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도 꿈, 선잠처럼 생각은 고리를 물고 일어난다.

운동(활동)은 환경에서 말하는 지속가능성을 갖고 사고하는가? 30년 이제 만들어지고 있는 유아기는 아닐까? 머리와 몸의 소통,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몸탓을 하는? 누구나 <먹물>이라고 사전 소통을 차단하는 유아적 발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문화의 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행동하고 느끼는 것. 몸의 목을 당겨 우물로 가라고 끌어대는 것은 아닐까? 먹물은 다 글러먹었다고 폄하하지는 않았을까? 함께보고 함께 갈 수 있는 문화는 있는가? 유아기에 둘러보거나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지구적 시각을 갖게 된 것은 당대인이 갖는 행운이 아닐런지? 헛갈리지 않는 행운을 얻었으면서도 함께- 시간이란 축을 길게 늘려서 라이프사이클 운동(활동)을 기획할 수는 없는 것인지? 이념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물려주는 것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조금 더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미숙함은 만든다는 관점이 생겨나지 않는다.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혼자 땅속깊이 지식의 구덩이를 파고 있어, 나눈다는 함께한다는 기대는 버릇만 있어도, 몸의 역할로 소통할 수 있음에도 지식인들은 자기 땅만 파고 아닌가보다, 절망감만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자리 하고 싶으면 정말 치열하고 깊숙히 하여 제대로 바꿀 것이며, 문화-예술-철학의 관점을 보태고 즐기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혼자가 아닌 우중의 삶의 자락과 고민을 안을 수 있는 대안적 삶을 누려보고 싶은 것이 정말 다른 일일까?

용기있고 똑똑한 자들은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 그 속도를 늦추거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살아남은자들의 공동기획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머리만 말고 몸..서로 섞여 누가누구인지 구별되지 않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는, 다양한 반찬을 맛보는 일이 그렇게 귀찮은 일일까?

밥벌이에 귀천이 없어야 하고, 밥벌이하는 것은 신성한 책무이며, 삶이다. 나머지에 대해 나머지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밥을 지키는자, 번 것을 나누는 자의 노력은 문화를 풍부하게 한다. 자양분...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지,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 정말 렛츠처럼 10분의 1이 버거운 일일까? 관점의 해체, 분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충분히 잘 살고 있고, 많이 가지고 있다. 지고 있는 장롱은 너무너무 가벼워 다 버릴 수 있는 것임을...가난하지만 부유한 관점의 전환과 네트워크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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