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통사회는 좋아요의 사회다. 진통사회는 좋음의 광기에 빠진다. 모든 것이 만족감을 줄 때까지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좋아요는 우리 시대의 징표이자 진통제다. 좋아요는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어떤 것도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예술만이 아니라 삶 자체가인스타그램에 적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을 줄 수 있는 모서리나 귀퉁이, 갈등이나 모순이 없어야 한다. 고통이 정화한다는 사실은 잊혀진다. 고통은 카타르시스적인 작용을 한다. 만족의 문화에는 카타르시스의 가능성이 빠져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 문화의 표면 아래쪽에 쌓이는 긍정성의 찌꺼기에 에워싸여 질식한다. 13

2.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우리를 영혼의 내면관찰로 이끎으로써 현존하는 지배연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잠재운다. 모두가 사회적 상황을 비판적으로 파고드는 대신 그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신의 심리에 대해서만관심을 갖도록 이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할 고통이 사적이고 심리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개선되어야 할 것은사회의 상태가 아니라 영혼의 상태다. 영혼을 최적화하라는 요구는 실제로는 지배 관계에 적응하라는 요구이며, 사회적 폐해를 은폐한다. 이런 식으로 긍정심리학은혁명의 종언을 확정 짓는다. 혁명가들이 아니라 동기부여트레이너들이 무대에 올라 어떤 불만도, 나아가 어떤 분노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22

3.

행복장치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사회의 탈정치화와 탈연대화를 초래한다. 각자가 스스로 행복을 추구해야한다. 행복은 사적인 문제가 된다.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래서 혁명 대신 우울이 있다. 자신의 영혼을 치료하려고 이리저리 애쓰는 사이에 우리는사회적 불화를 낳는 사회적 연관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괴롭힐 때, 우리는 그 책임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함께 느끼는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효소다. 신자유주의적 행복장치는 이런 고통의 싹을 질식시킨다. 진통사회는 고통을 의학적 문제로,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 탈정치화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사회적 차원을 억압하고 은폐한다. 피로사회의 병적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만성적인 고통은어떤 항의도 낳지 않는다. 24

4.

면역학적으로 조직된 사회는 냉전 시대처럼 울타리와 장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공간은 서로 분리된 구획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면역학적 방벽들은 상품과 자본의 유통속도를 늦춘다. 냉전 종식 후 대규모로 진행되는 탈면역과정인 세계화는 상품과 자본의 흐름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런 방벽들을 철저히 제거한다. 효과적으로 면역 작용을 하는 적의 부정성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 체제에 적합하지 않다. 이 체제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전쟁한다. 타자 착취 대신 자기 착취가 일어난다. 32

5.

고통은 처음에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이다. 하지만 이 둑은 “이야기의 물살이 충분히 강해서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행복한 망각의 바다로 휩쓸어간다면” “무너진다.” 아픈 아이를 쓰다듬는 엄마의 손은 이야기가 흘러갈 강바닥을 만들어준다. 그러나 고통은 이야기의 흐름을 가로막는 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 자체가 이야기의 강물을 불어나게 하여 이 강물이 고통을 휩쓸어가게 만든다. 고통이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만 고통은 실제로 “배를 타고 운행할 수 있는 강, 인간을 바다로 이끌어주는 마르지 않는 물을 지닌 강” 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탈서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야기 Erzählung가 아니라 계산Zählung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서사는 몸의 우연성을 극복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모든 병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벤야민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39

6.

고통공포는 심지어 고통을 유발할 수도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수많은 고통을 막아내야 하는 훈육된 몸은 둔감하다. 이 몸은 완전히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 몸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이 몸은 외부를 지향한다. 반면 우리의 관심은 훨씬 더 우리 자신의 몸에 쏠려 있다. 테스트 씨처럼 우리도 강박적으로 몸속에 귀를 기울인다. 이 나르시시즘적이고 건강염려증적인 내면관찰이 우리의 과민성의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41

7.

고통의 근저에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놓여 있다. 예컨대 억압은 부정성의 폭력이다. 타자가 억압을 행사한다. 그러나 타자만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성과, 과도한 소통, 과도한 자극으로 나타나는 긍정성의 과잉도 폭력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하負荷로 인한 고통을 낳는다. 오늘날 주로 심리적 긴장이 고통을 낳고 있는데, 이런 긴장은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의 특징이다. 이런 긴장은 자기공격적인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성과주체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 성과주체는 쓰러질 때까지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한다. 노예는 주인이 되기 위해, 나아가 자유를 얻기 위해 주인의 손에서 채찍을 아 자신을 때린다. 성과주체는 자신과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에서 발생하는 내적 압박Pression은 성과주체를 우울
Depression 로 몰아넣는다. 또한 만성적인 고통을 낳는다. 46,47

8.

고통은 인간 현존재의 중력을 형성한다. “기쁨이 커질수록 그 안에 숨어 있는 슬픔도 더 순수해진다. 슬픔이 깊을수록,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기쁨도 더 간절히 부른다. 슬픔과 기쁨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유희한다. 닦이 가까워지게, 그리고 가까움이 멀어지게 함으로써 기쁨과 슬픔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율하는 유희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기쁨과 가장 깊은 슬픔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은 유한자의 정조Gemüt를 조정하여anmuten 유한자가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중력을 얻도록 한다. 모든 동요에도 불구하고 유한자가 자신의 본질 안에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이 중력 덕분이다. 고통에 조응하는 ‘정조 muot‘, 고통에 의해, 고통을 향해 조율된 마음이 우울이다.” 72

9.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오늘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의일시적인 중단만을 의미한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는 오직 소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총계 이상의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는 아우라를, 나아가 향기를 잃는다. 이 세계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은 타자의 다름, 즉 타자성 Alteritat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타자성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다. “근원적 거리˝81없다면 타자는 너가 아니다. 타자는 그것으로 사물화된다. 타자는 그 다름 속에서 호출되는 대신 소유된다. 75

10.

티자에 대한 무방비성을 ˝영혼의 나체성Seederracktheit˝라고 부른다. 타자가 내게 안겨주는 불안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이 불안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가린한 인간관계에 대해, 자기 마음속의 삶에 대해, 그리고 노년에 갈수록 더 다급하고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데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대신,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줄곧 신경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갈수록 ‘냉철한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워지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전혀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숨쉬기, 느끼기, 통찰하기가 아닌 모든 것을 경멸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영혼의 나체성은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 타인으로 인한 두려움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83


11.

이 책의 마지막 장은 “마지막 인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장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으로 체현되는 진통사회를 낳는다. 이 사회는 지속적인 마취화를 실행한다. 때때로 약간의 독을 주입. 이렇게 하면 기분 좋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분 좋은 죽음을 위해 다량의 독을 주입 […] 낮에도 작은 쾌락을 누리고, 밤에도 작은 쾌락을 누린다. 그러나 건강을 섬긴다. 마지막 인간은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깜빡거린다.”
85

마지막 인간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보다 안락함을 더 높은 가치로 간주한다.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념을 궤멸시키는 디지털 심리정치는 마지막 인간의 평안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인간의 건강 히스테리는 그가 자신을 영구적으로 감시하도록 한다. 그는 자기 안에 내면의 독재를, 내면의 통제정권을 구축한다. 내면의 독재가 생명정치적 감시와 일치할 때, 시 감시는  더 이상 억압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감시가 건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0,91

볕뉘.

상을 타야 유명해지는지도 모르겠다.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이 상을 갈망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상소감으로 신음처럼 가려진 영혼들을 드러내는 것 역시 맞는 일인지도 감을 잡지 못하겠다. 확율이 낮더라도 심리적인 응어리를 풀어준다면, 어쩌면 상들은 가려지거나 비명이 난무하는 분야에는 우후죽순처럼 생겨야 하는 것인지도 헷갈린다.

짤려도 퇴직해도, 그만두어도 배우고 배우고 배우고, 어찌나 배울 것들은 많은 지, 하루하루가 빠듯하다조차 못해 잠이 늘 마중나와 스스로를 맞는다. 즙이 되도록 스스로를 갈아넣을 것이 없을 무렵, 건강과 기울기가 삐끗할 때 우울은 서슴없이 기어온다.

어쩌면 저자의 성실성과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저평가 되어있음을 느낀다. 뼈아픈 이야기임에도 기획하지 않고 다루지 않는다. 진정성과 성실함, 성과를 질투로 느껴서일까. 유독 지식인사회에서 더 인색한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무엇을 얼마나 더해야 절규가 진실로 받아지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쓰일 수 있을까.

그런 냉소들이 발화자에게조차 허허로움으로 되몰아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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