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인정하기
"관용은 조화가 아니라,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이다. "
1. 연줄인가? 연결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이엠에프때 사회자본-연결망이 넓은 사람들이 피해를 더욱 많이 봤다고 합니다. 제도상의 문제도 있지만, 빚보증때문에 열의 아홉이 그럴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는사람끼리는 정말 우물을 깊게 파는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서로 인정을 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도록, 더욱 강건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공식적인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얕은 결속으론 서로를 믿지 못해, 비공식적인 관계를 선호하고 더욱 더 진해지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엷어지고 넓어져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사회자본의 수준은 더 퇴행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터에서도 보면, 일터-학연-혈연의 관계만 있고, 사회라는 영역을 겹쳐두면서 일상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이 극히 부족한 듯 합니다.
2. 쿼터제 - 레디앙에 최근에 본 기사가 생각나네요. ㅁ당이 모둠별로 생각이 다르다. 정파를 등록하고 인정하고 소수를 배려하는 방법 논의를 활성화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다시 찾아봐야겠네요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802.) 라는 취지로 읽으면서(제대로 읽지는 못했군요.할당제이야기였으면 더욱 좋을 것 같은데 암튼), 평소 뭐때문에 그렇게 골치 아프게 생각하느냐? 다수결로 모든 것이 되지 않으니, 소수파의 의견을 존중하고, 정책을 반드시 할당하여 실행한다는 선택지를 두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한적이 생각납니다. 숙의하는 방법, 민주주의에 대한 것도 여러가지이지만, 우리의 수준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소수의 의견이나 차이(특히, 차이가 있는 정책을)를 할당하는 방법으로 공식화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3. 그런면에서 님의 글을 보다(미안하군요. <관용에 대하여>
란 책을 다 보고 이 페이퍼를 써야하는 것이 맞는데, 좀 불손합니다.요, 지난 오웰의 겨우존재한 삶에 대한 기록은 정말 잘 보았습니다. ) 일상에서 우리의 관계맺기가 악순환에 빨려든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바빠지고, 점점 믿지 못하고, 달리 생각하거나... ...그런면에서 지역 인문학자가 강조한 얇고 넓게 서로 믿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시도가 있어야 하지 않나합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 자주 보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는 영역들. 당분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할당제'의 방식...그런면에서 다수결의 맹점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우리 일상이 아닐까 합니다. 괜히 이야기가 주절주절 길어지네요. 맺을께요. 잘 읽고 느꼈습니다. 책 다 읽고 한번 더 코멘트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