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5. 공산토월편.  <대부>에 대한 영화평을 써달라는 대목인데 다른 사설이 길다. 읽는 와중 시인들과 교제를 숨김없이 적고 있다.


대전 박용래시인, 사천 박재삼시인, 광주 박성룡시인들과 친분도 그러하며 몇날 며칠 헤어지지 않고 안부와 시풍을 나누는 모습들도 겹친다싶다.


윤중호시인 역시 이런 선배들에게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답을 못하는 이문구는 혼이 난다. 그래가지고 무슨 문학을 헌다구. 한심허구나야.... ...



언어를 낳는 시인들은 이미 많은 세상을 낳았을게다. 그 그물에 걸려들지 못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늘 사막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이모양 요꼴인지도... ...


시가 구미를 당기는 날들이다. 진주에서 밤새 얘기를 나누다보니 밖이 희윰해졌다. 사람들도 그리운 날들이다. 가을그늘은 노랗지. 빨갛지. 가을도.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루 달리는디 말여....
"경비원으로 묻어갔었다 --그 말이라...."

오 --그 눈...그 눈송이.....그 두만강
"......"
"이까짓 눈두 눈인 중 아네? 눈인 중 알어? 너두 한심허구나야....원산역을 지날 때 눈발이 비치더니, 청진을 지나니께 정신웂이 쏟어지는디, 아 - 그런 눈은 처음이었어......아 -- 그 눈 ..... 그 눈...."
그는 이미 떨리는 음성이었고 두 눈시울에는 벌써 삼수갑산 저문 산자락에 붐비던 눈송이가 녹으며 모여 토담 부엌 두멍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차가 두만강 철교를 근너가는디....오! 두만강 - 오, 두만강! 내 눈에는 무엇이 보였것네? 눈 ! 그저 그 눈! 쌓인 눈, 쌓이는 눈...아무것두 안 보이구 눈 천지더라. 그 눈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워땠것네? 이 내 심정이 워땠겄어?"
"워땠는지 내가 봤으야 알지유."
"그너냐, 야, 너두 되게 한심허구나야. 그래가지구 무슨 문학을 헌다구. 나는..나는 울었다. - P180

그냥 울었다. 두만강 눈송이를 바라보며 한없이 한없이 그냥 울었단 말여..."
어느덧 그의 양어깨에 두만강 물너울이 실리면서 두 볼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의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 두만강.....오, 두만강 눈....오...오...."
그는 아침 9시 반부터 두만강을 부르며 울기 시작하여, 그날 밤 9시 반이 넘어 여관방에 쓰러져 꿈결에 두만강 뱃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기까지 쉬지 않고 울었다. - P181

우리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잤는데, 창가에 찾아온 빗소리에 깬, 박시인의 고시랑거리는 소리에 일어난, 임시인의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내가 눈을 떴을 때, 부실거리는 빗방울에 유리창에는 조춘이 숨쉬고 있었고, 그 너머 하늘은 경칩 달무리 비낀 미나리꽝마냥 깊고 묽었다. 박시인이 먼저 한말 시골 나그네 핫바지 같은 내복 차림으로 창문을 척 열어붙이더니 금방 울음이 터질듯한 음성으로
"정월 초닷새 대전 추녀 밑에 비가 내리다....역전 골목을 돌아가는 리어카의 파빛..."하고 중얼거린다.
"뭣 보구 또 시 한 수 짓는디야"
하며 임시인이 뒤를 이어 내다보고는,
"저게 무슨 파여, 미나리구먼, 미나리빛으로 고쳐."했다. 나도 덩달아 벗은 몸으로 내다보았다. 빗속의 리어카꾼이 무와 시금치를 가득 싣고 곱은탱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 P182

그들과 기질이 상통할 뿐 아니라 여러모로 닮은 서울 시인으로는, 나무 때어 눌린 무쇠솥 숭늉 같은 박재삼씨가 있다. 누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잔 헐까요?"
하고 물으면, 고은씨나 이호철씨 못잖은 반가운 미소를 보이며
"안 헐 수 있습니까."
하고 입술부터 핥는 이 낮술의 대가는, 설령 박성룡씨가 없는 자리더라도 반드시 한가락 뽑아야 배긴다.
"3류 시인 난해시보다 뎔 배는 좋다 말이라...."
그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으레 가사부터 한바탕 읊는 것을 바른 순서로 친다.

사공아 뱃사공아 울진사람아
인사는 없다만 말 물어보자
울릉도 동백꽃이 피어 있더냐
정든 내 울타리에 새가 울더냐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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