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해관계에 근거한 자본주의 정신이 만들어진 과정을 찾고자 했으나 이 역시 우연이 겹쳐진 것이란 얘기가 떠오른다.(엘버트 허시먼, <<정념과 이해관계>>) 구석기 수렵채취문화에 대한 기존 연구들도 다양성이나 풍부함으로 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지적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있다.(로버트 켈리, <<수렵채집사회>>) 신석기의 문제점, 농업혁명부터가 가장 큰 변화라는 관점은 최근들어 더 자주 거론되고 있다.  


2. 서양사상사라는 것과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도 폐기된 역사들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입맛에 맛는 주류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우는 일의 반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수많은 <<자기이론>>들이 호흡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말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은 아닐까? 


3. 이 해적 계몽주의라는 책은 <<모든 것의 새벽>>이라는 책과 궤를 같이하는 최신 저작이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코로나로 유명을 달리했다. 해적이 계몽주의의 원조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큰 해악이 아니라 신석기부터가 더 큰 문제라고 얘기하는 부류와 다른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역사라는 것은 있는 사실들을 큰 통에 넣고 흔들어 다시 꿰어내는 능력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과학이 진리에서 벗어나 상상을 넘나들고 있기도 한 것이고, 인간이란 존재가 특수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과학과 역사, 종교가 서로 넘나들지 말란 법도 없는 건 아닐까? 그렇게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야 지금을 구해내는 깨달음같은 관점을 얻어내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을 구해내기 위한 계보학의 일환으로 봐도 될 것이다.


4. 해적 계몽주의 부록 도표를 보면 서양사상사의 출발에 있어 마다가스카르 해적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5. 교류사나 비교문화. 각자 독특함을 뿌리로 삼는 것 또한 지금에 비교하면 양호한 자극을 낳을 수도 있을 듯하다.


볕뉘


뿌리나 출발점을  삼아 기술하는 역사는 많은 것을 사유하게도 만들지만, 그 닫힌 매듭은 또한 그 주위의 것과 연결점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민족이나 신이나 또 다른 우월감을 위해 찾아낸 역사들은 사상누각일지 모른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 짓을 해온 것이 우리 인류이기도 하다. 지금과 연결된 고고학과 계보학은 자랑하고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고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만드는 작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읽어도, 무겁게 읽어도 좋을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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