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914년(1915년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관하여>에서 신경증과 정신병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라는 제목을 달고 2장은 시작한다.  겨울눈밭에 늑대의 발자국 흔적. 이 있는 사진과 함께.


1. <<앙티오이디푸스>>에서 이 무의식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천 개의 고원>>이 만들어진 이유를 여기에 쓴 것이다. 그러니 가장 핵심적인 장이기도 하다.(물론 그는 반대할 것이다. 다 중요하다. 다 필요하다. 고무줄뭉치의 한 올을 당기면 그 긴장이 느껴진다. 어느 줄을 당기든 말이다.)


2. 프로이트는 환원주의자다. 모든 것을 거세로 몰아가는 자. 무의식을 열어버린 자이긴하지만 교묘하게 닫아버린 자이다. 


3.

발리바르를 비롯해서 알튀세르 사단?에는 <자본론>읽기 모임이 있었다. 그런 연유뿐만이 아니라 그 사유의 바탕에는 마르크스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라이히의 문제의식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이 이론에 접목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봐야한다. 알튀세르는 궁금했다. 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똑같은 인간들이 재생산되는지 말이다. 그래서 그가 얻은 소결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우울을 앓을 수밖

에 없다. 우울증, 신경증, 번아웃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의식이 만들어진다. 성과와 목표를 향해가는 눈옆을 가린 경주마의 비참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양산되는 우울의 무더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고 살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체 내팽겨쳐지고 있다. 그(녀)가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의 무의식의 그물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증상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모호함이 시대를 관통한다.


4. 들뢰즈 가타리는 그런 연계 상에 있다. 이 책 곳곳에 그는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를 불러낸다. 이 책 <늑대인간>을 잘 읽어내야 한다. 그러면 절반은 온 것이다. '정신분석'이 아니라 '분열분석'이라고 하는 이유를 눈치챈다면 말이다.


5. 무의식은 생성되는 것이다. 이 점을 말하고 싶다 그들은. 그래서 무의식조차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던 것이다.

65 충분히 무리 속에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바깥에, 아주 먼 곳에 존재하기. 버지니아 울프류의 가장자리에 있기, 또는 산책하기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

67 무의식의 문제는 확실히 생식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오히려 서식, 개체군과 관련된다. 그것은 땅이라는 충만한 몸체 위에서 일어나는 세계적 개체군의 문제이지 유기체적인 가족의 생식 문제는 아니다.

68 끊임없이 변화하는 저 나누어지지 않는 거리, 그 요소들이 매번 본성을 바꾸지 않고는 나누어지거나 변화되지 않는 저 거리. 다양체의 요소들이 갖고 있는 내포적 성격이자 그 요소들의 관계가 갖고 있는 내포적 성격이 아닐까? 이는 마치 속도와 온도가 속도들이나 온도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매번 본성상의 변화를 표시해주는 다른 속도들과 온도들 안에 감싸여 있거나 다른 속도들과 온도들을 감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양체를 측정하는 원리는 다양체 내에서 작용하는 힘들 속에서, 다양체를 점유하는 물리 현상들 속에 있으며, 정확히 말해 내부에서 다양체를 구성하며 또 그때마다 가변적이고 질적으로 판이한 흐름들로 나뉘는 리비도 속에 있다.

69 <늑대>, 그것은 무리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영으로부터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 매 순간 각각의 거리들은 분해할 수 없다 - 어떤 순간에 특정한 형태로 포착된 다양체이다. 영, 그것은 늑대 인간의 기관 없는 몸체이다.

69 무의식이 부정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무의식에는 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으며 영점에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무한한 움직임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점은 결코 결핍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받침대와 앞잡이로서의 충만한 몸체의 긍정성을 표현한다.

75 어떤 군인은 늑대가 되고 어떤 군인은 개가 된다. 두 가지 다양체 또는 두 가지 기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하나의 동일한 기계적 배치물, 다시 말해 "복합체(=콤플렉스)"에 대응하는 언표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오이디푸스, 오로지 오이디푸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아무 말도,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모든 것을, 즉 군중과 무리를, 몰적 기계와 분자적 기계를, 모든 종류의 다양체를 으깨어 납작하게 만든다.

79 먹이라는 오이디푸스적 장치, 먹기 위해 짐승을 죽이기, 또는 썩은 고기를 처리하기 위해 먹어치우기. 재칼들은 문제를 적절히 제기한다. 그것은 거세의 문제가 아니라 "청결"의 문제이며, 욕망-사막을 시험하는 문제다. 어느 쪽이 이길까? 군중의 영토성이냐 무리의 탈영토화냐? 리비도는 극이 상연되는 기관 없는 몸체에 다름 아닌 사막 전체를 적시고 있는데.

80 개인적 언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전혀 없다. 모든 언표는 기계적 배치물, 다시 말해 언표행위를 하는 집단적 행위자의 산물이다.("집단적 행위자"란 말은 사람들이나 사회가 아니라 다양체를 의미한다.) 고유명은 개인을 지칭하지 않는다. 반대로 한 개인이 자신의 진정한 고유명을 얻는 것은, 가장 엄격한 몰개성화가 실행되고 난 후에 개인을 관통해서 지나가는 다양체들에 개인이 열릴 때이다. 고유명은 다양체에 대한 순간적 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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