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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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직 책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윤샘님의 말을 전하면 곧 나올 것이라 한다. <계급의식이란 무엇인가?>란 텍스트인데, 위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리뷰와 함께 보면 괜찮을 것 같아 몇가지 흔적을 남긴다. 라이히의 천재성을 차지하고서라도 현재에 다시 돌아볼 만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1.
계급의식을 두가지로 나눈다. <지도부의 계급의식>과 <대중의 계급의식>이다.
2.
계급의식이란 것이 믿는 것처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없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의식은 많은 구성요소들로 나타나며, 이 구성요소들은 그 자체로 계급의식을 구성하지 않지만(배고픔) 서로 결합되어 계급의식이 될 수 있다.
<지도자의 계급의식>은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모순들에 대한 지식, 대안들에 대한 지식, 대안체제에 대한 필요성, 역사의 진보적인 힘들과 퇴보적인 힘들 등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차 있다. <대중의 계급의식>은 그렇게 장기적인 측면에서 통찰력을 갖고 있지 않다. 대중의 계급의식의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모든 나라 모든 수준에서 가장 광범위한 대중의 욕망과, 사소하고 진부하고 일차적이고 단순한 일상생활과의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이 방식을 통해서만 두가지 계급의식 사이의 모순과 거리를 없앨 수 있다.
3.
자본주의 질서에 모순되는 것은 무엇이든, 전복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계급의식의 요소로 간주할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와 유대를 창출하거나 유지하고 지지하고 강화하는 것은 무엇이든 계급의식의 방해물이다.
4.
청소년/여성/성인 남성노동자/어린이
5
대중에게 끊임없이, 꾸준히, 단순하게, 명백하게 향하고... "고위정치"에 대중을 적응시키는 대신 대중에게 정치를 적응시키고, 그럼으로써 정치를 민주화하고, 단순화하고, 모두가 접근시킬 수 있도록 만든다는 원칙...의도하는 정치의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의도하는 정치의 형식-언어-사유과정이 고위정치의 그것들에 적응하기 때문에, 의도하는 정치가 대중에게 말하는 대신에 대중을 어린이처럼 다루기 때문에 "고위정치"는 존립할 수 있다.
6.
두가지 계급의식이 있고, 이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6.1 각기 다른 사회층,직업,연령집단,성별에 속한 사람들 안에 잠재해 있는 진보적인 욕망,관념, 그리고 생각들은 무엇인가?
6.2 이러한 진보적 욕망, 생각 등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욕망, 두려움, 사유, 전통적 속박은 무엇인가?
뱀발.
0.0 <민중>, <당파성>,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 전제는 늘 만들어진 계급의식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 개념을 분절시키면서 풍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생각은, 결정이나 방향에 있어 다양성, 풍부함보다는 끊임없는 뺄셈을 재생산한다. 이렇고 저런 이유로 남는 사람도, 현실에 대한 이해도 점점 차이를 벌어지게 만든다.
0.1 단순히 이야기해서 조건에 대한 이해와 언어의 재생산, 지속적인 덧셈를 하고 있느냐의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진다.
0.2 그런면에서 매체들의 대부분은 상업매체와 기존매체를 뛰어넘는 표현도 쓰지 않는 것 같다. 과도한 이념성 일색의 기관지나 매체는, 기존 정치용어와 다를 바도 하나 없으며, 그들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다. 어린이나 비정규직이나 고령자, 사채에 찌들리는 대중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다.
0.3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의 계급의식 또한 발화지점보다 제 모둠의 관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경화증에 시달리고 있다.
0.4 라이히가 말하는 오르가즘과 성에 대한 관점은, 포르노와 성방탕과는 무관한 것 같다. 그런데도 쉽게 논의가 어려운 부분은 관점과 사실에 대한 왜곡으로 이어질 확율이 대부분이고, 갑옷을 삶으로 입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성환원론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노동'과 '성'이란 주춧돌에 대해 사실과 의견, 관점을 분리해내는 것이 어쩌면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을 것 같다.
0.5 시절이 너무 수상하기도 하고, 바닥에서 부터 채워나가지 않으면, 발딛는 곳부터 그렇게 시작하지 않고, 끊임없는 도피와 말을 받아줄 친구를 사귀는 일도 지금보다 낫겠지만, 전부는 아닌 듯 싶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서 있나? 하고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프다고 느끼기만 하는 것을 아닐까? 언어를 알아내려는데 시집살이 삼년?만큼, 몸 담그지 않으면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숱한 정책의 실패가 몸담그지 않고, 머리로만 생산한 정책이기에 해결과정도, 실질적인 대안도 나오지 않고 혼란만 가중시키는지도 모른다.
0.6 못배우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 수구꼴통에 가장 많은 표를 던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사실이다. 민중은 언젠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들고 일어섰는데 당신이 해준게 뭐냐라고 하면 대답할 말이 있을까? 신비주의와 정치는 현실과 갈라진 틈을 환상과 약속으로 채운다고 한다. 이 사이에 어려움을 드러내고 감추지 않는 것이 함께 고민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그런면에서 여전히 선거때만 되면 세뇌되어 그럴 수 있다고 자신을 바꾸는지도 모른다.
0.7
어쩌면 묻는 방식만 달리해도, 듣는 방식만 달리해도 쳇바퀴에서 맴돌지 않고, 튀어나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