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셀의 성

[ ] 랭보 - 우리는 환상적으로 될 필요가 있다고, 다시 말해서 스스로를 환상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시인은 모든 감각들을 오랫동안 무한히 추론해가며 혼란시킴으로써 스스로 환상적이 된다. 그는 스스로 온갖 형태의 사랑, 고통, 광기를 추구하여 그것들의 본질만 남도록 모든 독소들을 소멸시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온갖 초인적인 힘이 절박해지고, 온갖 가능성 중에서도 가장 심한 병자, 가장 중벌의 죄수, 커다란 저주를 받은 자, 최고의 학자 - 왜냐하면 그는 미지의 것에 도달했으니까 -가 된다.....시인은 진실로 불을 훔치는 자이다. 그는 인간성과 동물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만든 것을 느껴지고 취급되고 듣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저 너머에서 가져온 것이 형태가 있으면 형태를 부여하고, 형태가 없으면 무형을 부여한다. 언어를 찾기 위해서. 270, 271

[ ] 조이스는 최근까지 늘 그의 등장인물들의 의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만 의식을 재현하는 그의 방법은 등장인물들끼리 말하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방법이다. 조이스의 인물들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 사고하고 느낀다. 조이스 자신이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230 그는 자기의 서랍에서 어구 하나를 빼내어 그것을 혼자 조용히 읊어본다. 230 그것들은 빛깔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점 자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언어들의 전설과 빛깔의 결합보다 그것들의 리듬의 고저를 더 사랑했단 말인가?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옳으리라. 즉 그는 마음이 수줍은 만큼이나 시력이 약해서 빛깔이 다양하고 사연이 풍성한 언어의 프리즘을 통해 진하게 다가오는 세계의 영상보다는 차라리 명쾌하고 단순한 장문의 산문 속에 완벽하게 투영된 개인적인 정서들의 내적 세계에 대한 명상 속에서 더 많은 쾌감을 누렸다. 230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 ] 프루스트 - 그의 현실의 궁극적인 단위들은 각각 독특하고 다시 발생할 수 없는 ‘사건들‘인데....그의 주변인물들도 그들을 변모시키는 과정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늘 변모하고 있으며 결국은 병고나 노환으로 붕괴되어 사라져버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사랑도 우리를 변모시키고 실망시키며, 처음에는 그토록 안정되어보이던 사교계도 그 그룹들을 재편성하고 그 계층들을 흡수하고 변모시킨 것이다.....사건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를 이루어,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서로 상대방과 전체를 내포하면서 상호의존.....주인공의 인생의 여러 시기에 합당하게 그의 서술의 분위기와 어조와 속도를 더욱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168. 169

[ ] 폴 발레리 - 발레리는 관념과 결합된 정서를 드러내고 그것들이 발생한 장면에 파묻혀 있는 두 가지를 다 드러내는 데 있어서 예이츠의 시보다 더욱 완벽하다. 외부세계의 평온한 것들을 개인의 다양한 이해력에 따라 반응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상징주의 시인의 목표이며 승리이다. 사실상 그것들을 두 가지 별개의 일들로 만들곤 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그의 효과인 셈이다. 88

볕뉘.

0. 현란함과 작가에 대한 깊이에 깜짝깜짝 놀란 참이었는데, [핀란드 역으로]의 저자였다니...

1. 상징주의를 개관한다기보다는 문학사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와 시대, 뜨문뜨문 읽은 책들을 이어줄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싶었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저자와 시대, 사상을 잘 엮어서 편안하고 싶게 제시해준다.

2. 제임스 조이스, 프루스트 곁은 다가서다 주춤주춤하고 있는데, 외려 이렇게 뜸 들이고 가는 편이 낫다 싶다. 문학비평 속의 책들을 간택해서 읽고 싶을 정도로 몽실몽실 욕심을 자극한다.

3. 안타깝게도 절판이고, 외서들은 번역이 된 책들이 희귀하다. 조금만 번역되어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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