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배리어가 모래밭이었다면
며칠 반복되는 화면과 장면이 마음에 박혀 빠져나오질 않는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바램은 정년 뒤 본 항공사를 다니는 친구에겐 어려울 걸세라는 답으로 돌아왔다. 미리.
알 수 있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 그런 것들이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오늘도 그런 시간들로 메꾸어진다.
국회가 넘긴 일들을 행정이 미루지 않고 거부하지 않는 것이 원활한 흐름일 것이다. 매끄러운 흐름을 거부한 정권과 여당은 여전히 몽니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이명박정권부터 아전인수의 방송법은 언론과 미디어를 괴물로 키워놓았고, 거기에 심리적 안도감을 느끼는 무리의 시민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나씩 잘못 맞추어진 아귀는 다시 맞추면 되는 일이다. 좀더 시간을 길게 잡으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자기만 아는 부류들의 말로를 우리는 어김없이 직시하고 있다. 그 소멸하는 권력을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류들도 알고 있다. 한치도 어김없이 법에서 벗어나는 말종들은 법의 이름으로 행위를 멈추게 하면 될 일이다.
그렇게 시류와 세상에 분탕질을 하는 인간들은 늘 있어왔다. 자기만 봐달라고, 주변을 전혀 살필 줄 모르는 인간들 역시 늘 있어왔다.
촘촘하게 자신의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부류들. 쥐어짜내다가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버리는 인간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왕정을 꿈꾸던 자.
생명과 안전이라는 장벽을 허물려고 하던 자.
조그마한 이익을 더 손아귀에 쥐려고 시스템을 쥐어짜는 자. 모두 한 통속임을 잊지 말기를. 더 이상 그런 자들을 곁에 두지 않는 사회가 되길 세밑에 기원해본다.
배리어가 아니라 배리어가 아니라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도 생명과 안전이 숨쉬는 일상을 꿈꾸고 바래본다.
볕뉘
2024년 올 한해도 반갑고 고마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