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 ]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27

[ ]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도 씬도 배우도 아니고 오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과 상영되는 영화 사이에 이는 그 순간이라는 시간이라는 좀 과격한 논리를 폈고 그걸 ‘불타는 시간‘이라고 불렀다. 64

[ ] 상수는 마침내 괄호 안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라고 문장을 완성했다. 123

[ ] 시작도 진행도 종료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조교와 상수 사이에 있던 위계가 일종의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생산해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 상수의 분석은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이로웠는데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150

[ ]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158

[ ] 베이지색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자 상수는 눈물이 어렸는데 사랑이 있다는 느낌이 가져오는 의외의 헛헛함 때문이었다. 사랑이 있다고 하면 대개 차오른다거나 벅찬다거나 하는데 지금 상수는 무언가가 급하게 빠져나가 완연히 달라진 바깥의 온도와 내면의 온도를 느꼈다. 260
[ ] 경애는 사실 호찌민이라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160개도 넘게 있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263

[ ] 상수는 실체라는 것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이란 이렇게 어떤 형상에 숨을 불어넣어 그의 일부를 갖는 것일까. 그래서 상수는 그동안 그런 일들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동안 상수가 경애에게서 가져와 하나씩 완성한, 상수의 마음속에서 걷고 말하고 먹고 마시는 경애라는 형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297

[ ] 이별이 분노나 실망감, 적의 같은 단일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품고 살아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전혀 반대의 감정이 몸을 부풀려 마음을 채우기에 아픈 것이었다. 아픈 것을 대체할 다른 말이 없었다. 316

[ ]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49

볕뉘.

사랑한다는 무언가 잡히는 일이 아니므로 손바닥을 가지런히 놓아 보듬는 것이라. ‘경애하는 마음‘으로도 읽히고 ‘경애의 마음‘으로도 비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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