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신화(홍신문화사)

1.

[ ] 부조리한 논증: 아아, 나의 영혼이여! 불사의 생명을 바라선 안 된다. 가능한 것의 영역에 남김없이 도전하라. 6

[ ] 부조리를 만나기 이전의 일상적 인간은 온갖 목적을 품어가면서, 또는 미래를 걱정하든가 자기 정당화에 마음을 쓰든가 하면서 살고 있다. 그는 자기의 기회를 가늠해 보고, 연금이라든가 아들들의 돈벌이 등을 믿고서 만년에는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동안에는 무엇인가 행운이 찾아오는 일도 있으리라고 아직도 생각한다. 실상 그는 마치 자기가 자유롭기나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가 현실로는 자유롭지 않다고 하는 것을 이해한다. 내가 희망을 품는 한,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이라든가 어떤 자세라는가 창조의 방식이라든가에 신경쓰고 있는 한, 즉 자기의 인생을 질서있게 하고 그 일에 의해 인생에는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일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한 나는 스스로 울타리를 마련하고 그 안에 자기의 인생을 감금시키고 있는 것이다. 75-76

[ ] 내일이라는 것은 없다. 이후, 이곳에 깊은 자유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어느 한쪽은 신이라고 믿는 것으로 빠져드는 일로 내면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이는 노예상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그들의 깊은 독립을 찾아내는 것이다...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죽음쪽을 직시하면서도 그의 내부에서 투명한 결정이 되어 있는 이 정열적인 주의의 집중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는 해방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실존철학의 출발점에 있는 모든 주제는 바로 타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을 것이다. 77

2.

[ ] 부조리한 인간: 스타브로긴이라는 사나이는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경우라도 자기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는 경우라도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지 않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 그런 사나이다. 110

[ ] 자신을 남김없이 소비하는 일만을 지향하는 사람들, 혹은 자기를 모두 소비해 버렸다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만을 예로서 선정한다. 우선은 내가 바라는 것은, 인생에 미래라고 하는 것이 없듯이, 사상에 미래가 없는 듯한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뿐이다. 인간을 일하게 하든가 바쁘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모두 위선적 희망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 사상이란 불모의 사상뿐이다. 115

[ ] 예술에 있어서 영혼의 이단적 증식, 감정의 방탕, 단 하나의 운명만을 사는 것을 거부하고 온갖 방자스러움에 몸을 던져 사는 정신의 파렴치한 의도를 가톨릭 교회는 배격했다. 배우 속에 있는 저 현재시에의 지향과, 프로테우스의 승리를 금하고 암살했다. 132 당시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다는 것은 바로 지옥을 택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들의 속에서 교회의 최악의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133

[ ] 개인을 짓밟아 부서뜨리는 것은 세계이다. 따라서 개인을 해방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주체이다. 나라고 하는 주체가 개인에게 그 모든 권리를 주는 것이다. 138

[ ] 혁명이란, 현대에 있어서의 최초의 정복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저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이룩된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항상 신들에게 반항하여 이룩된다. 혁명이란 인간이 운명으로부터 자기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혁명의 정신을 그 역사적 행동 속에 있어서밖에 포착할 수가 없으며, 또한 거기서 혁명의 정신과 결부되는 것이다...인간을 짓눌러 부서뜨리는 것의 눈앞에서 나는 인간을 찬양한다. 나의 정열은 이 긴장관계, 이 뛰어난 안목, 이 끝도 없는 반항 속에서 하나로 결부되는 것이다. 139

3.

[ ] 부조리한 창조: 세계의 부조리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에는 이를테면 형이상학적 명예가 있다. 정복 혹은 연기, 헤아릴 수 없는 사랑, 부조리한 반항,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싸우기 전부터 이미 패배할 것임을 알고 있는 전장에서 굳이 싸우려고 하는 인간의 존엄에 바치는 찬가인 것이다....전쟁에서 죽든가, 전쟁을 호흡하며 살든가, 그 어느 한쪽이 있을 뿐이다. 부조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부조리와 함께 있으며 호흡하는 일, 부조리의 교훈을 승인하고 그 교훈을 육체의 형태로 찾아 내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경우, 최고도로 부조리한 기쁨은 예술 창조이다. 156

[ ] 기술한다. 이것이 부조리한 사고의 최후의 야망이다. 과학도 또한 그 역설의 끝에 도달하면 설명이나 해답의 제시는 그만두고 멈추어서서 모든 현상의 늘 신선한 풍경을 주시하며 기술한다. 이리하여 세계의 갖가지 모습을 앞에 했을 때, 우리들을 황홀케하는 저 감동은 세계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심정은 배우는 것이다. 158

[ ] 예술작품은 정신의 병에 단 하나의 출구도 제공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정신의 병의 징후 - 한 인간의 사고 전체 속에서 그 정신의 병을 반향시켜가는 듯한 한 징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에 의해 정신은 비로소 자기의 밖으로 나가 타자와 마주본다. 그러나 그 타자 속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만인이 밟고 드나드는 출구 없는 길을 손가락으로 정확히 그 타자에 제시하는 것이다. 159

[ ] 작품은 옛부터의 명제, ˝약간의 철학은 사람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만, 많은 철학은 사람을 종교에로 다시 끌어들인다˝라고 하는 명제의 다른 문장이라고도 할 ˝약간의 사고는 사람을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만, 많은 사고는 사람을 삶에 다시 끌어들인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옳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166

[ ] 킬리로프 : 결국 사물의 세계에서, 내가 원고의 역할과 피고 변호인의 역할, 피고의 역할과 재판관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는 이상은, 또한 자연 쪽에서 연기하고 있는 이 극을 ....원고이면서 동시에 피고 변호인,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피고라고 하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자격에 있어 나는 고통스러운 생애를 보내도록 하기 위해 감히 이 나를 창조한다고 한다고 하는 파렴치하기 그지없고 뻔뻔스런 행위를 한 자연에게 유죄의 판결을 내린다 - 자연은 이 나와 함께 멸망해야 한다는 형을 나에게 선고하는 것이다. 171

[ ] 부정적인 사고 이상으로 예술에 공헌하는 것은 없다. 그 숨은 겸허한 태도가, 마치 흑이 백에게 필요하듯이 위대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어떤 것을 위해서도 아니˝ 일을 하고 창조를 한다는 것, 찰흙에 새긴다는 것, 자기의 창조에는 미래가 없음을 안다는 것, 자기의 작품이 하루 동안에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은 결국 수세기 동안 영속할 것을 예정하여 건축을 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고 깊이 의식하고 있다는 것, 이와 같은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가 인정하는 쓰라린 영지이다. 한편에서 부정하고 다른 한편에선 찬양한다고 하는 두 가지의 작업을 동시에 행한다는 것, 이것이 부조리한 창조자에게 열려 있는 길이다. 그는 허공을 채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83

[ ] 나는 다른 곳에서 인간 의지가 목적으로 하는 바가 오로지 의식적인 태도를 유지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 하지만 이것은 훈련 없이는 결코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인내와 명찰을 배우기 위해서는 창조가 가장 유효하다. 창조는 또 인간의 유일한 존엄 - 즉, 자기의 자세에 대해 끈질긴 반항을 시도하고, 노력이 헛된 것임을 알고 참을성 있게 노력을 계속한다고 하는 자세 - 의 놀랄 만한 증언읻. 그것은 나날의 노력, 자기 제어, 진리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측정, 절도, 그리고 힘을 요구한다. 그것은 그대로 고행인 것이다. 184

[ ] 카프카: 그의 위대함과 그의 보편성은, 그가 희망으로부터 비탄으로, 절망적 영지로부터 의지적인 맹목으로의 나날의 이행을 참으로 풍부하게 구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인간성으로부터 도망쳐 가는 인간, 자기의 모순 속에서 신앙의 이유를 끌어내고, 자기의 풍요한 절망 속에서 희망의 이유를 끌어내는 인간, 인간의 몸서리쳐지는 죽음의 수행을 삶이라고 부르는 인간, 이러한 인간의 감동적인 모습이 그의 작품 속에 뚜렷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 그 범위에 있어 그의 작품은 보편적인 것이다.(참으로 부조리한 작품은 보편적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종교적 발상에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이다. 220 만일 예술의 본분이 보편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으로, 한 방울 물의 덧없는 영원성을 그 물방울에 닿는 빛의 유희에 결부시키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두 개의 세계 사이에 부조리한 잘가가 상위를 도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써 그 작가의 위대성을 평가하는 일은 더욱 옳은 일이다. 부조리한 작가의 비밀은, 이것들 두 개의 세계가 지극히 불균형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접합하는 그 정확한 지점으 찾아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는 점이다. 222

볕뉘

0. 맑스는 철학자들이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만 하였다며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블로흐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 못지 않게 더 중요한 것은 철학자 자신들이 변화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1. 마르크스-실존을 함께 사유해내지 못하면 지금의 철학이라고도 철학자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블로흐를 입문하려구 이리저리 궁리중이고 구입한 책들을 두서없이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르트르와 달리 카뮈는 독특하면서도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2. 시지프스가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래 그럴 것이다. 바위가 다시 굴러내려가는 그 짧은 찰라의 휴식일 것이다. 삶의 답답함이 아니라 그 순간은 깨달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세상은 어처구니 없다. 정의와 이성, 미래가 담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지금이자 여기이다. 정의와 이성이라는 논리와 조리는 지극히 작은 부분이자 거의 안개같은 것이기도 하다. 색깔없는 시간을 소비하면서 미래에 담보잡힌 자들은 희망이라는 수액을 맞으며 연명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조리의 바깥에 있는 것.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기만 한 것이 세상의 다른 구성요소일 것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이란 미래를 먼저 가정하고 세계안존재라는 개념을 발명했지만 거기에는 삶만 있지, 삶의 구체는 없는 것이다. 뼈만으로 된 앙상한 철학만이 있는 것이다.

3. 루소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지구상의 다른 공간에 있을 수 없고, 과거와 현재만 있는 중세의 삶에 시간의 미래란 단초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런 미래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정이란 이름으로 중산층이상의 가진자들의 논리로 다른 이들의 삶과 논리를 모두 억누르고 있다. 그것이 이 세계의 삶이다.

4. 그래 이 부조리를, 비조리를 직면하는 일. 기껏 삶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세상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래를 담보로 위무하고 거기에 수액을 받는 이들의 배부른 삶뿐이라고....그렇지만 그들 역시 시간을 살지 못하고, 소비할 뿐이라고.... 부조리라는 깨달음. 비조리라는 천기누설. 그제서야 삶은 걸음마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돈주앙과 배우(끊임없이 달라지는), 정복자를 예로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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