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정치학

1.

[ ] 가해자에게 질문하는 반성폭력 운동을 제안한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물어야 한다. 왜 여성을 때렸습니까? 아내를 ‘교육시킨다‘면서, 교육만 시키지 왜 죽였습니까? 안 때린다고 공증까지 했으면서 왜 또 때렸습니까? 술을 마셔서 때린게 아니라 때리기 위해 술을 마신 거 아닌가요? 술을 마시고도 아내를 때리지 않는 남성이 훨씬 많습니다! 왜 비서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왜 안마를 요구했습니까? 왜 수시로 초과 노동을 시켰습니까? 왜 평소에는 여성 인권 운운했으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까? 왜 자신의 성폭력 재판에 부인이 나왔죠? 본인이 생각하는 성폭력, 성관계, 사랑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피해자와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불륜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97

[ ] 우리가 젠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결정적인 인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젠더는 ‘여자 문제‘나 ‘여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며 권력 관계다. 젠더를 이해할 때, 미투 운동의 위상도 가늠할 수 있다. 젠더 체제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의미를 고려할 때, 미투 운동은 너무나 갈 길이 먼 첫 걸음이자 동시에 엄청난 사건이다. 미투 운동은 젠더 폭력에 분명한 경고와 타격을 가했다. 게다가 미투 운동은 확실히 대중화되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거치더라도, 여성들의 의식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다. 명분, 법 제도, 현실의 요구에서 미투 운동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사회 운동이다. 미투 운동은 더 광범위해지고, 더 섬세해지고, 더 강력한 문화 운동으로 발전할 것이다. 인류 문명 초기부터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 살해, 피점령 지역의 남성은 살해하고 여성은 강간하는 성별화된 제노사이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준비해야 한다. 남성들이 이처럼 작은 변화에도 모든 것을 빼앗긴 것처럼 분노하면 곤란하다. 사실, 남성들도 알고 있다. 미투가 계속되리라는 것을. 침묵은 깨졌다. 106/ 이 두려움과 분노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남성 개인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남성도 가부장제 구조의 희생자˝라는 식의 언설은 남성을 자기 변화가 불가능한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안전과 성숙을 위해 한국의 남성 문화, 한국 남성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일까. 한국 남성에게 국가 안보나 생게 부양의 책임을 요구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사실 역사상 한국 남성은 ‘보호자 남성‘이라는 성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으며,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남녀와 상관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인간들이 ‘나대는 ‘ 사회가 가장 위험하다. 그러니 이제 남성들도 ‘거울‘ 앞에 섰으면 한다. 자신을 보라. 자신을 알고, 남에게 폭력과 피해를 주지 말라. ....그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 역할‘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남성 사회의 변화, 이것이 진정한 미투 혁명이다. 107

2.

[ ] 춘향전리뷰; 어떤 한 인간이 그 사회에서 성적 주체로 존중받는 것은 단지 섹스를 할지 안 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성폭력은 강제로 섹스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는 순결과 정조를 지키려고 한 여인의 감동적인 고난 극복기로 읽지 말아 달라고. 열녀가 되길 원한 적이 없다고. 오히려 아무도 자신처럼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까지 내몰리길 원하지 않는다고. 바라는 것은 여성의 ‘성‘을 지켜주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지켜주는 사회라고 말이다. 145

3.

[ ] 여성 범주 내에서도 다양한 권력이 작동하고 착취와 억압이 작동한다. 이것은 은폐할 것이 아니라 성찰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문제다. 젠더 연구는 젠더, 계급, 인종 등이 교차하는 횡단의 정치로 접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젠더 자체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상호 교차성 연구가 되어야 한다. 젠더를 질문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다. ‘젠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성과 남성은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후자의 질문은 이미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원 젠더를 당연한 자연 질서로 전제한 것이다. 이 전제는 앞서 두 건의 폭력 사건을 통해 확인했듯, 혐오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젠더 혹은 섹스와 젠더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아야 한다. 질문해야 할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기존의 억압 제도를 반복하게 될 뿐이다. 따라서 섹스와 젠더의 필연성 자체를 질문하는 것으로 젠더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적법하고 적절한 젠더로 배치되는가?˝ ˝폭력은 개인의 몸에 젠더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는가?˝172

[ ] 다중억압으로 폭력을 설명하는 방식은 미흡하며, 삶 자체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은 젠더를 다중 억압이 아니라 상호 교차로 설명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젠더 범주 그 자체만으로도 복잡한 의미가 생성될 뿐만 아니라 젠더 범주 그 자체만으로도 복잡한 의미가 생성된다. 젠더 논의로서 트랜스젠더퀴어 이슈를 논함은 젠더 자체를 상호 교차 개념으로 독해한다는 뜻이다. 삶을, 젠더를 상호 교차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폭력을 개념화하는 작업은 중요하다...폭력은 인간 주체성을 형성하고 이 사회의 적절하고 적법한 존재로 포착하는 방법이다.... 193, 194

볕뉘.

제조물 책임법이 떠오르기도 한다. 제품 하자로 소비자가 신체나 재산에 손해입은 것을 입증하여야 했으나, 제조물의 결함으로 피해 받은 사실만 입증하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삶을 짓누르는 숱한 짐들은 보이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됐다고 하거나 한숨 쉬었다고 하는 순간. 어김없이 일들은 벌어진다. 당연한 것은 이 세상, 저 세상에도 없을 것이다. 멈추거나 머무르는 순간이 짓누르는 것이 삶들일 것이다. 아무도 남의 삶을 방해하려 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더 명민해지고 더 바꾸어나가는 수밖에 없는....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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