화시킨 사회는 4.19처럼, 데모로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배운 386처럼 그들의 빗장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결정될 수 있도록, 그것이 20대와 앞으로 20대가 될 친구들에게 세대개념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은 아닐까?
- 그래야만 우리도 그 인질에서 구출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불감증과 상식과 인권, 사회재계약의 걸음으로 한발 다가서는 것은 아닐까? 칭칭 동여맨 <마음은끈>을 풀어주어야 한다. 두눈을 가리운 <생각의 끈>을 풀어주어야 한다.
낙엽. 아**미 071030 , 세미나 모습을 정리하고 있다. 우선 날아가버릴 것 같은 흔적은 뭉쳐서 남겨두어야겠다. 좀더 세밀하게 정리해야지..그럴 수 있을까? 마음에 담고 있으려니 꿈자리도 뒤숭숭하다. 안타깝다. 장마비에 웃자란 풀들 처럼 이 놈의 정신잃어버린 사회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