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5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사회적 자아의 해체: 이행으로서 기질: 패싱: 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 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 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 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 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 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240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 타자성이냐 소외냐. 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 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 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 추억의 시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




볕뉘


1. 


정체성을 가진 개인, 변하지 않는 자아라는 개념이 기존 철학의 근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을 염두에 둔 가상의 세계-안-존재라거나 딱딱한 고체 형태의 개념을 가진 실존주의자란 서술이 주장하는  즉자, 대자 개념은 여기서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칼폴라니가 자본이 토지와 노동의 뿌리를 끊고 마치 스스로 증식하는 모습을 띤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늘 조직이나 사회에서 발라낸 형태로 개인을 가정하여 사유를 출발시킨 것이다.  발라낸 개인으로 사유하면 환경과 조건들이 세심하게 읽힐 수 없고,  자수성가나 능력자, 천재라는 개념으로 별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 무책임한 개념의 개인은 사회와 개인의 층분리를 만들거나 산술적인 합의 계급이라거나 변화를 만들어내는 액체로서 화학적 결합을 갖는 경로를 볼 수 없다. 그 변화가 어디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분위기란 색이 바뀌게 되는지 발화나 변동을 쉽게 잡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


결론 부분에서 언급하는  비유인 실타래라는 컨셉은  무척 좋아하기도 하는데, 지나간 과거라는 것이 한 올 한 올 풀어내면서 새롭게 직조할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것은 순간순간이 앞으로 열려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사물이란 것을 엉킨실타래의 형상으로 보게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나 하나 풀어내기 위해 얽힌 힘들을 구분해내는 것과 끊어지지 않게 조절하는 정교함은 사물 그 자체를 춤추게 하는, 물활의 심경과 시인의 감수성을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을 풀어가는 묘사에서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작가의 능력때문이기도 하다.


3.


부르디외를 선택한 것이 도드라져보이는데, 문화자본이나 상징자본이나 구별짓기 계급의 재생산을 기본틀로 해서 구조적인 부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렇게 묘사하거나 기술하고 있는 배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이 책을 올바로 읽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하는 자본론읽기가 덧붙여져야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계급횡단자란 개념엔 계급의 재생산이란 큰 흐름이 있는 것이니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계급횡단자만 쏙 빼내서 읽게 되면 사회적 우울이라든가 구조적 모순 저자가 읽어내고 싶어하는 다음을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4.


또 하나는  스피노자를 잘 읽어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감정,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감정에 붙어있는 현실들을 불러내어 감정이란 것이 사회와 역사와 연루된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성과 객관화가 갖는 편협함을 잘 느껴보시길 바란다. 역으로 감정이 갖는 구체성과 주변에 뿌리내린, 뿌리내릴 모습들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 거꾸로 많은 놀라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독서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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