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과 교육 등 공공 부문은 앞선 인용문에 쓰여 있는 윤리, 의무감, 자부심, 직업의식, 용기처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내적 동기에 기초해서 겨우 성립되고 있습니다. 내적 동기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책임입니다. 그것도 외부에서 떠넘긴 책임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자기 속에 내재한 책임이죠. 좀더 강하게 표현하면, ‘사명입니다. 67

 

우리가 시간을 들여 함께 야구를 하면서 경기 전체를 관찰하고 파울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듯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온 언어놀이를 조금씩 배우고 함께 언어놀이를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창문이라는 낱말을 언어놀리에 섞어가며 배웠듯이.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언어놀이를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152

 

미국의 SF 작가 로버트 블록의 단편 중 <부서진 새벽>: 핵전쟁 후 죽음의 재가 흩날리면서 건물 안의 군사령관은 우리나라가 이겼다.”라고 크게 웃는 장면을 되보면서, 이 작품은 100만 명의 핵규탄보다 뛰어나고 큰 울림이 있다고 여긴다. 197

 

<부활의 날> 스미르노프 교수: 들어줄 사람이 없는 세계를 향해 죽어가면서도 계속 얘기합니다. 3개월 전 까지 세속적 생활, 보잘것없은 일상에 빠진 상황에 대해 그는 인류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지나치게 얽매였다고 표현합니다. 또한 그와같은 우리의 인간적인 일상생활에 대해 도리어 애처로울 정도입니다.”라고 말했죠....이 세계가 위태로운 공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잊어버린 척했을 뿐이죠. 226-227


볕뉘


1. 


셜록홈즈-마르크스-스피노자. 그들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건너뛰지 않는다. 세심한 눈길은 계단의 숫자까지 꿴다. 사소한 하나하나가 어떻게 전체를 움직거리게 만들 수 있는지 결국은 알게된다. 그러니 그들은 사물을 관통하면서 꿰뚫는 법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손끝만 보고 있단 말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언어화법에 걸려든 당대인은 이분의 구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도와 모만 보고 원할 뿐, 어디에서 개-걸-윷에 느낌을 머물게 할 수 없다. 지독한 불감. 


2. 


과거-미래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선물이자 증여다. 간략하면서도 쉬운 글과 쉬운 호흡, 그리 많지도 않은 저자들을 지나다보면, 묵직한 것이 걸린다. 나만의 삶만이 아니라 세계성이란 그물. 그 곳에 찌릿 감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 의도에서 아마 글틀과 글의 음악을 대유했을 것이다. 


3.


지금은 어디쯤일까? 산과 산사이 바위가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위태롭게 산 정상 위에 바위가 서있는 것일까? 위태로움은 배가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어떻게 될지 실감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공포에 가까워 아무 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는 상태는 아닐까? 


4.


누군가 외치거나? 누군가 지금 위태로운 상황을 인지하게 만들거나? 나만은 그 바위 아래 돌멩이 하나를 궤거나 하는 시도가 필요한 건 아닌가?라는 질문들을 하고 있다. 지금 밖을 보려는 노력은 스스로 안스러워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5.


산불과 수마, 끊임없는 재해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1인 가족, 관계의 허약함은 쓰나미처럼 몰려올지 모르는 재해와 만일에 대해 대비하지 못한다. 그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대체 왜 우리는 상상하지 못한단 말인가? 가벼운 상상조차 일상에 접목시키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그 절박함을 외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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