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 ] 만약 몸이 로봇처럼 야무지고 단단해서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도 끄덕하지 않는다면 이웃들은 우리에 대해 염려하거나 걱정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수치감을 느꼈던 몸의 연약함이 우리를 보살핌과 배려를 받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끄떡하면 상처가 나고 병에 잘 걸리는 몸, 그것은 우리가 내부로 단단하게 닫힌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해서 열린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35

[ ] 로렌스와 사르트르에게 자유에 대한 갈망은 매우 역설적이다. 자유를 원하면 원할수록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더욱 예민하게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영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지 않은 육체의 존재를 더욱 고통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자기의 정체와는 무관한, 아니 자기의 완전성을 위협하는 타자로 만들어야 한다. 43

[ ] 혐오는 심미적 반응으로서의 싫음과 윤리적 반응으로서의 미움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혐오의 대상은 그냥 싫을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미울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하는 대상이 그냥 싫은 것인지 아니면 미운 것인지 스스로에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우면서도 동시에 싫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45

[ ] 취향과 감각에도 역사가 있다. 타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외국인이나 장애인과 같은 타자를 향한 혐오의 감정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와 무관한 듯 보이는 음식 취향도 그러하다. 51

[ ] 낙인을 찍는 순간에 ‘나는 개고기를 안 먹는다‘라는 개인적 취향이 ‘모든 사람은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명제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개념이 되는 것이자 개인적 취향를 보편적인 것으로 입법화하는 것이 된다. 55

[ ] 역사적 시선의 소유자는 본래 혐오스럽게 태어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혐오는 비역사적인 무지의 시선, 맹목적 직관의 시선이 전제된다. 이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을 보는 그 시선이다. 무지의 시선 말이다. 144

[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의 마츠코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작은딸을 사랑하기 위해서 큰딸을 미워했다.. 부모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그녀를 외면하고 병약한 동생만을 끔찍이 보살피고 끔찍이 사랑하였다. 혹시라도 마츠코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렇지 않아도 가엾은 동생이 섭섭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녀를 무시하였다. 여동생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츠코를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49

[ ] 여성 혐오를 가부장적 구조로 설명하는 것은 고르디어스의 칼날의 효과를 보여주지만, 이 구조적 설명이 갖는 치명적 단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즉 사회적 변동을 설명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배내옷이 파랑과 분홍색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연두색, 커피색, 블랙 화이트 등 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이 선을 보이고 있다. 161 유니섹스. 성희롱. 비혼.

[ ] 군 가산점 제도의 폐지는 남성적 특권의 폐지를 의미하는 상징적 사건이다. 여성 혐오에 가담한 많은 남자들은, 여성들이 그러한 특권을 빼앗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직도 자기네들에게 과거와 같은 남성적 책임과 의무를 요구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여성 혐오의 바닥에 깔린 정서는 남성적 우월감이 아니라 패배감이다....2028년 결혼 적령기 여성 100명당 남성의 수는 120-123명으로 증가한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165, 166

[ ] 자기가 여성에 비해서 유리하고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남자들의 인식을 빼놓고 여성 혐오를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지나체게 남자들에게 유리했던 사회적.제도적 조건은 더욱 더 바뀌어야 한다. 그러한 정당성에도 어찌되었든 많은 남자들이 과거에 점유했던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박탈감을 안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67 혐오는 약자의 감정이 아니라 강자의 감정이다. 그것은 열등감과 패배감의 표출이 아니라 우월감과 자만심의 표출이다. 약자는 불의하지만 힘이 센 권력자에 대해서 혐오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가진다. 167

[ ] 루저: 여성 혐오는 특정한 여성 개인에 대한 주관적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가 집단적으로 반영된 현상이다. ˝이들의 위치가 몇 년 전부터 중요한 문화 코드로 등장한 ‘루저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 있다.˝ 한 남자 개인이 아니라 남자 전체가, 한 여자 개인이 아닌 여성 전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서적 태도인 것이다. 이 점에서 어떤 특정 여성 혐오자가 과연 루저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 무기력해지고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다. 이러한 사회적 공감대가 자신을 밀어주지 않는다면 감히 여성 혐오 발언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설혹 가능하더라도 여성 혐오라는 사회적 정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70

[ ] 키에 대한 루저 발언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혐오가 아니라 분노라고 말해야 옳다. 여러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면 나는 여성 혐오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혐오가 아니라 분노나 증오라고 말해야 옳다. 나는 미소지니도 우리말로 여성 혐오가 아니라 여성 비하로 옮기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 비하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것이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적 구조가 개인의 의식으로 내면화되어 나타난 언행이 여성 비하의 본질이다. 171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과 같이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가부장적 지지대가 무너지면서 남자들은 여잘ㄹ 비하할 수 있는 특권도 동시에 상실한다. 172

[ ] 우리는 처음 보는 물건을 신기하게 보듯이 낯선 타자를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의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인격이 아니라 보이는 외모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타자는 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친근한 관계로 접어드는 순간 대상이었던 타자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즉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에서 타자는 주체와 동등한 대화 상대가 된다. 지금까지 ‘그‘로 보이던 제삼자가 자신을 ‘나‘라고 칭하는 ‘너‘가 되는 것이다. 내가 질문하면 그는 ˝나는 ..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면 너는?˝하며 나의 의견을 물을 수 있다. 일방적이던 관계가 쌍방적인 관계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모르는 타자만이 대상화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여성이 나에게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175

[ ] 과연 남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요구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다 김치녀라는 식으로 일반화하는 남자들이 많다. 특히 자신의 무력감을 절감하는 남자들은 그러한 일반화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녀가 너무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무력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자기를 치고 올라가는 여성들을 김치녀라는 이름으로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남자들은 자기가 여자들보다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우월하지 못하면서 상대 여성을 비난하는 것일까? 우리는 김치녀에 대한 비난에서 남성 우월주의적 유산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남성성의 신화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몰아쉬는 마지막 거친 숨이 아닐까. 182

[ ] 여성 혐오라는 용어가 선동적인 구호에 가깝다면 여성 비하라는 용어는 태도의 전환을 요구하는 윤리적 성격이 강하다.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정 가운데 혐오감만큼 거두기 어려운 감정이 없다. 혐오했던 대상이 착각이며 환상이고 오류였다는 사실을 아무리 설명하더라도 혐오감이 사라지지 않는다...그것은 지극히 보수적이며 심미적인 감정이다. 반면에 비하는 대상에 대한 즉각적이고 심미적인 반응이 아니라 관찰과 도덕적 판단의 결과다. 판단하지 않으면 비하의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때문에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이유로 비하했던 사람의 진면목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이전의 비하했던 감정과 태도도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오해했다는 생각에 후회하기도 한다. 심지어 존경심이 생길 수도 있다. 186

[ ] 혐오가 정치적인 이유는, 자기보다 약하고 만만한 상대를 타겟으로 고르기 때문이다. 타자의 몫을 가로채는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와 단물 빨아먹기의 메커니즘이 작용하는 것이다. 케이크자르기라는 게임이론이 있다. 욕심 많은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케이크를 자르고 큰 조각을 취한다. 이때 케이크가 생명이며 행복이고 부, 건강, 아름다움리라고, 반면 그 가장자리가 죽음과 불행, 가난, 질병으로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해보다. 혐오의 기원은 생리적인 기능에 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내뱉고, 단물을 빨아먹고 찌꺼기를 내뱉는 동물적 본능이 그것이다. 191

[ ] 혐오는 비민주적이다. 강자의 약자에 대한 무시, 다수의 소수에 대한 무시, 즉 이러한 권력의 위계가 없으면 혐오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러한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소수의 타자를 혐오함으로써 달콤한 쾌락을 향유하게 되지 않는가. 이 점에서 혐오는 분노의 감정과 다르다. 분노는 불의에 대한 자의식에 머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로 잡으려는 강력한 의지까지 동반한다. 행동으로도 점화될 수 있다. 194 그렇지만 혐오감은 행동의 가능성을 극히 주관적인 쾌락으로 바꿔버린다. 194

볕뉘

0 . 여기저기 이동하는 틈에 읽다.

1. 저자는 몸문화연구소장으로 있고 영문학전공이다. 사례로 여러 문학이야기가 자연스러워 부담스럽지가 않다. 그는 혐오라는 감정을 몸에서 뱉은 침을 다시 먹을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은 타자화의 역사이자 인류가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기제라는 것이다. 밖만 아니라 내부의 심연도 그러하다고 하다. 저자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역사의 구조적 설명만으로 지금을 설명해낼 수 없으며, 보다 적확한 용어를 쓰는 것이 현실을 좀더 낫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는 오항영교수가 기존 관점과 달리 역사를 구조-의지-우연의 산물이라고 보는 점에서 곁들여봐도 좋을 듯싶다.

2. 결을 나누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싫다와 밉다.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조금씩 나누다보면 조금씩 보는 시선도 느끼는 마음도 조금씩 달라질 것이다. 쉽게 단정짓지 않고 유예를 두려는 노력이 움직인 것만이 아니라 움직이려는 것,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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