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자의 우주

1.

[ ] 진리는 ‘절대적‘ 실재 안에서 발견되고 실재를 반사하는 종류의 진리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개인들이 특정한 실제적 결과를 추구하면서 행동할 때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획득한 산물이다. 다시 말해 성공적일 경우 개인들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생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29 제임스가 파악하는 실재는 인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변 환경 안에서 시간을 따라 ‘성장‘한다. 30 진리의 ‘현금가치‘ 30 프래그머티스트의 진리가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축소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들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들은 계기적 흐름 속에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체론자인 제임스는 이 순간, 이 상황에서의 만족이나 실용성을 한 개념이 지닌 모든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31

[ ] 첫째. 변화무쌍한 감각 경험들의 흐름이다. 이 재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진리-생성으로 귀결된다. 둘째 부분은 감각들 간의, 그리고 그것들의 심적 표상들 간에 형성되는 관계들이다. 영원한 불변적 관계들...이 관계들은 고정된 것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강조점을 달리하거나 상이한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마치 작곡가들이 조옮김을 하거나 전조 또는 이조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 부분은 과거의 진리들로서, 우리가 당면한 새로운 탐구가 설명하거나 보충해야 할 주제 항목들이다.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것은 이 세 종류의 가닥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산출되는 결과물들이다. 31

[ ] 경험된 삶의 실재적 단위들은 지성주의적 논리학이 계산하는 단위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단위들을 발견하려 한다면, 넓게 시간적 격차를 두고 관측해야 한다. ....그 격차 자체는 지성주의적 허구일 뿐으로, 그 중간 시간이 채워지는 경험의 연속적 낱장으로부터 추상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그것은 처음에는 윌리엄과 헨리에 의해, 그 다음에 윌리엄, 헨리, 그리고 존에 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헨리와 존, 그리고 그 다음에는 존과 피터, 그런 식으로 따로 운반된 통나무와도 같다. 그러나 경험의 모든 실재적 단위들은 중첩된다. 39

[ ] 개인적 역사는 시간적 변화의 과정이고, 변화 자체는 직접 경험되는 사물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연속적 전이는 일종의 연접 관계이다. 그리고 급진적 경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충성스럽게 견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계를 견고히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액면가로 취급하는 것을 뜻한다. 43 몸의 활동성을 개시함을 통해서만 사고와 느낌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의 활동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수 있다. 몸은 폭풍의 눈, 조직들의 기원, 모든 경험 행렬에서 항상 강세가 주어지는 지점이다. 모든 것은 몸을 중심으로 돌고, 그것의 관점에서 체험된다. 44


2. 베르그송과 지성주의에 대한 비판:



[ ] 단순명료한 스타일: 단순 명료성이란 보플이나 주름없이 사고를 뒤따르는 언어 구사력의 유연성이라는 것을 그 논평자는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맨 처음에 독자들은 사물들을 묘사하는 베르그송의 방식이 보여주는 명료성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되어 있다...그것은 기적이고, 그는 진짜 마술사이다. 223

[ ] 제논의 역설, 칸트의 이율배반....우리가 즉각적으로 얻게 되는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은 지작의 비연속적인 맥에 따라 변하고, 일정한 양의 증가나 감소 자체를 감지할 수 있으므로, 각각에 대해 우리는 특정한 정도의 증가나 감소를 실제로 느껴가면서, ‘좀 더 많이, 많이, 많이‘ 또는 ‘좀 더 적게, 적게, 적게˝라고 말한다. 225 감각 경험은 한 방울씩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간 자체도 한 방울씩 다가온다. 226 물론 신체는 운동을 통해 그 지점에 도달한다. 하지만 숫자상으로 얼마나 증배되든지, 사고된 지점들은 운동의 요소를 전혀 포함하지 않고, 따라서 논의에서 오직 위치만을 고려하는 제논은 우리의 지성이 운동을 비-실재로서 부정해버린다는 것 외에 달리 어떤말도 할 수 없다. 228 불연속적인 것으로부터 연속적인 존재를 만들 수 없고, 당신이 가진 개념들은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229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간격들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끈질기게 주장하지만, 수학자는 간격들의 끄트머리만을 본다. 그는 다만 몇 가ㅣ 결가를 고정시킨 다음, 곡선에 점을 찍고 보간하고, 투사지 그림으로 실재를 치환할 뿐이다. 230우리의 지성이 감각 자료에 요구하는 무한성은 구조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무한성이라고보다는 미래의 잠재적 무한서이다 232

[ ] 칸트는 그 해결책을 우리의 경험 외부와 경험 이전에, 즉 우리의 경험의 원이 되는 물자체에서 찾았던 반면, 그의 일원론적 계승자들은 모두 경험의 절대적 완성으로서 경험이후에, 또는 그것이 아니라면 이념적 유의미성으로 경험 안에 바로 지금도 암묵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233 논리학은 일차적으로 개념들 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자연적인 사실들 간의 관게에 대해서는 이차적으로만, 혹은 사실들이 이미 개념에 의해 동일시되고 그것에 의해 정의되는 한에서 관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관계들은 개념적 방법에 적합하거나 부적합하거나 할 수밖에 없다....개념들에 의해 삶을 이해하는 것은 삶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마치 가위로 자르듯 그것을 조각내고, 그 조각들을 우리의 논리적 식물 표본집 안에 고정시켜놓는 것과도 같은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조각들을 건조된 표본처럼 서로 비교하면서, 그들 중 어느 것이 정태적으로 포함되고 어느 것이 제외되는지를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취급 방법은 회고적이고 사후검시 같은 거시 된다. 236 실제로 우리가 하는 일은 실재를 더 잘 운용하기 위해 우리의 개념 체계로 실재에 마구를 씌우는 것이다239 도덕적 사실들을 개념적으로 다루려면, .우리는 우선 그 개념을 변형시켜 뇌도해나 물리적 은유로 대체하고, 관념을 원자로, 관심을 기계적 힘으로, 우리의 의식적인 ‘자아‘를 ‘흐름‘으로, 하는 식으로 다루어야 한다. 239

[ 2 ] 개념적 대상이라고 하는 것들 간의 관계는 차이 또는 동일성, 일치 또는 모순, 포함 또는 배제 같은 , 오로지 비교할 뿐인 정태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개념의 영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있는 관계들은 ‘영원한‘ 것들 뿐이다. 242 개념화를 떠나 지각소와 결합함으로써 고차적 감각들은 ..우리의 눈과 귀 또한 독자적인 영광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준다. 즉 그 덕택에 음악과 장식 미술이 탄생하고, 삶의 가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개념적인 세게는 가치와 동기의 새로운 영역을 우리의 삶에 선사한다....새로운 관심들과 면려, 그리고 힘과 숭고, 그리고 찬탄의 감정들이 샘솟는 것이다. 243 활동과 변화의 삶 전체의 내면으로 개념적 탐구가 침투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직접적인 감성의 손으로 공감적인 감지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열어준다. 244 당신이 실재를 알고자 한다면, 실재의 흐름 자체, 즉 오직 불변적인 것만이 탁월하다는 기이한 신념때문에 플라톤주의가 늘 경시해온 그 흐름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245

[ 1 ] 개념화할 때 우리는 자르고 고정하며, 우리가 고정한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개념이란 그것-그리고-그 외의 다른 것은 없음을 의미한다. 개념적으로, 시간은 공간을 배제하고, 운동과 정지는 서로를 배제하며, 점근은 접촉을, 현전은 부재를, 통일은 다자성을, 독립은 연결을, ‘나의 것‘은 ‘너의 것‘을, 이 연결은 저 연결을 - 이런 식으로 무한정하게 계속된다. 그 반면에 삶의 진짜 구체적인 감각 흐름에서 경험들은 서로에 침투하므로 어느 것이 배제되고 어느 것이 배제되지 않았는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현재라고 이름 붙인 경계에 의해 개념적으로 분리되고, 그 경게의 반대편들을 점유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아무리 짧은 순간이라 해도, 경험 전체를 통틀어 그 둘은 어느 정도 서로 공존한다. 246, 247 경험의 모든 조각은 고유한 특질, 지속, 연장, 강도, 긴급성, 명료성,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많은 국면들을 갖고 있어서, 그 조각들 중 어느 것도 언어화된 우리의 논리학이 견지하는 고립상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오직 뒤섞인 채로만 존재한다. 실재는 항상 동일성과 차이의 삼투 또는 회류 상태에 있다.248 삶에서 개별 사물들은 매 순간 서로 소통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소통한다. 250

[ 3 ] 생동하는 공감에 의해 한 인물의 팽창하는 중심부, 또는 베르그송이 한 인간의 엘랑 비탈이라고 부르는 것에 다가서보라....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철학적 비전의 중심부에 당신 자신을 위치시켜보라..그러면 당신은 그 비전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쓰거나 말하게 만들었던 상이한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할 수 있다..당신은 마치 건물 위를 기어다닌 근시안적인 개미처럼, 사물의 표면을 기면서 미시적인 균열이나 틈새 속을 헤집고 들어가, 오직 비일관성만을 발견할 뿐, 중심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다...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253 어느 경우이든지 한 번 이런 생명의 움직임에 적응하면, 당신은 사물이 생겨나고 자라가는 것을 가리켜 베르그송이 드브니르 레알:실재적 생성이라고 부른 것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철학은 실재의 운동을 이런 식으로 생동적으로 이해하도록 진력해야 한다. 254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254


볕뉘. 급진적 경험주의(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에 이어 경험의 흐름, 경험의 방울에 대한 부분을 응시해본다. 그 근저는 베르그송으로 이어져 있다. 짧은 단락이지만 앞 뒤장 의식의 복합성이나 경험의 연속성....그리고 부록의 일부는 급진적 경험주의에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올해 작고하신 최인훈의 [바다의 편지]도 함께 보고 있는데 감정이 흐르는 하상이라는 대목이 그의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모두가 언어는 그 위로 감정이 흘러가는 하상이라고 시작하며 그 바닥(하상)의 곡절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감정이 흐르는 강물을 보려고 하거나 그 위에 스스로를 띄워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일수도 있겠다싶다. 위의 글가운데 2번 대목(2.1, 2.2, 2.3)이 베르그송을 반복하면서 간결하게 소개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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