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책을 펼치면서 몇 장을 넘기다보면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옆의 책은 제1부 이론, 제 2부 실천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저자가 열 분 이상이 된다. 서론에 구조와 목적, 보는 방법을 보다가 멈칫하고 있다. 밑바탕에 부르디외의 (문화생산의) 장의 개념을 근간으로 한다고 한다. 부르디외. 언제 적 부르디외를 소환한다 말인가. 그리고 사회학을. 읽어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마지막 장 베를린 재건축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흥미롭다.(재닛 스튜어트) 이 장을 먼저 읽고 나머지는 추려 읽게 될 것 같다.
1.
무위인. 약하지 않을까. 단행본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덥썩한다. 펼쳐보니 묶음집이라 밝히고 있다. 제3부는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존재, 주체, 윤리. 되기의 윤리학은 좀 처져 있어 그 자체로 생동감을 잃은 것은 아닐까 싶다. 지난 십여년의 사유보다는 지금의 사유가 궁금하다. 그렇게 한 걸음도 못나가고 멈칫하고 있다. 저자의 세계철학사 1-4시리즈가 궁금해진다.
2.
자본주의 아래 인간은 자본주의보다 예속을 위해 더 싸우는가? 왜 그런 주체만이 재생산되는가? 국가는 대체 뭔가? 저자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불러낸다. 들뢰즈가 문제제기한 물음을 지금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한다. 경쟁과 공정(성과급의 다변화- 이 것은 마르크스가 예견한 바이기도 하다. 자본론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고 대기는 잠식하는 가스로 가득차있다.
이 세가지 물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첫 번째, 세 번째 질문이 아니라 두 번째 질문 서술을 읽으며 막힌다. 욕망. 들뢰즈만이 아니라 네그리 하트의 욕망.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데로 읽는 건 아닐까. 천 개의 고원 기관없는 신체(몸체) 편을 다시 읽는다. 삐긋하면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저자는 들뢰즈가 주목한 흄을 불러낸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심하게 읽게 될 것 같은데, 이렇게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3.
얕은 책들은 위험하다. 마치 단물 같아서 빨아먹고 나면 남는게 없을 수도 있다. 1/3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데, 긴가민가 한다. 대중서라는 것이 가뜩이나 책들을 읽지 않고, 이리 가벼운 한권만 읽고 신주단지처럼 이야기하는 세태가 그려지기도 해서다. 부디 괜찮길 바란다.
4.
<<지옥에서 보낸 한철>> 옛 판본을 다 읽은 줄 알았는데 접혀있었다. 오고가는 길 이책과 함께 읽고 나서야 온전해진다. 함께 읽어나가면서 랭보야 말로 시의 힘을 믿었고, 베를렌과 친구들과 밀도높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너무도 일찍 고독이라는 신발을 신을 줄 알았던 건 아닐까 싶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힘. 어디든지 살 수 있는 힘.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결기가 그림자처럼 붙어있을 수 있던 걸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브 폰푸아가 이 제목의 글은 85세가 되어서 쓴 글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또 한번 증명해낸다.
-1.
두서없이 잘 읽히지 않는 책들을 남겨본다.
구름은 불고 바람은 하얗고 자전거 발틈 사이로 가을하늘이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