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사회적투자로서 실업수당: 새로운 조건들 아래에서 실업수당은 실직 상황에 대한 보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엥떼르미땅 일부에 의해 그들의 활동고 삶을 위한 ˝융자˝로서, 그리고 고용시간, 노동시간, 실업시간, 삶의 시간과 같은 여러 시간들의 비교적 유연한 배치를 허용하는 ˝사회적 투자˝로서 사용된다. 13

[ ] 왜 문화 산업의 고용시장 구성은 ˝사회복지정책˝의 운영을 통해 이뤄지는가? 16/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과 ˝사회˝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19

[ ] 신자유주의적 의미에서 경쟁은 욕구, 본능, 행동의 ˝자연적 놀이˝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 사이의 ˝형식적 놀이˝다. 제정되어야 하는 놀이, 계속해서 양육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놀이다. 이들이 보기에 욕구와 본능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직 불평등만이 욕구와 본능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드는 역동성을 생산할 능력을 가지며, 그 경쟁을 통해 개인들의 욕구, 본능, 뇌를 예리하게 다듬고 그들의 행동력을 최대화한다. 이들이 가진 시장 개념은 따라서 널리 퍼진 의견과는 반대로 반자연주의적이다....시장에 대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위해서 개입해야 한다. 20 경쟁과 기업에 기반을 둔 시장의 통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불평등˝의 상태에 있도록 감시해야 한다....푸코는 개인들이 위험을 개인적으로 책임지고 맞설 수 있는 경제적 공간을 구성하는 목적을 가진 사회보장정책의 ˝개인화˝라고 지적한다.(개인적 사회보장정책) 24

[ ] 엥떼를미땅의 실업보험 문제는 기업과 ˝인간 자본˝의 노리에서 벗어나는 실업보험의 우회와 유용 전략에 너무 많은 공간과 자유를 허용했다. 따라서 이문제는 우선 유연한 생산의 새로운 조건들 안에서 품행을 통치하는 문제이다. 27

[ ] 품행의 통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혁명적 정치˝, 즉 이 불평등을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사생결단˝의 전투로 뒤엎을 수 있었던 혁명적 정치를 무력화하고 탈정치화하기 위한 기술들의 총체이다. 33 사회를 ˝기업사회˝로 만드는 것, 그리고 노동자 자신을 ˝일종의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34 자본화는 노동자를 ˝인간자본˝으로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하는 기술 중의 하나이다. 인간자본은 비용/투자 관계의 논리에 따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모든 관계 선택 행동을 관리하면서 스스로 교육 성장 축적 개선 그리고 ˝자본˝으로서의 ˝자기˝의 가치를 부여를 떠맡아야 한다....그래서 개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이 아니라 자본의 수익성을 보장하는 일이다. 개인은 자신의 자본의 일부분, 자본의 분자단위 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 노동자는 더 이상 생산의 단순한 요인이 아니다. 개인은 엄밀히 말해 노동력이 아니라 자본-역량, ˝기계-역량˝이다. 이것은 ˝생활양식, 생활방식˝, 도덕적 선택, ˝자신에 대한, 시간에 대한, 주위 사람에 대한, 미래에 대한, 집단에 대한, 가족에 대한 개인의 관계 형태˝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36-37

[ ] 사회보장은 법률적인 것을 포함해서 임금 종속관계에 대한 보상으로 고안됐다. 그런데 이 생각은 경제의 금융화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다. 이것은 위험과 보호에 대한 완전히 다른 생각을 도입하며, 법전과 법률을 철저히 비웃고,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비롯된 협정이나 타협과 완전히 결별한다. 따라서 화폐문제를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40 들뢰즈는 화폐를 가능한 것들에 대한 권력으로서 가상성의 자본주의적 전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현대 경제는 소비자들에게 제공되는 수많은 선택권, 선택사양, 가능한 것들처럼 재현된다.....신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화폐의 재민영화 정치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것들을 결정하고 구획 짓는 권력의 재민영화이다. 따라서 시장과 경쟁의 분석에 경제적이고도 정치적인 관점에서의 화폐 분석도 통합해야 한다. 즉 ˝바로 화폐와 시장이 진정한 자본주의의 경찰이다.˝ 42-43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뉴딜에 대한 복수이다. ˝자본을 가진 자˝들이 ˝내전˝과 1929년 공황 이후 자본주의의 돌이킬 수 없는 공황이라는 위협을 받고서 비소유자 계급들과 맺을 수밖에 없었던 타협에 대한 복수이다. 45 신자유주의는 소유에 대한 개인적 접근을 거치는 ˝탈프롤레타리아화˝를 선호하기 위해, 이 정치적 획득물들을 번복하는 것을 자신의 존재 의미이자 주요 목표로 삼는 정치이다. 사적 소유에 대한 개인적 접근을 통한 탈프롤레타리아화가 바로 신자유주의 탈정치화의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다. 46 경제의 금융화는 더 이상 고용, 생산성 과실의 재분배, 사회보장에 기반을 두지 않고 주주와 저축에 기반을 둔다...주식시장에서의 연기금 동원은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은 ˝노동자들의 저축을 자본주의적 변환-재구조화 과정과 엄밀하게 연결하면서 포드주의적 임금 형태 안에 있는 암묵적인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리를 제거하는 것이다. 48 신자유주의적 목표는 ˝경제의 임금노동자 비율 증가 경향˝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자본가이기도 한 임금노동자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50˝자기의 경영자˝로서의 개인이라는 생각은 예속 기계로서의 자본의 도달점이다. 51

[ ] ˝사회적 재건˝에 의해 도입된, 실업자들에 대한 추적조사는 ˝배제된˝ 개인, 실업자, 기초생활수급자, 노조탈퇴 임시직을 ˝인간자본˝으로 전환하려 애쓰는 안전기술처럼, 다시 말해 고용 정책들이 스스로 부여하는 ˝동기부여적˝ 재현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재편성되는 것은 바로 징벌, 복종, 의무, 종속, 죄의식의 규율적 도구이기 때문이다....실업은 실업자의 잘못처럼, 개인의 ˝도덕적˝ 질병처럼 나타난다. 예속은 책임을 통해, 더 나아가 죄의식을 통해 이뤄진다. 52-53 사장단의 ˝사회적 재건˝에 따르면, 우리는 따라서 행동과 생활양식에 대한 모니터링의 시대, ˝개인적 추적조사˝의 시대로, 수혜자들에게 ˝행동 변화에 대한 책임˝과 사는 방식을 요구하는 명령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54

[ ] 화폐의 기원과 기반은 상품의 교환(맑스)이 아니라 빚의 감소(니체)이다. 빚의 체계는 피통치자들 안에 죄의식과 ˝책임감˝을 동시에 유포한다. 55

[ ] 자본주의는 장래를 미리 처분한다. 왜냐하면, 빚의 강제는 현재의 행동과 다가올 행동 사이의 균형을 예상하고 계산하며 측정하고 수립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다리를 놓도록 하는 것은 바로 주체성에 대한 빚의 권력효과(죄의식과 책임감)이다. 56 복지국가의 ˝서비스˝는 투쟁에 의해 획득된 사회적 권리가 아니라 체계가 당신에게 우호적으로 부여한 ˝신용˝이다....주체성에 대한 화폐의 권력효과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집단적 권리의 논리에서 나와 신용(인간자본의 ˝투자˝)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57

[ ] 빈곤은 경제 성장이 흡수할 지연의 증후가 아니다. 빈곤은 분화, 분리, 나누기 장치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부유한 사회 안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창조된다...새로운 빈곤은 ˝물질적 비참함˝을 ˝이긴˝ 자본주의 사회 안의 정치적 의지의 산물이다.....신자유주의 사회는 일정한 비율의 임시성, 불안전, 불평등, 빈곤이 있을 때 편안한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불평등의 축소나 근절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차이들을 이용하고 차이들을 바탕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개인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체계적이 아니라 일회적인 방식으로만 받을 수 있다. 59-60 최소는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전˝의 한계치, 사회적 평화의 단절 위험의 한계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61

[ ] 정부는 위기의 관리를 고용 및 사회통합부가 아니라 문화부에 맡겼다. 엥떼르미땅의 실업보험 문제를 사회적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문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나의 경제적 원칙-정규직 고용-이 예수적이거나 문화적인 활동의 계량 척도이자 동시에 사회적 미분화도구가 된다....국가는 품행의 새로운 통치 양식들을 발의하고 실험하고 실행하고 유포하는 제도이다. 65, 67

[ ]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경쟁을 부추기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정규직 고용에 대한 노조의 논리도 노동자들 사이의 가차 없는 경쟁을 불러일으킨다....고용에 대한 정책들은 경제적인 만큼이나 사회적인 차이와 불평등을 증가시키면서 자유주의적 정부의 미분적 관리를 조장하고 신자유주의적 차이들의 최적화 정책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 69 일반적으로 정치 좌파와 노조 좌파는 노동 조직의 유연성(임시성)을 다른 인구에게 전가하면서 인구 일부의 노동권과 사회보장권을 보호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수년을 보냈다. 70

[ ] 사회적 권리 없이 문화도 없다.....연대, 평등, 안전 없이는 자유, 자율, 진정성도 없다 73 약자들의 이동성은 대부분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이동성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네트워크를 만들 속성을 갖지 않는다. 74 ˝예술적 비판˝의 담지자라고 보는 사회 집단들은 이동성에 대해 어떤 종류의 관심도 갖지 않는, 사회적 위계의 다른 쪽 끝에 있는 임시 노동자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 그들은 전혀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77 균열은 새로운 자유직업들과 ˝창조적˝ 직업들을 가로지른다.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 거기에서 일하는 개인 중의 일부가 보장 없이 가난하고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78

[ ] 중간계급의 빈곤에 잘 오셨습니다; 중간계급들에 들어갈 수 있는 잠재적 지원자들이 넘쳐나는 반면, 공적 영역의 중간 범주들의 자리 중 절반이 사라졌고 사적 영역의 중간 범주들의 자리들은 지원자들의 확대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느린 속도로 증가했다. 80

[ ] 사회보장은 단순히 사회적 위험(실업, 사고, 노화)에 대비하는 보험이 아니라 개인들을 예속시키는 생활양식의 통치 기술이다....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사회적 투쟁은, 자율과 평등을 연합하고 복지국가의 ˝권력효과˝, ˝예속효과˝, ˝개인화˝에 대해 비판하는 ˝새로운 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각자에게 진정한 자율을 보장하면서 자기 자신과의,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의 좀 더 풍부하고 좀 더 많으며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유연한 관계로의 길을 여는 안전에 대한 요구이다.....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신자유주의적 주도권에 맙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 ˝사회적 비판˝은 현재 그러한 것처럼 품행 통치의 장치들에 종속될 것이다. 84

[ ] 노동은 엄청난 양의 활력을 소비하고 성찰, 사색, 몽상, 걱정, 사랑, 증오로부터 활력을 빼내기 때문이다. 노동은 끊임없이 쩨쩨한 목적을 드러내기 쉽고 규칙적인 만족을 보장한다. 85

[ ] 목자사제형 권력은 개인화시키는 것이다. 목자사제형 개인화 기술들은 출생이나 부의 지위들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장점들과 단점들, 그것들의 경로와 그것들의 순환을 결합하는 ˝정교한 경제˝를 거친다. 이 영혼들의 경제는 법률이나 ˝합리적인˝ 원칙들이 아니라 다른 개인의 의지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과 순종 관계, 전적인 의본을 창출한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기독교적 복종의 신조이다. 수도 생활의 규칙들은 그것의 도달점이다. 반면에 그리스 시민은 법률과 사람들의 수사학에 의해서만 지휘를 받는다. 100

2.

[ ] 사건은 열림이고 자기 변형의 가능성이며 결과적으로 사회정치적 상황의 변형 가능성이다. 새로운 우주가 이 한계를 넘는 사람에게 열린다. 새로운 관계들, 생각하고 행동하는 새로운 방식들, 새로운 지식들, 새로운 정동들은 거기에 참여하는 자에게 가능하다. 이 가능한 것들은 우선 고안되기 보다는 느껴진다. 왜냐하면, 주체적 변이는 우선 비담론적이기 때문이다. 거부와 반발에는 수많은 이유와 원인(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등)이 있다. 그러나 거부와 반발을 구현하는 행위의 의미는 비담론적인 양식 안에서, 그것의 이유와 원인 들에 결부된 증거와는 동일한 성질의 것이 아닌 증거와 함께 단숨에 행위자들에게 주어진다. 120

[ ] 사건의 역실행: 역사 안으로 사건이 다시 떨어지는 일은 적어도 세 개의 다른 특이화 과정의 교차점에서 이뤄진다. 1) 사건을 역실행하려고 하는 여러 권력장치들(정치적, 경제적, 미디어, 복지국가 등)과의 정치적 싸움 2) 도달할 목표들과 조직과 투쟁 양식들, 그리고 건설해야 할 동맹들과 실행해야 할 전략들에 대해, 구성된 정치적 세력들(조합, 트로츠키주의자, 공산주의자, 마오주의자 등)과 구성 중인 세력들(연합) 사이에서 벌어지는, 운동 내부에서의 정치적 싸움, 3) 이 몰단위 주체화 수준이 노동, 실업, 고용, 삶의 실천들로부터 떠오르는 분자단위 주체화 과정과 유지하는 관계가 그 특이화 과정들이다. 123

[ ] 역사 안으로 사건이 ˝다시 떨어지는 일˝과 사물들의 기존 상태 안에 사건이 기입되는 일은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결정한다. 이 다시 떨어짐, 이 기입이 일어나는 방식,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제도들을 뒤흔드는 방식, 또는 그것이 충돌 없이 그 제도들에 통합되는 방식, 그것이 고용 실업 노동에 대한 지배적 담론들을 심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 또는 그것이 경우에 따라 ˝문제들˝을 다르게 규정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은 ˝정치적˝ 싸움에 속한다. 이것은 정치적 전략과 전술의 문제들이고 이질적 관점들 사이의 충돌의 문제들이다. 125

[ ] 정치적 사건은 우리에게 세계와 주체성을 되돌려준다. 그것은 세계에 그것의 진정한 속성을 되돌려준다. 세계가 사건에 의해 열리고 찢기자마자, 세계는 자신이 단지 존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만들어지고 있는 세계와 만들어야 하는 세계는 항상 윤리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것들은 항상 실존적 닫힘을 추구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건적 열림은 우리에게 주체성의 생산과 변형의 과정에 접근하게 한다...사건은 우리에게 ˝선택 재료˝로서의 세계와 ˝실천적 교차로˝로서의 주체성을 다시 준다....사건으로 인해 주체성은 대안선택, 결정, 그리고 위험 감수를 해야 한다. 사건과 함께 우리는 즉각적 방식으로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동한다...우리가 이 도전들과 약속들의 현실화에 뛰어들고 참여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의 옛 세계(옛 믿음들, 옛 욕망들, 옛 타성들)를 다시 손질하고 새로운 것과 함께 구성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건은 새로운 주체성의 ˝재전환˝이거나 생산의 과정이다.....이 시대에는 역사가 미리 세계의 운명을 그리지 않도록 역사와 역사적이지 않은 것-사건-이 함께 배치되는 방식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128

[ ] ˝역사˝와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들을 결정할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우선 사건-운동을 출현시키는 (˝사회-경제적˝이고 주체적인) 조건들의 묘사로 돌아와야 한다. 129 예속 양식들을 거부하고 규준들과 규칙들을 전용하면서 분자단위 대항품행들은 살아가는 방식들의 발명을 그 품행들이 할당된 시간성들(고용 시간, 노동 시간, 실업 시간, 삶의 시간)의 새로운 배치와 연결한다. 130

[ ] 거의 세 명 중 한 명의 엥떼르미땅이 자신을 임금 받는 고용인이라고 한다. 이 비율은 기술적 직업들에서보다는 예술적 직업들에서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임금받는 고용인은 가난한 노동자이거나 프롤레타리아화 되는 중인 사람이지 고전적 의미에서의 경영자는 아니다. 131 이 진화는 고용인들과 임금노동자들이 각각 가진 기능, 역할, 책임들의 혼종화를 동반한다....진정한 지시자는 극장, 지자체, 텔레비전이나 영화 업체이다. 그들은 거대 산업 기업들이 가장 작은 기업들을 하청업체로 이용하는 것처럼, 이 작은 문화업체들을 이용한다. 132

[ ] 사회적 변이를 동반하는 ˝주체적 재전환 운동들˝은 ˝불안정성의 발생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잠재성들˝과 ˝모호성들˝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이다.....엥떠르미땅 제도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절대자유주의, 또 하나는 극단적 자유주의 얼굴이다. 이 체제는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일한다˝와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한다‘ 사이에 있는 모든 공간을 없애버린다.....완전한 불규칙함과 이동 (따라서 외부 활동들 - 스포츠나 음악 활동, 동아리 활동 - 에 뛰어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특히 임시정에서 기인하는 반복되는 스트레스, 특히 임시성이 더 이상 ˝사회보장 제도들을 동반하지˝않는다고 느낄 때의 스트레스가 있다. 135

[ ] 가득찬 시간: 그들은 실업을 ˝가득 찬˝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실업개념은 잘못 선택된 단어이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개념입니다. 실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랑스에는 생각하고 창조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갖도록 허용하는 체제가 있었습니다....실업은 엥떼르미땅이 구직 외에 다른 일들로 채우는 고용의 빈 시간이다....한 음악가는 실업 시간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반응했다. ˝실업 시간은 없습니다. 내가 집에 있을 때, 내 손은 악기를 만지고 있고 눈은 컴퓨터를 보고 있고 귀는 전화를 듣고 있습니다.˝ 136

[ ] 분자단위 실천들의 ˝의식˝이 되거나 그 실천들을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의 이질적 수준들의 격차를 보존하면서 그 수준들을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다. 138 ˝도덕˝안에서, 품행 안에서 일어난 큰 변화들은 규준들과 규범들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규준들과 규범들 ˝아래에서˝, 자기와의 관계 안에서, 자기 변형의 실천들 안에서 일어난다. ˝윤리˝는 권력의 관점이든, 운동의 관점이든, 정치적 싸움의 중심에 있다. 140 견유적인 투쟁적 활동은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통치를 실천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동시에 ˝관습들, 법률들, 제도들˝을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141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이 주체들이 모든 권력관계들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항상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47 권력이 주체와 그의 세계를 ˝생산한다˝는 것은 권력이 주체의 총체성을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권력이 세계를 완전히 포맷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148 관계는 항상 관계를 연장하는 접속사 ˝와˝를 자기 뒤에 끌고 다닌다. 149 푸코에게서 ˝자기와의 관계˝의 발견은 권력관계들과 지식 관계들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었다..그것은 집단들이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그리고 구성된 지식으로서 확립된 세력관계들에서 벗어나는 개체화 과정이다. 150 권력관계들은 정치적 공간 안에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경제 안에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전통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는 영역들을 가로질러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가 윤리와 맺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151

[ ] ˝임금노동자˝,˝예술가˝ 또는 ˝전문직업인˝이라는 말들은 분쟁을 진부하고 알려진 틀 안에 매우 빨리 가둬 버렸을 것이다...˝ -와 임시직˝은 그래서 사건을 제도화되고 진부한 틀 안에 가두려는 의지에 맞서 사용됐다. 157 여러 정당과 여러 노조는 모두 예외없이 우리 사회나 사회집단들에 닥치는 일을 더 이상 문제시하지 못한다. 19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양식들(특히 경제와 정치 사이의 분리/모순)에 따라 개입하기에, 그들은 문제들을 정치화하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다...처음 보기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정치화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고 ˝세속적˝ 지식과 ˝학술적˝ 지식 사이의 새로운 배치들을 실험한다. 159전문평가를 실행할 때, 우리가 실험한 것은 이질적인 지식들(˝박식한 지식˝과 ˝자격 없는 지식˝) 사이의 협력, ˝함께 유지하기˝이다. 160 시민평가와 달리 연합의 전문평가는 투쟁의 차원들 중의 하나로, 집단적 ˝자기˝구성 과정의 도구로 고안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것은 푸코가 말하는 ˝투쟁의 지식˝의 전통과 공명한다...이 장치 안에서 지식은 집단적 요구와 행동을 만들고 내세우는 데 사용된다. 전문평가는 이처럼 집단적 주체의 건설과 변형 과정의 일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노조, 미디어, 학자, 전문가들의 지식에 대항해 ˝투쟁중인 지식˝을 표명한다. 그것은 따라서 ˝싸움의 기억˝을 건설하는 데 속한다. 161 세상은 다수의 관점들과 다수의 이질적 관계들로 구성돼 있어 상대적으로 가소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세상에 대한 지식은 이 다양체를 부분적이고 잠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결정하면서 그 관계들의 복사가 아니라 자르기를 실행하는 것을 내포한다 162 말과 생각의 진리는 ˝전략적˝ 과정 안에서 만들어지고 구성되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그 전략적 과정 안에서 증명된다. 진리는 그것의 기능과 효과를 갖고 정치적 전투에 참가한다. 진리는 의견을 만드는 도구들 중의 하나이고 주체성을 생산하는 기술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싸움의 양식들 중의 하나이다. 165

[ ] 지적인 정치적 불임 상태는 내가 보기에 우리 시대의 주요 사실들 중의 하나인 것 같다(푸코) 양자 물리학에서는 어느 날 물리학자들이 물질은 동시에 입자이고 파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적 투쟁들은 동시에 몰단위이고 분자단위이다.(가타리) 문제화한다는 것은 행동과 생각을 위한 새로운 대상들(임시성, 불연속적 고용, 유연성에 대한 사회보장, 이 불연속성의 시간성 등)과 새로운 주체들(임시직, 다수 고용인을 둔 임금노동자, 임금 받는 고용인 등)을 정치적 공간 안에 도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75

[ ] 시간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비춰 말하자면, 이 관심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마도 투쟁이 자본주의 기계의 예속과 노예화롭터 가장 중요하게 빼내게 되는 것은 시간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운동이 정체될 때, 사람들이 가장 빨리 잃는 것이기도 하다...집단이라는 것은 개인들의 모임이란 뜻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집단˝을 생산하는 연합 ˝기계˝와 연합을 지지하는 계층, 작동 절차와 의사 결정 절차들, 활동과 발언 획득의 관리 기술들, 장소들의 조직, 역할 들의 정의, 시간성들의 배치, 분위기 등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181, 182

[ ] 이접적 종합은 서로 뒤얽힌 다수의 권력관계들을 ˝정치화하기˝위한 방법이다. 그것은 착취 관계들과 인종적, 성적, 문화적 지배 관계들이 끼여 박혀 잇는 ˝공통 세계˝를 탈구시키고 각자의 특이성을 확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184 미시정치는 ˝자발적 참여주의˝, ˝운동주의˝, 그리고 ˝삶의 형태들˝(랑시에르와 알랭 바디우가 작은 경멸과 함께 말하는 ˝생기론˝)에 대한 단순한 확언이 되기는커녕 매우 높은 수준의 조직, 기능들과 정치적 행동의 과도한 분화, 다수의 솔선 행위들, 지적이고 조직적인 확실한 규율을 요구한다. 미시정치는 엄밀함을 요구한다....미시정치는 투쟁, 거부, 봉기, 문제화, 실험, 발명, 조직, 그리고 주체성의 재전환이기도 한 구성주의이다.....미시정치는 이질적인 것에서부터 바탕을 만들고 움직이는 능력 안에 있다. 바로 이런 조건이라면, 정치적 행동의 여러 자락들을 붙잡으면서 사람들은 현대의 정치적 행동에 없는 세력과 세력관계들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186, 187

[ ] 경제와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노동운동의 전통 안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해방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규정하지 않는다/운동은 국가나 제도적 틀 안에서의 정치적 출구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당이나 전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운동은 새로운 ˝정치적인 것˝과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을 발명하기 때문이다...전통적 형태의 당과 노조는 구조적으로 차이들과 특이성의 가로지름과 결합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투쟁은 국가와 국가 제도들의 독립을 위한 투쟁처럼 표명된다./현대 자본주의에서 정치적 운동은 과두제의 민주주의와는 구별되고 분리되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전제한다./연합, 가로지름, 민주주의, 자율성은 새로운 투쟁 형태들의 조건들이다. 이것들의 도달점은 ˝사회의 봉쇄˝이다...이 투쟁 형태들의 양식들은 ˝권력˝획득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자율성과 독립을 확인하고 확장하며 강화해야 하고 ˝생산적˝ 배치들을 재구성해야 하는 주체성의 ˝재전환˝ 과정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권력 획득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제도들의 구성과 ˝주체성이 재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노조 좌파와 정치 좌파의 논리인 노동주의적 논리의 출구는 ˝산문적인 것˝(임금, 소득, 사회보장, 새로운 생산형태들)과 ˝시적인 것˝(삶의 내용과 의미, 활동의 내용과 의미, 다른 ˝생산˝과 다른 활동을 바탕으로 한 주체성의 재전환 등)을 배치하면서 가능하다. 189-192


3.

[ ]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우리 사회들에서 예술이 개인들이나 삶과는 관계를 갖지 않고 대상들과만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개인의 삶은 예술작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림이나 집은 예술작품이고 우리의 삶은 예술작품이 아닌가? 푸코

[ ] 당신은 문학가라는 명칭처럼 화가라는 명칭을 거부합니다...그렇다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뒤샹은 이렇게 답한다. ˝왜 당신은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을 분류하려고 합니까? 내가 무엇인지 나는 압니까? 그저 단지 한 사람, 하나의 ‘인공호흡기‘...˝ 201

[ ] 분자단위 실천들은 예술과 예술가를 종목별로 항당하는 것을 고치고 변형하는 데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구와 공중의 ˝문화적˝ 통치와 자본주의적 가치부여 과정들 안에 포획되기도 한다. 214 자본주의의 가치부여는 이 ˝대항품행들˝, 이 의미론적 혁신들, 새로운 표현 재료들의 실험과 참신한 언술 양식들의 실험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재화들의 모든 생산들 안에 통합할 수 있다. 215 ˝창조산업들˝의 자본가들은 이 혁신의 원천들을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들을 불러들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공중은 뒤샹이 원했던 것처럼 항상 작품의 공동생산자들이다. 그러나 문화 산업과 예술 시장 내부에서만 그렇다..216 결정불능성과 불확정성은 통치 장치들의 행동 ˝자유˝와 피통치자들의 행동 ˝자유˝ 사이의 교차와 충돌 지점에서 분출하는 정치적 행동의 가능태들을 지칭한다. 결정불능의 것은 ˝대표적인 혁명적 결정들의 씨앗이고 장소˝이다. 그것은 주체성의 변형들이 활성화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지배 관계들의 가능성이 그려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새로운 자본주의적 가치부여의 씨앗이고 장소이기도 하다. 217

[ ] 기업들은 새로운 상업화와 마케팅 전략들뿐만 아니라 특히 임금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변형하고 지도하는 ˝사제목자적˝ 기술들도 발명해야만 한다....218 현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는 기업의 하이퍼모던하면서 동시에 네오아카이크한 행동 안에 잡혀 있다. 여러 위계 층위들을 동반하는 변조에 따르면 임금노동자는 주체적으로 열중하고, 자신의 감성을 투자하고, 유능하고 자율적인 ˝인간자본˝이 돼야 한다. 그러나 항상 위계적 종속의 틀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창조성에 대한 명령은 새로운 소득이나 새로운 권리에는 관계되지 않고 임금노동자들 스스로 위험과 책임을 떠맡는 것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219

[ ] 자본주의의 통치성과 가치부여는 ˝다수 권력들˝(기업, 국가, 지자체들, 예술기관들)과 ˝사회적인 것˝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생산된다. 221

[ ] 예술가/지식인의 새로운 형상에 대한 질문, 시간/돈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회 안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222 ˝집단 지성˝을 활동의 헤게모니적 모델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어떤 조건들에서 이 ˝직업들˝이 무예술과 무예술가의 개인적 경험을 다시 취하고 확장시키고 재발명하고 집단적 층위로 옮겨놓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관건이다. 224

[ ] 시간을 규제한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주체성을 획일화하고 동질화하기 위한 것이다. 주체성의 빈곤화는 우선, 그리고 특히 시간의 빈곤화이다. 변화의, 변환의, 가능태 창조의 원천으로서의 시간을 무력화하는 것이다../실업보험은 우리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줍니다./내 자본은 시간이지 돈이 아니다/ 빈 시간, 중지와 단절의 시간, 목적성 없는 시간, 주저의 시간은 모든 예술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생산의 조건들이다. 225

[ ]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그 시간들에서 변환의 힘을 빼낸다. 이 정책들이 알고 있고 인정하는 유일한 시간성은 고용의 시간과 구직의 시간의 시간성이다. 반면에 소위 ˝자유로운 ˝ 시간은 문화와 관광산업들을 위한 시장으로 변형된다. 225 자본의 논리가 ˝죽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살아 있는 시간˝이다.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 개념은 소위 ˝인지자본주의˝에 , 소위 ˝지식사회˝에, 또는 소위 ˝문화적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주요 모순이다. 226˝부자되세요˝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 옆에 ˝자신을 표현하세요˝ ˝창조적이 되세요˝라는 신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를 차지했다. 표현은 장려될 뿐만 아니라 고용적격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 창조에 대한 독려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권리와도 상응하지 않는다. 그 반대이다. 227

[ ] 벤야민에 따르면, 바로 소유권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서 대중들의 표현을 조직하겠다는 의지가 파시즘을 특징짓는다. ˝전체주의 국가는 새롭게 구성된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을, 그 대중들이 폐지하려고 하는 소유권의 조건들을 건드리지 않고서 조직하려 한다. 자유주의 정부는 전체주의 국가의 것과는 다른 틀 안에서 동일한 목표를 겨냥한다. 그것은 ˝대중들에게 그들의 권리들의 표현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의 표현을 허용하는 것이다. 228

[ ] 뒤샹의 예술에 대한 원칙과 기준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변형을 위해 ˝행동하려는 경향˝이기 때문이다...예술가는 주체성의 출현 지점으로 체계적으로 되돌아오는 ˝영매의 방식으로 행동한다...예술가-영매의 활동은 따라서 주체성이 ˝반복˝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체적인 잠재적 변이들의 발생지가 습관으로 굳어지기 전에 전개돼야 한다....그 단절은 우리에게 단지 변화과정을 향해 열린 그것의 출현 지점만을 준다. 이 변화과정은 내재적 방식으로 그것의 규칙들, 그것의 절차들, 그것의 기술들을 퍼뜨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주체성이 변환될 수 있다. 231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주체화 전이는 사용된 재료들(대상뿐만 아니라 사상, 기호 등)의 ˝상호침투˝,˝물질전환˝,˝변성˝을 실행하면서 하나의 우주를 펼치고 하나의 세상을 짠다...창조적 행위는 가능한 경험의 장을 이동시키고 재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미적인 행위이고, 새로운 감성과 새로운 생각을 만드는 장치를 구성한다. 232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간격 안에 우리는 뒤샹을 따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을˝가능성을 위치시킬 수 있다....예술적 창조와 임금노동 사이의 양자택일안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최소로 행동하기˝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최소로 행동하기˝는 현대 자본주의의 능력 분배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고, 모든 창조의 조건인 비목적성의 시공간을 향해 열리는 것이다. 234

[ ] 같은 것 안에서의 격차를 파악하는 것, 동일자 안에서 앵프라맹스한 간격을 발견하는 것, 대량생산을 다시 특이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를 언어에 의해 실행되는 환상들, 일반화들, 분리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차이와 반복의 모든 방법론을 내포한다. 235

[ ] 지성은 예술적 실천의 효과들을 파악하기 위해 좋은 도구가 아니다. 예술적 실천은 ˝종교적 믿음이나 성적인 끌림과 약간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감정을 통해 느껴지기˝때문이다. 뒤샹은 주체성의 생성적이고 구성적인 힘으로서의 정동(미적 메아리나 미적 감동)과 기존의 ˝미적˝습관들과 그것들이 운반하는 권위를 반복하는 데 그치는 감정들(취향들)사이의 구별을 도입한다. 237 미적 감동(재현이나 이미지가 동반되지 않는 집중적, 실존적 정동)의 속성은 사랑에 빠지는 ˝바보˝의 유연성과 신뢰 안에서만큼이나, 신을 믿는 ˝바보˝의 순수함과 믿음 안에서도(다다주의의 바보안에서도) 표명된다. 238 종교는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힘들에 호소한다. 그 힘들의 본성은 ˝감정적이고 활동적˝(제임스)인 동시에 비상식적이다. 239

[ ] 실재는 가능태의 사례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더 이상 저승을 구성하지 않고 실재에 내재한 ˝바깥˝을 구성한다. 뒤샹이 말한 예술의 세계처럼, 그 세계는 ˝공간과 시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사건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이다. 이 사건의 논리는 연대기적 시간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이질적인 것이고, 선적인 발전을 단절하는 것이며, 그렇게 단절하면서 새로운 연대기를 여는 것이고, 우리의 행동력을 청구하면서 가능태들의 세계를 육성하는 것이다. 비결정된 것 안으로의 이 도약으로부터 경험은 실험으로, 위험 감수와 내기로, 자기자신, 타인들, 세계를 시험에 들게 하고자 하는 의지로 변형된다. 241 문제가 되는 힘들과 행동은 심리적인 것도, 사회적인 것도, 유기적인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비에너지적이고 비정보적˝일 것이다..뒤샹이 레디메이드를 생산할 때처럼 이제부터 행동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과 행위를 구분한다. 행동(감각운동적)은 천연의 사실들이나 완전히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 작용하는 반면에, 행위는 가능태들에 대해 작용한다. 행위와 함께, 우리는 어떤 점에서 현장에서의 도약을 실행한다..신앙은 행위를 설립하고 지지하고 규정하는 정서적 힘이다...그것은 실존적 자기위치결정의 힘의 출현을 확언하고 표시하고 서명하는 집중적이고 의도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 신앙은 가능태들 안의 세계들을 주고 ˝재충전˝하고 ˝미래를 향한 열림˝(제임스)을 구성한다.....반면에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바로 모든 신뢰를 파괴하고 그것의 반대자인 불신과 두려움을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통치이다. 243

[ ] 주체성은 더 이상 ˝운동적이거나 물질적이 아니라 시간적이거나 영적인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감각운동적 행동과 무기적 행동 사이의 관계, 물질적 주체성과 영적 주체성 사이의 관계는 사건의 역동성에 의해 주어진다. 시간적이거나 영적인 주체성과 무기적 힘들은 ˝비육체적˝정동들을 통해 사회적인 것, 심리적인 것, 유기적인 것 안에 개입한다. 244

[ ] 왜 뒤샹과 함께 지성과 감성 사이에, 지식과 감정 사이에 신앙을 집어넣어야 하는가?...지식도 , 느낌도 우리에게 공백에서 출발해 행동할 힘을 주지 않는다..246 하나의 대상, 하나의 생각, 하나의 관계, 하나의 기능에 집착하고 고착되는 신앙은 바로 뒤샹이 상기시키는 것처럼 권위라고 불린다...신자유주의는 ˝자유˝를 생산하는 것처럼 신앙을 제작한다...예속은 신앙을 내포한다. 자율성, 책임, 위험감수를 명령하는 현대 경제는 신앙을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이다. 자기의 경영자정신이라는 논리에 예속되는 것은 믿는 힘의 제정이나 이전을 요구한다. 247

[ ] 일단 습관-신앙이나 권위-신앙과 단절을 한 후, 레디메이드는 비결정된 미지의 세계 안에서 행동의 조건들을 노출하고 조직해야 한다....공백과 마취의 바로 옆에서, 신앙은 신뢰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어떤 생각이나 어떤 의미에 집착하거나 어떤 습관에 순응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어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품행들 대부분은 어떤 행함이나 제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행동함˝을 가리킨다.. 248

[ ] 삶과 예술 사이에는 항상 채워질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나는 회화를 이용하려 했다. 삶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방식으로...내 삶 자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려고 시도하기 위한 일종의 방식으로, 삶의 방식을 수립하기위해서 예술을 이용하려 했다...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고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이다. 249 삶의 방식을 수립하기 위해 예술을 이용하는 것, 그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과 시간의 강도를 파악하는 능력을 내포한다. 250

[ ] 주체성은 이질적 구성요소들의 교차로에 있다. ...개인은 이질적이고 부분적인 구성요소들의 종점에 있다.(가타리) ˝주체적 변이˝는 무엇보다도 우선 담론적이지 않다. 이 변이는 주체성의 비담론적, 정서적, 실존적 발생지를 건드린다. 즉, 자본주의는 존재양식들과 삶의 형태들을 공격한다. 251

[ ] 우리가 제도화된 예술을, 사회적 장에서 전시된 그것의 작품들을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 상태에 있으며 항상 자기 자신에 앞서 있는 출현 역량인 창조의 차원을 참조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원생-미적 패러다임에 대한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252 미적 패러다임은 창조성이 항상 집단적 배치의 결과라고 확언한다. 주체성과 자기 변형 과정은 항상 언술과 행동의 집단적 배치로부터 나온다. 이 집단적 배치는 개인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의 단일체를 폭발시키고 주체 안과 언어 안에 갇혀 있지 않다. 254 20세기의 예술은 언어학과 사회과학 훨씬 전에 ˝언술의 문제가 더 이상 기호 영역에 특수한 것으로 머물지 않고 이질적 표현 재료들 전체를 가로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258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기 전에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60

[ ] 윤리-미적패러다임: 실존적 자기위치잡기..지식과 언어를 통해 표명되기 전에 우선 느끼는 방식 안에서의, 실존 안에서의 변화를 표명하는 힘에 대한 파악을 바탕으로 이 윤리-미적 패러다임이 세워진다....실존적 기능의 건설로 번역되는 가타리의 언술 개념의 이런 확장은 새로운 프락시스를 위한 필요불가렬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 조건은 ˝신뢰˝를, 행동하려는 경향의 동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261 실존적 기능은 감정적, 집중적 힘이다..사랑의 정동이 리비도의 해소에 대한 기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세계들의 교차로에 우리를 위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폭동의 정동, 분노의 정동, 통치되지 않겠다는 의지는 이 열정들의 표현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펼쳐야 할 가능한 세계들과 줴적 갈라짐들을 포함한다.264 사람들이 주체성 생산에 대해 말할 때, 작품이 아니라 창조 과정이 패러다임으로 나타난다. 생산물이나 결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바로 행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에 대해 우리의 관심이 주어져야 한다. 65 윤리적 시간이 주체화를 프락시스적 교차로로 따라서 자기에 대한, 타인들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내포하는 선택으로 위치 지우고 파악하도록 허용한다.265

[ ] 들뢰즈에게 있어서 근대적 사실이란 우리가 더 이상 이 세계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 타인들, 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신뢰의 붕괴에 의해 열린 구렁 안에 자기, 타인들, 세계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265

[ ] 이제부터, 바로 관계가 신앙 대상이 돼야 한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만 다시 주어질 수 있는 불가능한 것이다. 신앙은 다른 세계나 변형된 세계에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믿을 이유가 필요하다.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와 그것이 감추는 행동과 삶의 가능성들을 믿을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회의주의는 인지적이 아니라 윤리적이다. 정치적으로 막다른 길은 우선 윤리적으로 막다른 길이다. 세계, 타인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위치, 참여, 실험과 관계된 막다른 길이다. 266

볕뉘

0. 랏자라또. 출간이 잦아 구입해서 읽다. 단숨에 읽으려고 했지만, 며칠 걸리고, 밑줄을 옮기는 과정에 저장이 되지 않아 다시 워드하는 번거로움까지 있었다. 말미 워딩이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손님들이 오고, 달리 다른 독서가 맞지 않아 이리 타자에 시간을 보냈다.

1. 이탈리아 사상가는 묘하다. 그람시도 그러하지만 서유럽의 분위기와 다르면서도 우리와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간만에 가타리를 불러내었고, 알랭바디우와 랑시에르의 허전함을 잘 들여다봐주어서 기쁘기도 했다. 숭숭 내용이 빠진 그 무엇을 채우는 듯 싶어 묘한 기분이기도 하다.

2. 말들이 어수선스럽지만 좀더 매끄럽게 순탄하게 만들면 손에 쥘 수 있는 유용한 공구가 될 듯싶다. 푸코도 묘하게 잘 살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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