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비고츠키 - 사람은 스스로만 가르칠 수 있다.

[ ] ‘외적인 것‘은 언어적 사고의 내부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붕괴시키는 지하 진동처럼 개인의 내적 사고를 흔든다. 혹은 나팔꽃을 지탱하는 봉처럼 어디까지나 세포와 바깥에서 ‘접촉‘하면서 세포의 내적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18

[ ] 순간순간을 사는 아이 - 완성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으로서 인간을 보자는 발상이 깔려 있다. 21

[ ] 역사- 역사는 그가 상정한 다양한 수준의 발생이 층층 켜켜 돌돌 말려 조우하는 바로 현 지점을 의미한다...늘 ‘단절‘과 ‘비약‘을 포함하는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운동을 포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33 발달의 발달은 복수의 역사가 조우하는 양상을 의미한다...계통 발생은 ‘생물학적 발달‘ 혹은 ‘자연적 발달‘과 ‘역사적 발달‘ 혹은 ‘문화적 발달‘로 구분된다. 37 아동의 문명으로의 재생은 보통 그의 유기체의 성숙 과정과 하나의 ‘합금‘을 이루고 있다. 발달의 양면 - 자연적 발달과 문화적 발달 - 은 서로 일치하고 융합한다. 두 가지 변화는 서로 침투해서 본질적으로 아이의 인격의 사회-생물학적 형성이라는 통일적 전체를 형성한다. 39 나 자신이 ‘합금‘의 산물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그다음 단계는 이 ‘나의 신체와 사고‘가 얼마나 제도적으로 강제당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될 것이다. 41 비고츠키가 인간 탐구를 위해 가져온 ‘역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합금‘이라는 메타포는 풍경, 도시, 사회, 국가, 대륙 그리고 지구를 포함하였다고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43

[ ] 비고츠키의 도구를 포함하는 마음(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도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비고츠키의 마음관이다)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외부 혹은 표면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피부를 경계로 닫힌 공간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실재의 도구에 의한 자기 자신의 제어라는 행위의 성질을 빗댄 것이다. 도구는 자연으로 향한 ‘외적 활동의 수단‘이다. 이에 비해 심리적 도구, 즉 ‘기호‘는 ‘인간 자신의 제어를 위한 필수적 수단이다. 51 도구적 행위는 인간 행동의 전 구조를 개조하고 재편성한다. 51 자신의 기억에 믿음이 안 가고 의존할 수 없을 때 만드는 손수건의 매듭, 책을 보다가 어디까지 보았는지를 표시하기 위해 특정한 페이지를 접어놓는 것. 이것들은 다 기억의 도구다. 53 인간 심리의 특징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과 스스로 만들어 낸 자극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심리적 상황에 스스로 가져온 자극, 즉 만들어 낸 자극, 인위적 수단 자극을 비고츠키는 ‘기호‘라고 불렀다. 54 휴대전화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찍은 일상의 단편을 보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행위 가능성과 욕구 디자인에 공헌한다고 할 수 있고, 우리의 욕구와 행위 가능성은 도구나 인공물과 함께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가 우리의 머릿속뿐만 아니라 기술=인공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56 도구에 매개된 마음 57

[ ] ‘물‘을 심리학의 분석 단위로 삼아야 한다는 비고츠키의 주장은 무엇보다 개인과 사회(또는 문화)를 깨끗하게 나누는 이항 대립적 이분법의 지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사회 활동의 산물인 언어, 휴대전화, 컴퓨터, 수학 공식, 자동차 등 문화적 도구가 인간의 정신 활동을 뒷받침하고 매개한다는 논의와 연결된다. 즉 사회 문화 역사적 지평에서 분리된 개인 혹은 개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이른바 개인과 사회의 이분법적인 분리에 대항한 ‘매개‘라는 개념을 통해, 비고츠키는 문화적 도구와 인간의 정신 활동이 분리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70 다양한 마음의 세포: 도구적 행위, 미적반응, 말의 의미 혹은 센스, 드라마, 경험(햄릿이란 작품, 경험)66 일반적으로 매개적인 잠재력을 분리해서 언어와 그 밖의 기호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는 학문 영역은 매개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행위로부터 빠져나온 (혹은 분리된)기호 시스템을 음미하는 경향이 만연하다. 72

[ ] 심리학의 위기: 설명적 혹은 생리학적 심리학과 기술적 심리학. 전자는 심리학을 다른 자연과학과 똑같은 유형의 과학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바람에 인간에게 고유한 고차적인 심리 기능을 분석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후자는 역으로 다름 아닌 그러한 정신생활의 고차 형태를 문제로 삼고 있긴 하지만, 관념론적이라서 과학적 설명을 수행하지 못한다. 81

[ ] 최근접 발달 영역 혹은 발달의 최근접 영역: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다. 85 첫번째는 피아제처럼 아이의 교육과정과 발달 과정을 서로 독립되는 것으로 보는 이론군. 두번째는 윌리엄 제임스처럼 발달과 교육은 동일하다고 보는 진영. 그는 발달을 단지 학습의 측적이라고 본다. 이 경우 교육과 발달의 구별조차 없다. 86 영역의 혼종성: ‘혼자서 해답할 수 있는 문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실제적인 발달 수준과 ‘아이가 혼자서가 아닌 공동 활동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에 도달하는 수준...여기서는 실제와 도달할 미래의 차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발달의 최근접 영역‘은 발달의 프로세스에 부합하는 ‘시간‘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실제적인 발달 수준은 ‘어제의 발달의 성과‘이고 영역은 ‘동적 상태‘에 있는 ‘아이의 내일‘이고 미래다. 89 영역은 가르치는 자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학습자만으로도 달성되지 않는다. 이 영역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이 영역은 ‘상호행위적 시스템, 거기에는 적어도 혼자서는 제대로 행위할 수 없을 것 같은‘ 시공을 표현하고 있다. 89 비고츠키가 영역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은 학습자와 교수자 사이의 원초적인 비대칭이다. 이 비대칭은 어디까지나 해소되는 일은 없다. 단지 형태를 바꾸어서 복잡하게 될 뿐이다. 94 배우는 자는 자신이 배우는 것의 의미를 적절하게 말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배우는 것의 의미를 적절하게 논할 수 있는 ‘언어‘를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그 영역 안에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비대칭성이 엄연히 존재한다. 96 욕구라는 것은 욕구를 채워 줄 제도가 출현한 수에 사후적으로 마치 쭉 이전부터 거기에 (예컨대 개인의 내면 같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가상한다. 97 욕구는 그것을 채워 줄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아이들에게 배움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길 바란다면 교사 자신이 배움에의 동기를 활성적인 상태로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98 이것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가 잘 모르는 것을 받았다는 것이 배움의 본의다.....교육의 과정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있었던 이상의 것, 추구하고 있었던 이외의 것을 받긴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기 위해 그 후에 긴 시간을 살고 다양한 경험을 쌓지 않으면 안 되었다와 같은 여정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교육이다. 100 다른 개인에게 직접 영향을 주거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스스로밖에 가르칠 수 없다. 즉 사람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생득적 반응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경험,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교사다. 101 교육적 프로세스에서 교사는 열차가 자유롭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레일과 같은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레일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 방향만을 기차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들의 사회적 환경을 조정함으로써 그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켜 나간다...통상은 온도와 습도를 조적할거나 그 주위에 있는 식물을 이동시키거나 흙에 영양분을 주는 것을 통해, 즉 환경을 적절하게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식물에게 영향을 주려고 한다. 102

[ ] 과학적 개념이 생활적 개념을 대체하거나 쫒아내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접촉하는 것이다. 아동의 진짜 개념의 발달을 위해서는 양 개념, 즉 생활적 개념과 과학적 개념의 부단한 접촉과 그것을 통한 양 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113 지식을 외우는 것에 그쳐버리는 것은 일종의 방관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자라는 뜻의 방관자다. 수의적, 자각적, 반성적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14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이미지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서, 한 번도 언어화되지 않은 명제가 이 세상에 존재할지도 모른다..외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은 모국어도 실은 모르는 것이다...자신을 외부에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를 자신 안에 들여 놓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117

[ ] 우리는 ‘어법의 우리‘ 안에 유폐되어 있다. 119 비고츠키는 ‘행위‘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인간(개인)과 환경(사회)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해 양자를 하나의 ‘단위‘로 보는 길을 열었다. 123 개성은 사회성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사회성의 고도의 형식이다. 125 시대 전체에 형성되어 있는 ‘대기압(사회성)‘이라는 우리를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대기압을 하나씩 소거해 나가는 작업을 통해 자기 나름의 유일무이한 심리학을 창출할 수 있었다. 126


볕뉘.

비고츠키를 읽고 있다. 그 곁에는 간혹 바흐친이 나온다. 여러 권을 중복되게 읽는다. 한 여름 읽어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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