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주말 그림작업중에 후배지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몸을 담았던 단체에서 강연자로 소개한 책이기도 해서 관심있었는데, 곡 읽어보라는 전갈이다.  한 선배에게서 근황을 들었던지 이러다가 이곳 지역사람 되는 거 아니냐고 농담한다. <신곡>이 아니라 접근하고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감탄스럽다고 다짐을 넣는다.







둘.


 풀은 꿈을 꾸는가? 근래에 불쑥 스며든 생각은 도망치지를 못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생명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 생명체는 잠을 자는 동안 어떤 형태로든 쌓인 것들을 풀게 되어있다. 사람들이 꿈에서 그러한 일을 하는 의식작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마 꿈도 꾸지 않을까? 그렇게 이름을 붙여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긴장을 푸는 기능들이 있을 것이다. 아메바도 그런가하면 답은 그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어디쯤에선가 그런 책은 나오지 않았을까하고 더듬어 본다.  여러 해, 아니 십년 전쯤에 <들풀>이라는 주제로 책들을 읽었던 적이 있다. 저절로 손이 가는 책이어서 이렇게 손을 뻗는다.




셋. 동결견, 오십견, 관절낭염이라고도 하는 윗옷을 벗기도 힘든 증상이 나타난지 몇 달이 지나고 <어깨동무>라는 한의원에 들렀다. '동결되었다'는 표현이 괜찮았다. 잘 녹혀주면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3주 진단이 나왔고 하루이틀 지나서 뒤쪽 회전말고는 다 좋아져서 한의사도 놀라는 눈치였다.  <<바디 멀티플>>이란 책은 <동맥경화>를 '중첩'되게 다룬다. 의사, 영상파트, 한의원, 환우, 연령별 차이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에서 이 병을 쫓아가다보면 우리가 하나에 지나치게 권위를 위탁하고 몰아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다가 정답같은 것이 없다라고도 느낄 수 있으나 결국 '하나 더하기 여럿 '이라는 판단력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캉길렘은 알튀세르, 발리바르 등등 프랑스 이론 산실의 거장 은 아닐까. 사유의 풍요로움은 거기서부터는 아닐까. 과학사와 철학사의 겹치게 볼 수 있는 <<조르주 캉길렘>>을 빨리 완독하고 있지 못하다. 이 번 주문한 책으로 겹쳐 소화할 수 있기를 빈다.  어깨가 말렸고, 수직에서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날개뼈 아랫근육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잔근육들을 풀어주면서 살지도 못한다는 습관들이 통째로 걸려있다. '멀티플'하게 증상과 치료효과를 보는 지금에서야 폼롤러를 끼고 있다.












<<과 교환양식>>을 보다가 어 고진이 이런 면이 있었어 한다.  이 책은 무척이나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고진 책들을 바리바리 싸서 대전 대동 작은 책방에 건네준 적이 있어, 이젠 수중에는 없다. 그의 삼부작은 이 두 권 외에 한 권이 더 있다. 다시 읽어내야 한다. 칸트의 초월성와 마르크스다. 이제는 많이 만만해지기도 하다. 새롭게 읽어내는 기회가 왔으니 충분히 즐길 일이다. 기대된다.







 다섯


 신양객잔 주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강좌를 진행중인 것을 잘못 알아들었다. 프랑스 유학 경험을 듣고 르페브르 전공자의 강연이 있다는 걸 이 분으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생활세계의 혁명성에 대한 몇 권의 책들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혀야 할 부분을 나누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게 여겨지기도 하다. 이 또한 십여년도 지난 일이지만 지금이 오히려 <혁명>이라는 말에 더 신경이 뾰족해지기도 한다.









볕뉘


이렇게 읽지 않은 책들을 소개한다. 작은 책방에 주문한 책들이고 즉시배송이 아니라 찬바람이 부는 날, 라이딩으로 들르면 이 책들이 배달와 있을 것이다. 그런 기다려주는 행운을 펼치는 기분 또한 새로울 것이다. 그러면 한결 더 흥미롭게 저자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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