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 그 꽃을 보기 전까지는

  무슨 물에서 피는 신선 같은 꽃인 줄만 알았다

    단칸 셋방 어두운 골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산다는 우리 반 지진아 순화네 집에 처음 갔던 날, 주인집 뜰에 노오랗게 피어 꽃샘바람에 오종종 떨고 있던 그 꽃, 혼자서 골방을 지키고 있던 할머니가 손주 녀석 담임선생을 위해 내온 오렌지쥬스 한 잔, 그 곡진한 마음도 아랑곳없이 끝내 말문 열지 못하고 그저 건성으로 입만 축이고 돌아서 나올 때, 부끄러운 듯 죄스러운 듯 수줍어 말도 못하고 문밖에 서 있던 우리 반 순화의 눈빛을 닮은 애잔한 꽃, 봄 햇살에 노랗게 흔들이며 울컥, 눈시울을 적시던

  수선화, 그 곷을 보기 전까지는

  때로 마음의 상처도 꽃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신발에 대한 경배

신발장 위에 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다
탁발승처럼 세상 곳곳을 찾아다니느라
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들은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
저 신발들의 행장(行狀)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
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경배한다
신발이 끌고 다닌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
내가 평생 읽어야 할 경전이다
나를 가르친 저 낡은 신발들이 바로
갈라진 어머니의 발바닥이고
주름진 아버지의 손바닥이다
이 세상에 와서 한평생을
누군가의 바닥으로 살아온 신발들
그 거룩한 생애에 경배하는
나는 신발의 행자(行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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