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임과 만남 사이. 엽서를 품고 가서 전달하거나 식사만남에서 기다리는 사이. 그 사이를 짬을 채우는 용도로 쓰다가 오늘 환해지는 아침에서야 펼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겨울이지 겨울을 펼쳐볼까. 펼쳐야겠지. 눈이라니.

 

 

 

 

 

 

 

 

눈내린 아침

홀로 마른 연어포를

겨우 씹었다

 

 

 

노 젓는 소리

파도를 가르고 창자 얼어붙는

밤이여 눈물

 

 두어 작품을 읽고 그만 마음은 차가워진다. 간사한 마음은 바로 봄으로 향한다.

 

꽃에 들뜬 세상

술은 허옇고

밥은 꺼멓다

 

 

까망 보리밥. 간난은 이렇게 마른 버짐처럼 붙어있다. 가난에 시가 읽히고 시가 씌여질까.

 

그리하지 못할 것 같다.  삶의 벼랑처럼 느껴져 아무 것도 해내지 못할 것이다.

 

 

 2. 탈성장에 관한 좀 간략한 책들이 없을까 싶어서 몇 권 골라 읽고 있다.

 

일을 하면 돈을 준다.  가까운 일가친척이나 지인을 돌보면 돈을 써야 한다.  돌보지 않고서는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일을 하는 시간이나 돌보는 시간이 조사에 따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성장이나 GDP에 잡히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절반이나 되는 셈이다.  돌보는 시간을 지디피나 성장으로 잡기 위해 난리다. 잠재 시장이라고 말이다. 가사노동이나 약자들을 보살피는데 뭐 제대로 한 일도 없으면서, 새로운 시장이라고 못볼 것을 본 것 마냥 법석을 떤다.   숨을 쉬고 있는 한 먹고 자고 싸고 입고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 살 돈이 없으므로 돈을 줘야한다고 한다. 기본이라는 둥, 안심이라는 둥. 빚을 내고 빚으로 집을 사고, 기를 쓰고 번 돈으로 또 빚을 갚고, 이렇게 반복된 일상의 숲은 미로처럼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마치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주장한다.

 

선언을 만들고 테제를 만드는 이들.  상식의 댐은 무너졌을까? 무너지고 있을까? 무너져야만 하는가? 선언하는 방법이나 테제를 만들고 전달하려는 방식은 문제가 없는가? 앎의 폭탄을 던져 미수에 그친 숱한 족적들.  왜 폭탄은 터지지 않았으며 터진 폭탄에도 그곳만 도려내어져 삶들은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고 있은 것일까? 나는 못살고 있으며 더 떼돈을 벌어야 하고, 남들 더 잘사는 꼴은 보지 못하겠고...그렇게 또 일상의 늪으로 함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금 덜 벌고, 조금 덜 일하고, 조금 더 가까운 이들과 함께 살자는데, 그렇게 살자고 하는데 왜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혼자 독식하지 말고 같이 나눠먹자는데 왜 당신 상념은 성장중독에 걸려 다 같이 죽을 듯이 눈을 부라리는 것일까? 그런 당신을 위해 디그로쓰, 니디졌쓰로 이름을 바꿔야만 하는가?

 

중산층의 삶의 방식자체가 문제라는 것. 삶들이 뒤흔들리지 않는 것이 더 문제는 아닐까? 포스트코로나는 정작 바뀌지 않는 그룹들에게는 또 남의 얘길 뿐은 아닌가? 가난한 이들만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이 세상이 또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난하다는 자체가 높기까지 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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