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 고고학 - 과거와 현재의 정체성 만들기 영남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2
시안 존스 지음, 이준정.한건수 옮김 / 사회평론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영국의 고고학자인 시안 존스(Siân Jones)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다. 솔직히 누구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책에 적힌 설명에 의하면 ‘사회인류학을 비롯한 인접 학문과의 학제 간 연구에 관심이 많으며, 민족지 고고학, 문화정체성과 민족성, 고고학과 현대 정체성의 생산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연구자가 없기에 주변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분야를 공부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저자가 쓴 서문을 간단하게 보면, 그가 박사학위논문을 쓸 때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최근의 민족성 이론에 기대어, 고고학에서 민족성을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고고학에서 민족성을 분석한다고?’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민족성이라는 것을 그냥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문화의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암튼 우리는 민족성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지 않은가. 그래서 좀 어리둥절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뒤에 보니 저자가 논문을 쓸 때에도 역시 주변에서 “현대 고고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는 “왜 그 주제를 연구하려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받기 일쑤였고, 본인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며 혼란스러워하다가 거의 이 연구를 포기할 뻔 했다고 적고 있었다. 이 부분까지 읽으니 필자가 궁금해졌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이 부분은 연구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고고학보다는 인류학이나 사회학과 더 연관이 깊은 주제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하고 말이다. 일단 책을 구입한 동기도 주제가 흥미롭다고 여겨서였는데, 서문에서도 필자의 흥미를 돋우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본문을 읽기 전부터 다소 흥분되었다. 나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본문을 읽기 전에 필자 혼자서 민족성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 우리가 흔히 ‘民族主義’, ‘nationalism’이라고 표현하는 이 단어의 의미는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 유지 ·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 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검색 결과). 그런데 민족주의 혹은 민족성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리고 이러한 민족주의와 고고학과의 상관관계가 무엇이 있을까? 뭐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서 책장을 넘겼는데 앞부분에 역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개략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이 있었다. 아마 저자가 쓴 부분을 번역하고 이에 대한 추가설명을 곁들인 것 같다. 암튼 이게 없었다면 책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또한 역자들이 책 중간 중간에도 각주로 용어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정리한 용어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 정체성(ethnic identity) - 문화적 차이 그리고/또는 공통의 혈통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타자들에 대비되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개인의 주관적 개념화와 관련된 양상을 일컫는다.

민족 집단(ethnic group) - 문화적 차이 그리고/또는 공통의 혈통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상호작용하거나 공존하는 타자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그리고/또는 그들에 의해 구별되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민족성(ethnicity) - 이상에서 정의된 것처럼 문화적으로 구성(construction)된 집단 정체성과 관련된 모든 사회적 · 심리적 현상을 통칭하는 것이다. 민족성 개념은 민족 집단을 정체화하는 과정에서나 민족 집단 간의 상호작용에 있어 사회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이 서로 교차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필자도 읽으면서 뭔 소린지 잘은 몰랐지만, 암튼 머릿속에 대강의 개념 정도는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혹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용어에 대해서 정리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였다. 필자 역시 석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이러한 용어의 정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십분 이해가 갔다. 뒷부분에 나오지만 이사지브라는 학자가 민족성에 대한 사회학과 인류학 분야의 65개 연구 사례를 검토한 결과, 이 중 13개에서만 어떤 식으로든 민족성을 정의하였으며, 나머지 연구에서는 분명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88쪽). 인문과학에 있어서 연구 대상에 대한 용어 및 개념의 정리, 기본 가설의 정립 등은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 기본적이면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이 적용되지 않은 때문인 것 같다. 다시 돌아와서 역사들 역시 저자의 의도에 맞춰 용어 해석에 신중을 기한 흔적이 보였다. 그리하여 ethnic group(민족 집단)은 ‘민족’, ethnicity(민족성)는 그대로 ‘민족성’, nation은 ‘국민’으로 해석하였으며, nationalism은 관행대로 ‘민족주의’로도 해석하고 ‘국민국가주의’로도 해석했음을 밝혔다. 이처럼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드디어 서론 첫 장을 넘겼다.

예상대로 민족주의와 관련한 고고학이 어떠한 행보를 걸어왔는지가 서술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독일의 선사학자였던 구스타프 코신나가 언급이 되었다. 그는 그 자신이 개발한 ‘취락고고학’이라 불렸던 민족적 패러다임을 통해 게르만족의 인종적 · 문화적 우월성에 대해 주장하였다. 그의 연구는 뚜렷하게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게르만족이 선사 · 원사시대에 폴란드, 남러시아, 코카서스 지역 등으로 확산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고고자료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트리거가 ‘대부분의 고고학적 전통은 그 지향점이 민족주의적이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이다(20쪽).

이처럼 고고학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고 영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는 사례가 많았다. 19세기 덴마크에서는 민족적, 목가적 풍경을 구성하는 데 분묘나 고인돌 같은 선사기념물들이 이용되었으며, 워새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독일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식을 재건하는 데 공공연히 나서기도 하였다. 폴란드 고고학자 콘라트 야슈제프스키는 독일의 게르만족 팽창론에 대항하여 슬라브 민족이 유럽 각지로 확산했음을 주장하였고, 프랑스에서는 로마 제국에 대한 갈리아인의 저항이 민족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장하였다. 마사다 유적이 이스라엘 민족의식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표상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국민이 고구려를 동경하는 것과 중국에서 필사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화하려는 동북공정을 실시한 점,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부의 단합과 통합을 강조하기 위해 신라를 중요시 여기면서 경주 일대의 문화유적 조사가 활발히 진행된 것들 역시 이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서론에서 이런 얘기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뭐야? 별거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심오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저자는 과연 특정 유물복합체(혹은 유구까지 포함하여)가 어떤 민족과 일대일 대응한다는 가정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대응하는 민족(혹은 부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안 그런 경우도 있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고학 연구는 그렇게 진행되어 왔음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듣고 보니 그러했다. 어떤 문화적 현상은 그 집단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인종적인 측면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국인들은 누구나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시며, 청바지를 입고, 영어로 된 책을 읽고 힙합 음악을 즐긴다. 그런 그들이 모두 앵글로-색슨계 백인은 아니지 않는가. 어떻게 고고자료를 통해 인종적인 측면을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가 그러한 가정과 더불어 고고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유물에 대한 형식학적 분류 역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를 통해 정해진 형식학적 분류체계에 따라 새로운 유적들은 상대 편년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특수성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스켈레톤 그린 유적을 예로 들면서 기존에는 유물복합체에서 ‘로제트(Rosette) 브로치’가 없는 것은 기원후 25~40년 사이에 취락 성격에 변화(아마도 점유의 감소)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었다고 했다. 이는 스켈레톤 그린 유적이 주변의 인접한 유적과 같은 유물 형식에 의해 재현되는 동일한 발전 유형을 따라야만 한다는 가정 하에 내려진 해석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재삼 비판하고 있다(190쪽 결론 부분). 이와 관련해서 언급되는 것이 로마화 현상인데, 기존에는 단순히 물질문화의 변화상을 두고 로마화의 현상으로 이해하던 것이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로마 문화의 확산과 전파가 아니라, 주변 토착 세력의 ‘필요성’에 의한 적극적인 로마 문화의 수용과 변용, 그리고 각 지역마다 다른 레벨과 규모로 이뤄진 로마화에 대한 이해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마치 동아시아 전 역사를 통틀어 언급되는 ‘조공-책봉 관계’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틀을 제시할 수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3~4세기 무렵, 백제 영역(직접통치영역과 간접통치영역을 포함하여)으로 추정되는 각지에서 발견되는 중국제 청자의 존재를 통한 중국화(아니면 중국과 백제 사이의 조공-사여 관계) 혹은 중국 문화의 주체적이면서 적극적인 수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끊임없이 발견되는 유적으로 인해 기존의 주장이 계속 변화한다.’ 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장의 이론적 틀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또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제 민족성에 대한 개념적 · 이론적 영역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한다. 간추리자면 특정 민족은 외부의 관찰자가 연구한 ‘객관론적’ 접근방식과 내부 소속원들에 의한 자기정의 체계의 과정을 거친 ‘주관론적’ 접근방식을 통해 그 실체가 규명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민족성에 대한 원초주의 이론과 도구주의 이론, 2가지 방법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원초주의 이론에서는 문화적 상징의 중요성은 강조되지만, 문화와 민족성 간의 관계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문화의 특정 측면이 지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단순히 민족 정체성의 심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할 뿐이다. 그와 달리 도구주의 이론은 문화와 민족성 간의 차이에 더 중점을 둔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화와 민족성 간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민족성의 조직적 측면만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집단의 변화하는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조작적으로 이용되는 부수적이고, 자의적인 상징들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러한 장단점 때문에 이 둘을 통합할만한 이론적 틀이 없을까? 에 대한 논의가 있어 왔으며 저자는 부르디외의 실천이론을 거론하고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비투스 개념인데, 이는 필자가 이전에 읽은『인류학과 고고학』에서도 간단히 언급되었던 내용이기도 하였다(그래서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했다). 이 부분은 여러 번 읽어봐도 필자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필자가 나름 이해한 부분만 정리하자면, 저자는 대안적인 민족성 이론에 대해 ‘민족성과 문화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민족성의 구성은 실천의 객관적인 공통성(사회의 관습이나 습득된 지식 등등), 즉 아비투스를 형성하고 또한 아비투스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행위주체의 공유된 잠재의식적 성향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처럼 공유되는 아비투스에 의해 재현되는 기존의 문화적 실재에 민족성이 각인되는 정도는 매우 가변적이고, 주민 집단 간의 상호작용과 권력관계의 특성에 의해 발생되는 문화적 변형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형은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재생산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민족성은 유사성과 상이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정의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즉, 쉽게 얘기하자면 민족성은 한쪽의 입장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아비투스라고 하는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개념인 것 같다(이 부분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인데 이 정도밖에 이해를 못 해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

또한 저자는 책 전반에서 민족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가변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시간이 흐르면 민족성도 바뀔 수 있고, 당연히 고고학적 물질자료 상에서도 이것이 반영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자료 상에 확인되는 민족성 역시 변화되는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기존에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자료의 해석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원삼국시대 마한과 백제의 구분이 가능한지가 여기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마한(을 비롯한 삼한 전체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50여 개국에 대한 뚜렷한 역사, 지역적 경계, 문화적 양상(을 나타내주는 확실한 표지유물이나 유물복합체 등등)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전 시기인 청동기시대와 이후의 백제시기에 속하지 않은 몇몇 특정 유물과 유구가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마한과 백제를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민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단순히 토기의 형식 분류와 묘제의 지역적 분포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앞서 로마화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되었지만, 민족성과 문화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데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저자는 ‘민족성은 고고학 연구의 타당한 주제가 될 수 없다고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문화를 자의적이고 이차적인 역할로 한정시키는 입장에서 민족성을 분석하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식 양자 모두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것 같긴 하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다소 추상적인 ‘민족성’이라는 테마를 잡고 그에 맞춰 기존 연구현황을 재구성(혹은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고고학자들이 과거에 대한 특정한 재현이 특정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방식과, 타자에 대한 특정한 재현의 지배가 집단 내부와 집단 간의 권력 관계에 어떻게 깊숙이 관련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고학자들(또는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사회와 그 이데올로기적 구성의 외부에서 특권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분류와 해석 양식이 집단 간의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 데 관여하는 방식을 검토하고 책임을 질 필요도 있다. 이는 현대 세계의 정치적 정당화의 속성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관계와 전략의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문득 인류학과 고고학이 식민주의의 기반 아래 생겨난 학문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앞서 민족주의 결합한 고고학의 사례에 대해 언급된 것처럼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이러한 현상은 쉽게 확인된다. 그리고 그것이 효과를 거두는 국가가 있기에 이러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고학은 올바른 민족 정체성 확립에 기여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차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면 올바른 영향을 주는 것이 긍정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호작용과 분석 양식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이론적 틀의 확립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필자가 최근에 읽었던 일련의 책들(『환경고고학』,『인류학과 고고학』)과 중첩되는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특히 고고학사(혹은 인류학사)에 대한 부분, 사상적인 부분을 언급한 것들은 분명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집중적으로 관련 내용들을 읽어와서 그런지 생각보다 쉽게 읽혔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읽었던 후배가 너무 어려워서 책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면서 앓는 소리를 했는데, 생각보다는 쉽게 읽혔고 분량도 260쪽 정도여서 크게 부담이 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1번 읽는 것만으로는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100%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1~2번은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박사학위논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라서 그런지 서술방식이 논문을 읽는 듯 한 느낌을 주는 것이 독특했다. 국내에도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엮은 것이 여럿 있는데, 모두 논문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딱딱하다는 느낌을 많이 주곤 한다(뭐 고고학 서적이면 어떤 책이든지 대부분은 딱딱한 느낌을 주긴 하다만...). 그런데 외국서적 중에는 그런 책들을 많이 못 봐서 그런지 조금 신선하기는 했다. 맨 앞에서 용어 정리를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것이나, 어떤 이론을 소개하고 장단점을 분석해서 소개하는 것이나 뭐 전반적인 것들이 다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정 주제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만약 이 책이 단순히 개설서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면 아마 이처럼 민족주의라는 부분에 대해서 심도 있게 접근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번 해 본다. 암튼 그런 부분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주제들로, 이렇게 서술한 내용이 박사학위논문으로서 재구성된다는 것 자체가 많이 인상에 남았다. 이론적인 면, 사상적인 면에서 한국 고고학계는 아직 발달하지 못 했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이런 주제를 갖고 이런 식으로 글을 풀어나가는 것 자체가 좀 쇼킹하기도 하다(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이 책의 내용과 주제가 한국 고고학계의 현 실상과 크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민족주의와 관련된 사항은 그간 한국 사학계에서 많은 논의가 되어왔던 부분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사관이 이러한 민족주의와 많이 결부되었는데,『조선상고사』에서 보여준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한국 상고시대의 거대한 영토를 증명하려는 일부 역사학계(혹은 그를 추종하는 아마추어 역사단체들)의 움직임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하는 것이 이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적다하더라도 민족주의 혹은 민족성이라는 것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민족성에 대한 논의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찰나에 이 책을 읽게 되어 필자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부분은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류학과 고고학
크리스 고스든 지음, 성춘택 옮김 / 사군자 / 200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에는 인류학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려고 한다.
흔히들 인류학은 고고학과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학문처럼 취급되어 왔다. 학교에서도 이렇게 배운다. 미국에서는 고고학이 인류학의 하위 분과로서 동일하게 취급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고 말이다. 고고학 전공 수업에서 배우는 인류학은 뭐 이 정도 선에서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게 전부일까? 국내에도 고고학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는 많다. 당장 고려대학교만 해도 고고미술사학과(대학원은 고고학과 미술사학과로 이원화)가 있으며, 서울대학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충남대학교에는 고고학과만 있으며, 경북대학교에는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그에 반해 영남대학교와 한양대학교에는 인류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상당히 많은 학과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배우는 것들은 모두 비슷한가? 아니면 같은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가?

아마 고고학(또는 인류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궁금증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법도 하다. 이 책은 주인장이 고고학에 처음 눈을 뜨고 흥미를 가졌을 때 이런 궁금증에서 구입했던 책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약 10년 전에 산 책인데 이번에 읽으려고 다시 펴봤더니 앞부분 1/3 정도까지 읽고 말았던 흔적이 있었다. 딱 인류학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시점인데 아마 지루해서 보다 말았으리라. 하지만 이번에 주욱 한번 읽어봤더니 생각보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서 필자 본인도 신기했다. 솔직히 웬만한 개설서를 보면 대개 앞부분에는 學史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지루하기도 하고, 왠지 외워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이 책, 저 책 보다보면 그 얘기가 그 얘기 같고, 여기서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딴 데서는 다르게 얘기한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이 든다(필자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 더군다나 이런 것들은 수업시간에 지겹게 외우질 않는가?(물론 그때 외운다고 얼마나 오래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에『환경고고학』을 읽어서 그런지 상당히 잘 읽혔던 것 같다. 그래서 일단 그때보다는 더 가볍고 즐거운(?) 기분으로 책을 읽었음을 밝히고 싶다.

이 책을 쓴 크리스 고스든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피트리버스박물관 학예연구관이자 대학교수이다. 그리고 인류학과 고고학에 대해서 상당히 폭넓은 식견을 토대로 이야기를 개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을 설명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 그 이유는 고고학과 인류학이 지속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기 때문이다 -

엥? 이게 뭔 소리지? 그렇게 밀접한 관련성을 맺어왔는지 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대강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고학은 때론 인류학과, 때론 민속학 등과 연계하여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는 인류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방법론적인 측면이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유사한 점도 많았으며, 같은 점 혹은 다른 점도 많았다. 즉, 고고학이 인류학인지, 인류학이 고고학인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지 그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경우가 많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러다보니 정확하게 양자의 경계선을 그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차라리 전혀 상관없는 통계학을 설명하는 것이 고고학자에게는 더 쉬울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쉽게 와 닿았다(알다시피 통계학은 고고학에게 있어 인류학만큼 친숙한 분야가 아님에도 말이다). 암튼 머리말에서 이미 저자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를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1. 영국의 말리노프스키가 사회인류학을 발달시키면서 의도적으로 고고학과 인류학의 차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2. 고고학은 인류학적 방법론과 생각을 도입했으나, 역으로 고고학적 결과나 이론의 수출은 빈약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상호 교환에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3. 고고학은 과거의 긴 시간대를 다루며, 인류학은 현재에 가까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대를 다룬다. 즉, 인류학은 의미 구조를 현재 존재하는 상태대로 관찰할 수 있으며, 고고학은 의미 체계의 발달과 의미가 생산되는 일반 환경에 대한 긴 시간대에 걸친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뭐 이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류학사와 고고학사를 나열하고, 유럽(특히 영국을 중심으로)과 미국, 더 나아가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어떻게 인류학과 고고학이 관계를 맺어왔는지 서술하였다. 먼저 목차를 가볍게 한번 살펴보자.

제1부 : 학사(Histories)
1장 인류학적 고고학과 고고학적 인류학
2장 식민시대의 고고학과 인류학
3장 고고학과 인류학의 확립 : 현지조사의 역할
4장 진화, 사회, 문화인류학 : 다양한 인류학 패러다임
5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 신진화론, 마르크시즘, 구조주의

제2부 : 현재의 문제들(The Contemporary Scene)
6장 젠더, 섹슈얼리티, 실천
7장 물질인류학 : 경관, 물질문화, 역사
8장 탈식민시대의 세계화와 민족성 

보면 알겠지만 전체 370쪽 가운데 1부가 210여 쪽을 차지하고 있다. 상당한 분량이다. 그리고 2부에서는 이제 저자가 하고 싶은 얘기들을 하고 있다. 현재 인류학의 상황이라든가, 연구경향이라든가, 앞으로 인류학과 고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라든가, 본인의 주장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그래서 2부에는 인류학적인 내용이 주로 많으며, 그나마 1부가 오히려 읽는데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이 고고학자들에게 인류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개설서이기 때문에 상관없을 것 같다. 다만,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2부를 읽으면서 ‘무슨 소리지?’ 하면서 책을 덮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해 본다. 이전에 필자가 1부를 보다가 책을 덮은 것처럼 말이다.

1부 1장에서 저자는 인류학적 고고학, 고고학적 인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 머리말에서 저자가 했던 단언과 연결시켜 이해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단어일 것이다. 확실히 초기 고고학은 오히려 인류학에 가까웠으며, 순수한 유물과 유적에 의한 역사 복원이 시도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고고학과 인류학은 분명히 식민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라는 세계가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고 자신들의 기준으로 세계를 재단하기 위해 고고학과 인류학을 발달시켰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스페인의 탐욕에 찌든 약탈자들이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을 멸망시키지 못 했다면, 고고학이나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아예 생기지 않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저자는 북아메리카(미국)와 영국의 인류학적 고고학에 대해 언급하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가볍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1부 2장에서는 애쉬몰리언 박물관과 피트리버스 박물관을 예로 들면서 유럽의 개념, 식민시대의 두 학문적 발달에 대해 서술한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학사는 3장부터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싶다. 인류학하면 항상 등장하는 말리노프스키를 필두로 보아스, 스펜서와 길런(이 둘은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보아스까지는 고고학에서도 언급해서 아는데...), 해든과 리버스(리버스는 또 안다)의 현지조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에 있어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인류학 방법론과 현지조사(고고학으로 치면 현장조사 혹은 야외조사) 절차를 고안하여 사회인류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확립하였다. 양자는 이미 체계적으로 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분화되기 시작했고, 진화적인 경향이 쇠퇴하면서 양자를 결합시킬 이론 구조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말리노프스키의 등장으로 완전히 구분되기에 이르렀다. 말리노프스키는 현지에 직접 들어가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를 조사하는 ‘참여관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사자 개인의 성향과 주관적인 생각, 해석의 문제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는 그의 뒤를 이은 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필자가 볼 때 그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해든과 리버스인 것 같다. 해든은 심리학, 언어학, 형질인류학, 사회인류학 등의 학문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다학문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삼았으며, 리버스는 계보적 방법(genealogical method)을 개발하여 조사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는 모든 생활양식에 친족체계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거주, 혈연관계, 토템, 사람의 생애, 인구, 형질인류학, 이주, 언어 및 집단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정리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류학은 고고학과 완전히 다른 방법론과 풍성한 자료를 갖추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든 차일드, 그라함 클라크 등에 의해 초기 고고학 역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이론적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고든 차일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여러 고고학 정보를 종합하여 사회과정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였고, 진화적인 틀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역적인 다양성과 창조성을 강조하였다(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르크시스트이기도 했다). 또한 그라함 클라크는 기존의 형식학적 관점을 버리고, 문화를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았는데(그의 이러한 견해는 영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지 못 하였고 오히려 미국 인류학의 관심을 끌어 이후 레슬리 화이트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를 위하여 과거 환경의 복원이 필수적이며, 환경 복원이야말로 인류 생활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것임을 역설하였다.

두 학문은 유럽과 미국에서도 각자의 행보를 걸었는데, 영국에서는 이론의 발달로 많은 가능성을 열었으며, 1970년대 말부터 고고학과 인류학은 긴밀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론과 방법론상 양자가 가깝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고고학 교육과 조사 또한 인류학과 안에서 이뤄졌다. 이는 미국 고고학이 여전히 진화적인 틀 안에서 연구된 반면(유럽은 아니었지만), 인류학은 진화를 멀리하고 문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보면 조금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유럽(다 자세히 말하면 영국)은 오히려 사회인류학의 독자적인 방법론(현지조사)을 재평가하면서 그 학문을 인정해주면서 더 밀접한 연관성을 맺었는데, 미국은 양자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아 인류학 안에 뭉뚱그려서 모여 있으면서 왜 밀접한 연관성이 없을까? 하고 말이다. 간단하다.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듯이, 서로 상대방의 실체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 확실하게 대응할 수 없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라는 말 있지 않은가? 사상적인 발달이 더디다고 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학문이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 춘추전국시대때 중국이 크게 발전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4장으로 넘어가면 고고학도라면 누구나 수업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법한 사람들이 줄줄 나온다. 진화주의를 표방한 모건과 타일러, 앞서 언급했던 해든과 리버스,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 과대전파론을 지나 기능주의의 에밀 뒤르켐,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까지. 5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신진화론(신고고학까지)의 레슬리 화이트, 줄리안 스튜어드, 살린스와 서비스, 빈포드, 그리고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마르크시즘과 구조주의 등등. 1부의 대미를 장식할 내용들이 약 100쪽에 걸쳐 주욱 서술되어 있었다. 이 많은 분량을 필자가 1~2개의 단락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필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評을 마치려고 한다.

다윈 이후 진화주의는 18~19세기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진화주의는 유용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진화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며, 최근에도 다윈을 재평가하기 위한 학술적 움직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모건과 타일러처럼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 역사를 재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너무 단선적인 발전방향만을 언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전파론은 흔히 진화론과 반대개념으로 많이들 알고 있지만, 해든의 주장처럼 양자는 상호 보완적으로 봐야 적절할 것이다. 거기에는 보아스의 상대주의와 문화사적 접근방법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그는 문화적인 특수성과 지역사의 중요성을 뛰어넘는 이론적인 틀을 만들지 못 했다는 약점이 있다. 즉, 나무만 자세히 보느라 정작 큰 숲을 외면해버린 셈이다. 그리고 기능주의 또한 중요하지만 마치 전쟁사에서 기술결정론이 비판받는 것처럼(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이 항상 기술적으로 뛰어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기동성을 살린 전차부대를 육성했고, 프랑스는 육중한 장갑과 파워를 강조한 전차부대를 육성했으며 결론적으로 전자가 승리했다) 효율성과 기술적인 측면, 유물론적인 측면만 중요하다고 강조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이 초기 고고학이 가진 결점, 초기 인류학에서 간과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런 상황에서 신고고학의 등장은 아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당시 젊은 학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건과 타일러의 후계자로 자타가 공인한 레슬리 화이트는 에너지의 효율성을 언급했으며(문화는 단위 에너지 양의 증가, 곧 에너지의 효율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한다는 주장을 했다. 마치 신흥대국이 그 성장에너지를 발판으로 급격한 팽창주의 노선을 걷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전 인류 혹은 전 세계에 적용 가능한 일반진화의 틀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에 비해 줄리안 스튜어드는 환경에 따라 문화적 반응이 달라진다는 소위 ‘문화생태학’을 주창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그라함 클라크, 루이스 빈포드, 켄트 플래너리와도 상관성이 깊다. 살린스와 서비스는 뭐 너무나 유명해서 부언이 필요없을텐데 그들은 일반진화(화이트의 주장)와 특수진화(스튜어드의 주장)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고 주장하며, band-tribe-chiefdom-state에 이르는 진화단계를 설정하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물론 요즘까지도 유효하며, 루이스 빈포드나 콜린 렌프류 등에 의해 끊임없이 수정 · 보완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진화의 한 모델일 뿐, 특수 진화와는 별개로 살펴봐야 할 진화모델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 경제에 치중한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인류사를 살펴본 고든 차일드나 마빈 해리스 등도 거론은 되고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종합적인 시각에서 인류사를 고찰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역사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自問을 구한다. 우리는 인류사를 관통할만한 그러한 일반적인 틀(혹은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글쎄~하지만 반드시 그런 일반적인 틀이 필요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런 사상적 · 이론적인 지식이 일천한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다양한 방법론으로 접근해서 각각의 방법론에 걸맞은 모델들을 다양하게 마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암튼 1부에서는 대강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그리고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현재의 인류학에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내용이 조금 벅차기는 하다. 그래도 읽으면서 흥미를 가졌던 부분들을 몇몇 거론하도록 하겠다.

먼저 요즘에는 일상적인 행위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주목받는다고 했다. 우리 삶에 있어 너무도 평범하고 기본적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러한 목적으로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 새로이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시 아비튀드(habitude : 버릇이나 습관)와 엑시스(exis : 획득된 능력이나 재능)로 나뉘는데 바로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도 아비투스를 뭐라도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비교사례를 들어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뭐 쉽게 말하면 어떤 한 사회에 속해 그 안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나 능력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에서 다루는 범주와도 맞물리는 것 같다. 지극히 추상적인, 물질자료로 파악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인 범위이니 말이다. 이는 인류학을 인류학답게 만든 현지조사로도 파악하기가 어려운 주제가 아닐까 싶었다.

공간분석, 즉 경관에 대한 언급도 흥미로웠다. 지도를 통한 데카르트식 공간분석은 1960년대 신지리학과 신고고학에 바로 적용되었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취락의 공간적인 배열과 유물의 분포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현재 한국고고학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접근법으로서 주로 국가단계 이전의 청동기시대 취락연구에 적용하고 있다(아마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대단위 취락이 많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학에서도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니 재밌었다. 하긴 초기 인류학자들 역시 원시사회를 직접 방문해 참여관찰을 하면서 그들의 문화, 사회 등을 서술할 때 이런 식의 해석을 하긴 했으니 말이다. 다만, 요즘에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분명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또한 저자는 사회적 성 구분인 젠더와 함께 종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다뤘다. 인류는 처음부터 각기 다른 기원과 각기 다른 형질 및 정신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다원발생론은 최근 문화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단일발생론적인 시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러한 종족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즉, 일련의 고정관념이나 획일화된 시각이 최근에는 많이 지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식민화가 인류학에 미친 영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식민주의가 사라졌으며, 우리는 탈식민세계에 살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은 식민주의의 산물로서 그 안에는 여전히 식민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스스로 의구심을 자아낸다. ‘만약 식민주의가 전 세계적인 맥락 속에서 서양의 문화 및 이론적인 장치가 형성된 것이라면, 우리 서양인은 사회 분석에서 얼마나 많은 원죄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어떤 사회이든지 서로 다른 두 존재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제국과 주변의 정복된 피정복민들처럼,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그 사위국으로 편입된 고려처럼 말이다. 저자는 고고학과 인류학 역시 이처럼 서로 대화하고 비교하면서 같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언제쯤 본격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론적인 틀이 마련되고 사상적인 측면이 완비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본인 스스로도 장담할 수가 없다. 어려운 내용도 많이 있는데다가 필자가 읽은 인류학 책이라고는 군대에서 뭣도 모르고 읽은『황금가지』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인류학에 대한 필자의 이해가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고학과 인류학이 오랜 시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왔으며, 앞으로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드는 것 같다. 원저의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경고고학
키스 윌킨스.크리스 스티븐스 지음, 안승모.안덕임 옮김 / 학연문화사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책 구입한지는 2년이 넘었고, 그 와중에 책을 폈다, 닫았다 한지도 역시 2년이 넘었다.

예전에 테르모필레 전투가 벌어진 戰場을 고지형 분석과 연결해서 소개한 글을 간략하게 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어떠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구체적으로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리하지는 못 했다(당연한 말이다. 완독하지 못 했으니까 -.-;). 어쨌든, 이번 기회에 큰 맘 먹고 완독한 후에 서평을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간 책을 꾸준히 읽지 못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책의 내용이 어려웠고, 또 생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뭐 조금 안 좋게 말하면 비전공자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소리로만 들릴 내용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으로 해두자(실제 책 뒷부분 ‘역자의 변’ 부분을 보면 역자도 막상 번역을 해 보니 책 자체가 지질고고학으로 많이 편중되었으며, 자연과학적 배경이 없는 일반 고고학도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느낌이 들은 책이었다는 심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필자도 근 20여일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읽었으니 뭐 할 말은 없다.

먼저 목차 한번 간단하게 살펴보자. 

1장. 환경고고학 입문
머리말
'환경고고학' 정의
환경고고학의 발달
환경고고학자의 연구자료
프럭시 자료에 대한 해석
생태학과 고생태학
고대 생물유체의 잔존
요약 

2장. 고환경 : 고고학적 경관의 연구
'환경'의 의미
고지형에 대한 이해
암석학과 광물학
구조
해수면 변화
하천은 무엇인가
과거 생물상의 복원
비해산 연체동물 기록에 대한 해석
요약

3장. 고경제 : 생물학적 증거로 복원한 고대 생업과 생산
머리말
경제의 본질
생산과 소비
농업의 집약화
고경제의 생물학적 증거
식물고고학
동물고고학
분자생물학적 연구
경제적 질문에 적용된 생물학적 증거
요약 

4장. 환경고고학과 이데올로기
자연환경과 사회적 이데올로기 및 경제와의 통합
환경에 존재하는 자연계의 정령과 신
신화, 은유 그리고 자연의 순환
신을 위한 공물과 의식
소비 이데올로기 

5장. 환경고고학 : 이론가 없는 이론
과학으로서의 환경고고학
패러다임의 창조와 구체화
과학적 고고학
과학인가 과학적 소설인가
이론으로 본 환경고고학의 미래 

6장. 환경고고학의 계획, 해석과 집필
머리말
환경고고학의 계획
텔 엘-아마르나 근로자 마을
환경고고학의 집필

딱 봤을 때 이 책은 ‘환경고고학이 뭔지 소개하기 위한 개론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목차를 한번 훑어봤을 때 크게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국내 고고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고,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도 이런 환경고고학적인 측면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 역시 이에 대한 관심은 적지 않았다. 물론 심각하게 공부해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을 통해서 환경고고학이 뭔지 좀 자세하게 알고 싶기도 했고, 환경고고학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필자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어쨌든 다소 어렵게만 여겼던 환경고고학에 대해 대강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추후에 공부하듯이 2번, 3번 계속 읽어봐야 할 것 같지만 일단은 이번에 1번 완독한 대강의 느낌만 적어보고자 한다.

 

솔직히 ‘1장. 환경고고학 입문’은 그닥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기에 환경고고학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세히 읽어봐야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라 불라’ 교과서적인 내용이 많아지게 되었고, 재미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눈여겨볼만한 부분들은 분명히 있었다. 환경고고학이 신고고학의 이론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거나, 환경고고학이 과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신뢰하기 어려운 학문적 위치를 지녔다는 내용 등은 흥미로웠다. 또한 필자가 수업시간에 배우거나, 책(물론 관련 전공서적)에서 읽었던 것 이상으로 환경고고학의 범위가 넓고, 오늘날 여러 연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환경고고학이 일반적으로 고대의 경관, 즉 사람이 먹고 자고 생활했던 입지 혹은 경관에 대한 내용만 다룬다고 알고 있었지, 고경제를 분석하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솔직히 후자는 전자를 연구하면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부분으로만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 ‘2장. 고환경 : 고고학적 경관의 연구’는 전반적으로 재밌게 본 부분이다. 그만큼 익숙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학교 수업 시간이나 기존의 고고학 서적에서도 접했던 내용들이 나온 만큼 이 부분은 복습하는 차원에서 차근차근 읽어봤다. 하지만 ‘과거 생물상의 복원’부터 끝부분까지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고식생 연구, 꽃가루 분석, 화분분석을 위한 시료채집, 꽃가루 아시료의 실험실 분석 등등 111~185쪽에 해당하는 내용은 관심분야도 아니었고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위한 내용 전개여서 필자의 독서 의지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물론 관련 전공자가 보면 개설서로서 잘 정리된 내용을 접할 수 있겠지만 일반 독자들이나 비전공자들에게는 지루한 내용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딱정벌레를 중심으로 하는 고고곤충학에 대한 내용은 흥미로웠다. 딱정벌레는 곤충 중에서 가장 다양하며, 다른 목의 유체보다 고고학적 퇴적층에 더 잘 보존되며(외골격이 갑옷처럼 딱딱해서), 현대의 딱정벌레 생태가 다른 곤충 목보다 더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주요 연구대상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각다귀과에 대한 연구도 증대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곤충들을 갖고 기후와 서식지를 복원하는데, 일부 곤충 종은 매우 한정된 특정의 서식지에만 서식하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 영역 복원에 특히 효과적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딱정벌레 중 Tipnus unicolor는 인간의 오물과 섞인 부패 중인 밀짚 속에서만 사는데, 중세시대의 도시 환경에서 흔했다고 한다(하수처리 방법의 변화로 오늘날에는 드물단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면 화장실 유구의 흔적을 찾는데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환경 복원을 위한 시료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곤충분류군의 기원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발견된 종이 저장 농산물의 해충인지, 인간 또는 동물의 기생충인지, 주거 쓰레기에서 기원한 것인지, 또는 날려들어 온 배후 곤충군인지 말이다. 암튼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견된 준화석 곤충에 대한 연구는 주거, 생업, 기술 활동 복원을 위한 매우 강력한 도구라고 역설했는데 필자 역시 이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150쪽의 도 45를 보면 인간생활과 곤충이 얼마나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저자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멋진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곤충만이 생활 상태를 이렇게 상세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해주며, 장인으로 구성된 부유한 사회를 암시하는 멋진 유물과는 상반된 인상을 제공해준다.

이 책에서 필자가 굉장히 주의 깊게 본 부분이 바로 ‘3장. 고경제 : 생물학적 증거로 복원한 고대 생업과 생산’이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환경고고학이 고경제를 복원하는데 주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일단 ‘분자생물학적 연구(Biomolecular studies)’에 대한 내용은 지루한 설명뿐이어서 읽는데 힘들었다. 하지만 ‘경제적 질문에 적용된 생물학적 증거’ 부분은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농업활동을 각 과정별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은 고고학적 연구사례, 방법론 등을 나열한 것이었는데 굉장히 이채로우면서도 흥미로웠다. ‘경작에 의한 생산, 경작지 입지, 이전의 토지 이용과 경작지 개간, 거름주기, 경작과 제초, 작물의 파종, 수확’으로 각 과정을 분류한 저자들은 굉장히 세세한 부분까지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어 읽는 내내 ‘와아~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예를 들어 거름주기의 최상의 증거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극젱이와 쟁기로 땅을 갈았을 때 그 안에서 어떤 시료들을 채취해야 하며 어떤 결과들이 나타나는지 뭐 이런 것들 말이다. 심지어 수확에 대해서도 이삭을 손으로 따는 법, 도구로 따는 법, 작물 전체를 뿌리째 뽑는 법, 낫으로 줄기를 베는 법 등으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이런 부분은 국내에서도 연구 사례가 있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된 것은 본 적이 없어서 그 점이 또 흥미로웠다. 물론 이외에도 작물 가공과 동물 생산에 대한 부분도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었는데, 현장에서의 조사가 보다 세분화되고 디테일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같이 ‘현장에서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정말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니 말이다.

4장부터는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적인 내용, 학사적인 내용, 이론적인 측면 등이 서술되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책의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읽는데 큰 부담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고학도라면 학교 수업 시간에 한번쯤은 다 들었을 법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4장. 환경고고학과 이데올로기’는 전체적으로 인지과정주의 고고학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인류학이나 민속학적인 내용도 많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해석의 범위’이기 때문에 한국 고고학계와의 시각 차이나 수준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A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B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고자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러 자료들을 그냥 가장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수준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딱 이것이 正論이다,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재밌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암튼 환경고고학을 통해 어떤 사실들을 추론하고, 어떤 것들을 밝혀낼 수 있는지 서술한 부분이어서 비전공자라 하더라도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그 뒷부분은 전체 고고학사 중에서 환경고고학과 관련된 학자들과 이론들에 대해 총괄적으로 정리를 하고 있어 1번 더 공부한다는 생각에 읽으니 괜찮았다. 특히 ‘과학인가 과학적 소설인가?’라고 하는 부분은 우리가 하는 고고학의 성격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게끔 했다. 또한 실질적으로 환경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한 연구계획서(예시)가 서술되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적용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뭐 일단은 관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연구자도 적고, 디테일하게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어려운 현장 여건도 있고 하니깐 말이다. 진짜 작정하고 환경고고학적인 연구를 처음부터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북미와 영국에서는 완전하고 설득력 있는 사업 계획서 없이 고고학 조사가 진행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사업 계획서는 흔히 외부 전문가의 정밀한 심사를 받는다고 하는데...우리나라는 언제쯤 이런 시절이 올까 싶다. 하지만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은 전통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지만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환경고고학이라는 것이 보편화되고 관련 전공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바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텔 엘-아마르나 근로자 마을’과 ‘차탈휘익’ 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말 유적에서 확인된 수많은 시료들을 갖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유적에서 수습한 토기편과 각종 유물들, 그리고 여러 유구들을 조사하는 것만으로는 그 유적에 대해서 50% 정도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에 거론된 대부분의 사례들이 국내 사정과는 맞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방법론적인 측면, 그리고 인식의 측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것 같다. 아마 우리나라에 위에서 언급한 2개의 유적이 확인되었을 때, 과연 이 책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다양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다.

전반적으로 책에 대한 소감을 말하라면 어렵다. ‘역자의 변’에서도 뭐 이런 비슷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평소 쉽게 접하지 않는 부분인지라 이는 저자들의 책임도, 역자들의 책임도 아닌 것 같다. 또한 책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이 유럽 일부분에 국한되어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 일부가 포함되어 있어 그 사례가 국내 사정과 적합하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었다. 이는 아마도 동양의 고고학계와 서양의 고고학계가 학풍이 많이 다르기 때문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한편, 이 책 뒷부분에 환경고고학과 관련된 참고문헌들이 죽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그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소의 웹사이트까지 기재되어 있다), 역자들이 책 중간 중간에 원서의 내용과 상관있는 국내 연구들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 그 점이 아주 좋았던 것 같다.

나중에 필요한 부분은 또 찾아보겠지만, 두고두고 읽으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다른 독자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책 전부를 다 읽어보라고는 권하지 못 하겠고, 관심이 있는 부분은 이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딱 보름 만에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것 같다. 석사논문 제출 날짜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음에도 이렇게 이 책의 서평을 쓰는 이유는 논문을 쓰다가 중간 중간 쉬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이 책을 읽을 정도로 이 책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강추!’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책이다. 일단 얘기하고 싶은 것은 ‘상’권을 읽었을 때의 흥분과 전율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筆力에 의해 필자가 감동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역사적 지식과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통찰력은 정말 본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중간 중간 약간의 소설적 상상력이 가미된 역사해석도 물론 있지만 그것이 결코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역시 그녀가 책 전반적으로 신뢰할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서양사 전공자들 중에 이만한 필력을 가진 大家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런 분들이 이와 같은 수준의 책이나 연구 성과를 내놓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보고 열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설사 그 독자가 관련 전공자라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배은숙이 쓴『강대국의 비밀』을 처음 봤을 때 ‘아! 우리도 드디어 로마사 관련 전공자가 책을 썼구나~’하는 마음에 당장에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느낀 점은 ‘뭐야! 이거 Adrian Goldsworthy의 The Complete Roman Army와 내용이 거의 유사하잖아! 번역서 아니야 이거!’였다. 그만큼 외국 연구 성과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고대 그리스-로마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놓은 대중서적이나 연구서적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암튼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녀의 이 책이 정말 재밌다는 사실이다.

그럼 본론으로 돌아오자. 일단 (상)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서 여기에서는 그렇게 할 얘기가 많지는 않다. 다만, 주인공도 바뀌고, 내용도 바뀌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을 잠깐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하)권이 (상)권에 비해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주인공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상)권에서 지중해를 무대로 활약하는 수많은 해적들이 아무리 코르사르였다지만 주변 국가에서 보기에 그들은 해적일 뿐이다. 당장 우리 땅을 침략해 사람들을 잡아가고 물건을 빼앗아가고 지나가는 우리 배를 약탈해가는 해적이 눈에 보이는데 그들이 피라타인지, 코르사르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직함을 받게 된다. 그것은 바로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이다. 해적이 왜 갑자기 해군이 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해상전력이 강하지 못한 투르크가 해적을 해군으로 조직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상비군 전력으로 운용하면서 해상력을 장악하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해적의 두목을 ‘해군제독’으로 임명하고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만 달라졌다. 어쨌든, 해적의 위상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야말로 제 세상 만난 것처럼 해적들은 지중해를 활개치고 다니게 된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헉! 그럼 이제 정말 난리 났네~예전에 해적 신분으로 분탕질하고 다닐 때도 난리였는데 이제는 아예 투르크 해군이라는 직함까지 얻고 공식적으로 해적질을 다니면 유럽 사람들은 정말 큰일 났구나~’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당시 투르크가 술탄 메메드 2세(1451~1481)-바예지드 2세(1481~1512)-셀림 1세(1512~1520)-술레이만 1세(혹은 술래이만 大帝 : 1520~1566)로 이어지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유럽에서도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결코 투르크에 비해 뒤지지 않는 해군력을 보유하면서 지중해 바다를 누볐기 때문이다. (상)권에서 언급했지만 당초에는 미약하기 그지없던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들이 이 시기가 되면 수백 척의 범선과 갤리선을 보유하고 지중해 바다를 당당히 활보하던 시기였으니 해적들이 기고만장해진 것과 맞물려 유럽인들 역시 콧대가 높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빅 매치’가 가능해진 시기가 됐다는 소리다.

이 시기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적자생존의 법칙만이 남아있는 지극히 인간적 군상들이 밀집해 있는 사회로 변모해간다. 로마 교황의 권위는 바닥을 치고 파문이라는 신의 대리인이 내리는 무시무시한 선언은 콧방귀만 이끌어 낼 뿐이었다. 프랑스, 에스파냐, 헝가리 등 유럽의 강대국들이 각자 영토국가로 발전해가면서 투르크 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맞섰다. 그 사이에서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위치를 절감하고 더욱더 종교와 민족, 국가와 사회를 초월한 등거리 외교에 목숨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와 투르크 동맹에서 극에 달하는데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에스파냐와 극렬하게 대립했던 프랑스는 투르크와 군사동맹을 맺어 유럽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다. 베네치아가 비록 욕을 먹으면서도 경제동맹은 맺지만 군사동맹은 결코 안 맺었었는데 프랑스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투르크가 동쪽에서 치고 들어오고 프랑스가 유럽 각지에서 에스파냐를 공격해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의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욕 먹으면서 이룬 동맹도 헛되고 말았으니, 전설적인 해적 두목(훗날 최초의 투르크 해군제독으로 임명된) 바르바로사가 ‘국빈’으로 초대되어 프랑스에 머물면서 온 유럽을 제 집처럼 분탕질하고, 투르크의 군사행동은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배상금이라 해야 하나? 아니 작별선물이 더 낫겠다. 무려 7만 두카두나 되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지불하고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해적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욕 먹고, 돈 버린 셈이다.

이 시기에는 몇몇 유명한 해적 두목들이 등장하는 것이 볼 만하다. ‘바르바로사’를 비롯해서 ‘유대인 시남’과 ‘투르구트’, ‘울루치 알리’까지. 저자는 당시 투르크의 인재 등용 범위가 상당히 개방적이라는 얘기를 꺼냈다. 맞는 말이다.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기독교를 믿었던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금은 알라의 가호를 받으며 이슬람의 집을 넓히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사인데 말이다. 물론 정통 이슬람파가 아니므로 사회적인 제약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 당시 마녀 사냥이나 화형, 구교와 신교의 대립 등으로 혼란스러운 기독교 사회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능력만 있으면 성공하는 사회와 능력이 없어도 신분과 지위, 명성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있다면 어느 사회가 더 빨리 성공하고 발전할까? 그래도 유럽은 다행이다. 베네치아가 기독교를 믿지 않고 이슬람교라는 종교의 교리에 보다 친밀감을 느껴 행동했다면 유럽의 바다는 과연 누가 지킨단 말인가. 그리고 해군을 조직적으로 정비하지 않고 안일하게 생각한 투르크 역대 술탄들의 성격 역시 유럽 사회를 지키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빨리 끓은 냄비가 빨리 식는 것처럼 투르크 해(적)군은 한동안 지중해를 제 집처럼 활보하다가 일순간 얻어맞기 시작한다.

몰타기사단(로도스기사단의 나중 이름)은 이슬람 해적과 똑같은 짓을 하고 다녀(이슬람 배 약탈, 이슬람 애들 노잡이 등 노예로 쓰기, 이슬람 물건 약탈하기 등) 이슬람 애들을 못살게 굴었고, 눈에 불을 켜고 다니면서 바다에서 만나면 싸움걸기 일쑤였다. (상)권에서부터 나오지만 이슬람 해적들은 규모면이나 기동성면에서는 유럽 국가들을 압도했지만 장비나 항해기술, 조선 수준, 해상전투 능력 등은 한참 모자랐다. 그런 약점을 간파했기에 이 시기 유럽의 해군들은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상초계업무와 함께 직접 원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바다 위에서의 해상전 뿐만 아니라 상륙전과 진지 점령전까지 병행하면서 말이다. 불과 백여 년 전에는 생각도 못할 일을 유럽 국가들이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파냐, 몰타기사단, 교황청 해군, 제노바, 베네치아 등등 수많은 국가들이 이른바 연합함대를 여러 번 결성해 직접 해적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戰士와 軍士의 능력 차이가 전투에서 현격하게 드러났다. 비록 투르크의 정예병인 ‘예니체리’까지 동원된 대규모 전투들이 벌어졌지만, 규모나 전투 능력적 면에서 순수한 군인들로 이뤄진 군대와 정규군과 비정규군(해적 혹은 용병, 기타 뜨내기들)이 섞인 군대는 차원이 달랐다.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느냐, 아니면 일단 불리하면 도망갔다가 다시 이해관계에 따라 모여 싸우느냐는 마인드는 천지차이니까 말이다. 투르크가 왜 해군을 그렇게 해적에만 의존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물론 돈이 많이 드니까, 혹은 지금 당장 결과를 보고 싶으니깐 단기적인 투자에만 의존한 것이겠지만 이후 고구려와 백제를 대규모 해군력으로 제압한 당을 보면 투르크가 그 정도의 정복 욕구는 없었던 것 같다. 뭐 한편으로는 당 태종의 정복 야욕이 술레이만 대제의 그것을 압도하고도 남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해적의 본거지들이 하나둘씩 까이고 에스파냐는 거기에 진지를 구축하고 눌러 앉는다. 그리고 방어만 한다. 저자가 책 뒤에 부록으로 실은「민족에 따라 다른 해적 대책」부분을 보면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로마제국은 해적을 물리적으로 절멸하는 동시에 그들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그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켜 농지를 주고 생계를 해결하게 했다. 조선 초기 해상세력을 억지로 내륙에 정착시켜 농경을 장려한 것이 떠올랐다. 암튼 해적은 근절됐다. 그와 달리 베네치아 공화국은 로마처럼 강력한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자국 선박의 사활이 걸린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만 일단 장악한다. 그들은 해적들의 본거지를 장악하는 대신 그 곳에서 신선한 물품을 보급 받고 선박수리소를 세워 중고령층의 고용을 보장하는 한편 그 동네 젊은이들을 갤리선 노잡이로 채용한다. 로마와 약간 다르지만 상업 활동으로 먹고 사는 사람답게 경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하지만 에스파냐는 정말 특이했다. 그들은 항구 바깥의 곶 위에 세워진 요새를 장악하고 해적선의 출입을 감시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저자는 비판한다. ‘마치 자신들이 잘났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 같다.’ 고 말이다.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에스파냐는 비록 수년~수십 년밖에 차지하지 못 했지만 어쨌든 북아프리카 곳곳에 자신들의 요새를 설치하였고, 지중해에는 이슬람 선박만 보면 어떻게 못 해서 안달이 난 몰타기사단 애들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가 베네치아 해군은 투르크 해적들이 감히 건들지도 못 하는 대상이었으니 예전에 지중해를 주름잡던 투르크 해적들이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다. 거기다가 술레이만 대제가 야심차게 수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한 자그마한 몰타 섬(몰타기사단의 근거지)이 공방전에서 승리를 하면서 투르크 해군은 예전의 위상을 되찾지 못 하는 듯 했다. 그렇게 술레이만 대제가 갔다. 그리고 전혀 술탄이 될 줄 몰랐던 그의 둘째 아들이 셀림 2세로 즉위하였다(첫째 아들인 바예지드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으로 죽었단다). 평생 부유한 왕자로서 쾌락에만 탐닉하던 셀림 2세가 뭘 할 줄 알았겠는가.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대외원정의 화려한 승리로 메우려고 한다.

그리고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기로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하지만 저자는 얘기한다. 베네치아 영토가 된지 100여 년 동안 키프로스 섬은 최고 명주의 지위를 얻은 포도주를 생산했지만 과연 베네치아인이 경영하지 않고 투르크인이 경영했다면 그렇게 됐을까 하고 말이다. 마치 고려청자가 원 간섭기를 받기 전에는 국제교역에서 최고의 상품가치를 지녔지만 원이 유라시아를 하나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더 이상 최고의 상품가치를 얻지 못 했던 것처럼 투르크인이 키프로스 섬을 공략하면 더 이상 그 포도주는 최고 명주가 안 됐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 같다. 암튼 이 간단한 이유 때문에 셀림 2세는 10만 명이 넘는 대군과 200척이 넘는 배를 집결시키고, 이 결심은 투르크와 줄타기 외교로서 돈벌이에 활용한 베네치아를 결국 기독교 사회로 돌아서게 했다. 마치 미국 상선을 U-보트 작전으로 침몰시켜 단기적인 이익만 챙기려던 독일이 결국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지닌 괴물을 적으로 돌려버린 것처럼 말이다.

키프로스는 버텼다. 수천 명의 방어군이 10만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유럽의 연합함대가 결성됐다. 베네치아 110척, 에스파냐 본국 14척, 에스파냐 지배하의 나폴리와 시칠리아에서 36척, 에스파냐 해군제독 도리아 소유의 22척, 교황청 12척, 몰타기사단 3척, 사보이아 공국 3척, 기타 3척 등 전체 283척의 선박과 8만 명이 넘는 병력(지휘관과 선언, 노잡이 포함, 기독교 사회에서는 노잡이가 노예가 아니었으므로 난전이 벌어지면 이들이 모두 전력으로 활용되었다)이 집결한 것이다. 이에 맞선 투르크 해군은 소형 갤리선인 ‘푸스타’를 포함한 270척의 대부대. 양측 모두 최고의 베테랑을 지휘관으로 기용하여 맞붙게 된다. 한쪽은 해적, 한쪽은 상설 해군을 유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던 베네치아의 남자들. 저자는 말한다. ‘지중해 세계 최대이자 최후의 해전이 될 레판토 해전’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극적인 양념(?)이 가해진다. 키프로스 섬에 상륙한지 1년여, 투르크측 지휘관인 무스타파 파샤는 항복하면 모두 살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성문을 열라고 하였다. 수비대는 속았고 성안의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유럽인들은 분개했다.

저자는 레판토 해전 부분은 그녀가 따로 쓴 책『레판토 해전』을 참고하라고 언급하면서 간단히 넘어갔다. 암튼 1571년 10월 7일, 벌어진 이 전투는 기독교 측의 압승으로 끝났다. 정면으로 바다 위에서 적과 붙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일관해온 해적들이 얼마나 잘 싸웠을까 싶기도 하다. 투르크측 전사자는 8천명이었으며 여기에는 총사령관 알리 파샤를 비롯한 투르크 궁정 고관의 대부분, 예니체리 군단장과 그 부하 400명, 투르크가 공략하여 영토로 삼은 레스보스 · 키오스 · 네그로폰테 · 로도스 섬의 총독들, 바르바로사의 두 아들, 우익 총대장(해적) 샬루크 등이 포함됐다. 포로는 1만 명이었으며, 침몰한 배는 갤리선만 80척이었고 137척의 배가 나포됐다. 물론 기독교측도 피해는 컸다. 전사자는 7,500명에 부상자가 8,000명이었으니 말이다. 그 중 50% 정도가 모두 베네치아의 피해수치였으니 레판토 해전은 실상 베네치아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끌어낼 수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필자는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레판토 해전의 주력이 에스파냐인 줄 알았다. 창피하게도. 저자는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에스파냐 역시 투르크처럼 해군력이 약한 나라라고, 무적함대가 쉽게 깨진 것처럼 베네치아 없는 해군은 의미가 없다고 말이다. 이런 과감한 표현 좋았다).

이제 책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레판토 해전 이후 역시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는 다시 투르크와 극비 동맹을 맺어 이후 70여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물론 베네치아는 계속 돈 버는 기계로 번성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하면서 지중해는 더 이상 유럽의 중심 패권지가 아니었다. 이제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빛나는 외교와 절묘한 정치 감각을 모두 인정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베네치아인들은 지리적으로 불리했던 것도 있었다. 영국과 같은 위치에서 베네치아인들이 활동했다면 어찌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if)’은 없으니 넘어가자.

저자는 마무리 짓는다. 왜 지중해 연안지방이 오늘날은 관광지로 유명한데 하필이면 바로크 시대 건물이 제일 오래됐고 19세기 이후의 건물들이 많은지 반문하면서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7세기부터 18세기까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드나들던 해적들 때문이었다. 이 해적을 빼고 지중해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전혀 몰랐다. 그 새로운 지식의 장을 열게 해준 저자에게 무한한 존경과 고마움을 다시 한 번 표하고 싶다. 어쨌든 1740년 투르크는 해적행위를 전면적으로 금지한 ‘해적금지령’을 내렸고, 1816년에는 해적의 주요 근거지였던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에서도 해적금지법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화하면서 해적은 근절되기 시작했고 결국 1856년 코르사로든, 피라타든 모든 해적행위를 엄금한다는 ‘파리 선언’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최근 소말리아 해적들이 극성인데 요즘 같은 시기에도 해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도 저자는 책을 손에서 못 놓게 만들었다. 또 다른 부록으로 그녀가 지금까지 썼던 다른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안 읽었으면 빨리 가서 이것부터 읽고 오라고 명령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필자도 모르게 그 중 몇 권을 구입하고 말았다. 압도당해서였나? 어쨌든,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일을 이 책과 함께 겪어서 또한 즐겁다고 말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0-04-25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게 글을 쓰셨군요.정독했습니다.역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군요.추천도 꾹!

麗輝 2010-04-2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노이에자이트님.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 그래도 이왕 쓴거 재미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깐요. 역시 님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책을 즐겨 보시는가 봅니다. 추천 꾹! 감사합니다. ^^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상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은 간만에 본 재밌는 책을 하나 소개하려 한다.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탈 일이 생겼는데 시간때울만한 것이 없어 학교 도서관에서 급하게 빌린 책이지만 읽고 난 지금은 굉장히 잘 골랐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책 제목은『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세계』(상)이며 그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의 최근작이었다. 이 책은 서점을 오가며 몇 번 표지를 보긴 했지만 확 와 닿지 않았었는데 마땅히 빌릴 책이 없어서 급하게 집어 들고 나오게 됐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은『로마인 이야기』시리즈(다 읽지는 못 했다)와『신의 대리인』(읽으면서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밖에 읽어보지 못 했는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생겨났다. 그만큼 재밌는 책이라는 소리가 될 수 있으려나? 필자가 너무 주절주절 말이 많다고 여길 것 같아서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가 처음 겉표지만 놓고 봤을 때는 단순히 제목 그대로 로마가 멸망한 이후 지중해세계, 그러니까 유럽이 어떻게 변했는지 혹은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서술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머리말(?)에서부터 저자는 흥미로운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바로 ‘海賊’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일본에는 해적이라는 말 밖에 없지만(한국이나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일본 밖에서는 두 종류의 해적이 있다고 한다. ‘Pirate(피라타)’와 ‘Corsair(코르사르)’가 그것인데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흔히 아는 해적은 전자로서 비공인 해적이고, 후자는 공인된(아니, 묵인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해적이라고 한다. 당연히 동양에서 해적이 공인되었을 리 만무하다. 물론 일본 정부에서 왜구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어느 정도 묵인해준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이 후자에 속하는 해적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1세 휘하의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을 꼽을 수 있겠다. 암튼 그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을 언급하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더불어 그녀는 두 단어가 모두 라틴어에서 나왔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전자가 고대 로마시절부터 내려온 단어라면 후자는 분명히 로마 멸망 이후 중세 라틴어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지중해 세계에서 활개치고 다니던 해적은 (어느 누군가로부터) 공인된 존재였으며, 그 이전에는 없었던 존재라는 소리가 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로마가 멸망하고 어째서 지중해에 해적이 넘쳐나게 되었단 말인가? 불과 머리말 3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도 이 책이 내뿜는 흡입력이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극적인 문구를 끝으로 본론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다. 검은 바탕에 하얀 색으로 해골을 물들인 깃발을 돛대 위에 높이 내걸고 접근하는 해적선은 카리브 해의 해적밖에 없었다는 것, 그것도 사실은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

흠. 그렇지. 아무래도 우리는 소설작품(『보물섬』)이나 만화(『원피스』), 영화(‘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해적하면 검은 바탕에 하얀 색 해골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해적의 트레이드마크인 양 여겨 왔다.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럼주를 마시며 약탈로 얻은 금화를 나누면서 술집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해적.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해적은 이러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처럼 꾸미고 다니는 해적은 오히려 적다고 할 만큼 이는 특정 이미지가 크게 부각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치 한국영화 중에 조폭을 다룬 영화들(넘버3, 조폭마누라, 짝패, 친구 등등)이 대거 흥행을 거두고 널리 알려지면서 조폭 생활이 미화된 면이 없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어떡하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저자는 그러한 이미지(일반상식이 고착화된 것 마냥)들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당당히 깃발을 내꽂고 사나이의 로망처럼 바다를 누비고 다닌 것이 아니라 적의 취약한 부분을 골라 몰래 숨어들어가거나 거짓정보를 흘려 적을 혼란시키고 갖은 범죄(살인, 약탈, 강도, 강간 등)를 저지르고 다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제 저자는 본론에서 2가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첫째,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세계는 해적이 지배했으며, 그 해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낭만적인(?) 해적과 아주 달랐다. 오히려 당시 해적은 하나의 생업수단으로서 비즈니스로 여겨질 만큼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즉, 암흑시대라고 부르던 중세시대 지중해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였으며 그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경제구조가 해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둘째, 해적의 피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것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섬, 프랑스 남부 연안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수만~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이었다. 하지만 그간 이런 얘기에 주목하는 관련 연구자는 별로 없었다. 프랑스 남부가 위태로웠다, 이탈리아 전역이 피해를 입었다, 제노바 상선이 약탈당했다...등의 서술은 나왔었지만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 한명 한명에 대해 서술한 연구 성과는 없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서로마 제국이 오도아케르에게 로마를 내주고 난 이후의 상황부터 소개하고 있었다. 과거 제국이 건재했을 때 지중해는 그들의 내해였지만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등을 상실하면서부터 지중해란 위험한 경계가 되고 말았다. 어디서 갑자기 해적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런 경계 말이다. 저자는 엄밀히 말해 지중해 동부뿐만 아니라 지중해 서부(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섬 등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곳들) 역시 당시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닿는 지역이었지만 비잔틴제국은 그곳을 지킬 엄두도, 의지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그러면서도 세금만은 꼬박꼬박 받아갔다. 얼마나 얄미웠을까). 즉, 지중해 서부가 일종의 정치적 공백지대로 남았던 것 같다. 마치 6~7세기 요서 지역에 수-당의 군현(비록 아주 작지만)이 있었지만 일종의 완충지대로 작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지중해 서부를 장악한 것은 사라센인들이었다. 당시 신흥종교인 이슬람교는 무서운 속도로 그 세를 확장했는데 기독교 세계에서는 아랍인과 아랍인에게 정복당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무어인들을 모두 사라센인으로 통칭했었다. 그리고 그 ‘사라센인=이슬람교도’는 ‘해적’과도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조금 의문이 들긴 했다. 페니키아 식민지 시절과 카르타고 시절만 해도 북아프리카는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이자 번영을 구가했던 동네였다. 또한 제국이 번영했을 당시 북아프리카가 제국의 주요 곡창지대였다는 사실도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그곳이 해적이 판치는 동네가 됐단 말인가. 저자는 말한다. 경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안정과 평화가 필요하다고.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중해 바다 속으로 흩어지면서 그 지방의 생업경제는 파괴됐다. 농경민이 안정적으로 생업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오래도록 발전했던 농업기술은 점점 퇴색했을 것이다. 농경민이 북아프리카를 떠난 후에 그 곳을 차지한 것은 原住民이었던 베르베르인, 무어인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농경과는 거리가 먼 사막민족들이었으니 이제 그들이 선택할 생업활동은 많지 않았다. 바다로 나가 어업을 하거나 아니면 해적질을 하는 것뿐이었다.

분명 이들은 해양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민족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다로 나가 해적질을 하게 됐는데 얼마 안 있어 이 해적질이 비즈니스로 굳어 버렸다. 더불어 이슬람교는 이교도를 죽여도 별말 안 하는 교리를 갖고 있어 이러한 비즈니스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필자가 놀란 것은 로마가 패권을 잃어버리자마자 지중해 서부에서 그 공백을 메꿀만한 정치체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계사 교과서 혹은 시중에서 파는 책을 통해서 유럽역사(혹은 서양사)를 배운다. 그리고 로마 멸망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서로마는 오도아케르 이후 게르만족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림’, ‘동로마는 이후 비잔틴제국이라 불리며 기독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며 번영함’ 뭐 이런 정도의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해적에 대한 내용은 없으며, 북아프리카에 대한 언급도 없다. 프랑크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무수히 스쳐가는 게르만족의 왕국과 그 이후의 왕국 사이에 이탈리아 도시국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다만 이슬람교가 확산된 이후 기독교와 대립하게 되면 잠깐씩 언급하는 정도였다. 즉,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필자가 거의 처음 접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리가 된다. 그래서 더 재밌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간다는 것만큼 흥미로운 것이 또 있을까.

해적에 대한 내용은 앵거스 컨스텀의『해적의 역사: The History of Pirates』라는 책에도 잘 나와 있었다(지금 찾아보니『단숨에 읽는 해적의 역사』라는 책도 작년에 나왔단다). 하지만 거기에 사라센 해적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로마 멸망 이후에 북유럽 해적을 잠깐 언급하고 바로 그 유명한 바르바리 해적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몰타기사단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중세시대 해적을 언급하면서 간략하게 소개는 됐지만, 이 책에서처럼 거시적인 안목에서 사라센 해적을 다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말 구멍이 뻥 뚫린 역사의 한 맥락을 찾은 듯 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라센인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배를 타고 정박하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쳐부수고 뺏고 불사르고 돌아왔다. 가장 좋은 표적감은 당시 모든 기독교적 열망이 속세의 물건으로 표현되어 있던 수도원과 교회 등이었다. 이보다 조금 늦게 노르만족이 유럽 전역을 분탕질할 때(뭐 얼마 후 이슬람세력과 만나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유럽 각지의 수도원과 교회 등을 약탈했다. 그 곳에는 신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고민하는 사람들이 갖다 바친 무수히 많은 재화들이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사라센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런 곳을 약탈해 배에다 싣고 쓸 만한 남자(노예로 팔기 위해), 여자(가사노예 겸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들도 납치해갔다. 물론 그들이 수도원이나 교회만 약탈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배가 정박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들이닥쳤다. 그렇다고 ‘나 해적이요~’라고 하지도 않았다. 정박지의 동맹국 깃발을 달거나 신원이 불분명한 상태로 접근해 불시에 해적질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런 북아프리카의 해적집단을 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할 도리도 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해적들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동양에서도 해양세력이 패권을 잡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의지를 지닌 해양세력과 단순한 해적(물론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으며, 일부 종교적 · 정치적 색채도 띠긴 했지만)들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倭寇라고 불리던 일본 해적집단이었다. 그들은 전국시대 내전의 소산물로서 한마디로 정규군이었다. 하지만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고려나 중국 해안가를 분탕질했고 몇 차례 격퇴당하기도 하였지만 조선 초기까지 난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해양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해적이라고 하지. 그렇게 봤을 때 지중해에서 난리치던 그들도 단순히 해적이라고 해야 옳을까? 책을 더 읽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이 비록 해적질을 하고 살아갔지만 엄연히 이슬람교라는 단일신교의 테두리 안에 포함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앞서 언급했던 ‘코르사르’였기 때문에(왜구는 어느 정도 묵인은 했어도 일본 정부가 공인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코르사르는 정경 유착된 경제 집단이었다) 알라의 축복을 받는 신의 자식들이었고, 기독교 세계에 맞서 최전방에서 활약하는 전사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이슬람교와 관련된 테러리스트 집단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집단의 규모가 거대했다는 점에서 분명 양자는 차이가 있겠다.

그런 사라센인들은 이후 ‘성전(지하드)’을 벌인다. 간단하다. 기독교세계를 정벌하자는 것이다. 이미 북아프리카에서 배를 타고 건너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일파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지 못 했지만, 유럽에 정착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동쪽에서는 비잔틴제국이 연신 잽을 맞으며 카운터펀치가 오길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기독교세계는 동~서 어디나 모두 이슬람 세력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세력 역시 지중해를 건너 北進을 시도했다. 해적들이라고 표현된 그들은 비록 잘 훈련된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유럽 남부를 뒤흔들어 힘을 빼놓으면서 야금야금 자신들의 발판을 넓혀가고 있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한번 크게 쳐들어왔다가 안시성 앞에서 혼쭐이 나게 도망간 다음 고구려 변경에서 야금야금 국지전으로 괴롭혔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비록 영토를 정복하지는 못 했지만 잽을 계속 맞고 누적된 피로와 스트레스는 곧 상대편 선수를 무너뜨릴만한 지경까지 이르게 하니 말이다.

그 대망의 격전지는 바로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도 있지만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딱 걸쳐있는 시칠리아 섬이 두 세력(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격전지가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전에 아테네에서도 그렇게 눈독을 들이던 동네가 이 곳 아닌가. 그리고 결과는 이슬람세력의 승리였다. 그들은 단번에 정복하지는 못 했지만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가 결국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을 알라의 보호 아래 넣는데 성공했다. 여기에서 독특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렇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싸우는 와중에도 양자의 교역은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시칠리아 섬에서는 종교의 자유까지 허용됐다. 세금을 내고 안 내고의 차이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슬람교는 기독교인에 대해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물론 해적들은 여전히 기독교인을 잡아다가 노예로 만들었고 말이다. 모든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곤란하다. 정기적으로 제대로 된 세금이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양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시칠리아 섬은 양 문화가 혼합된 독특한 문화가 싹튼다. 마치 낙랑 문화가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서 독특하게 꽃피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이 처음에는 그야말로 미약한 존재였다는 점이다. 또한 초창기 해양 도시국가들은 가에타, 아말피, 피사 등등이었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국가들과 다르다. 세계사 관련 서적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은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이다. 물론 책의 뒷부분에 나오긴 한다. 이러한 초창기 해양 도시국가들은 종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교황이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는 이교도와의 교류를 묵인하겠는가) 북아프리카의 사라센인들과 교역함으로써 부를 챙겼다. 하지만 힘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뺏겼다. 물론 몇 번 대들기도 했지만 알다시피 어설프게 대들었다가 진압당하면 그 다음에는 더욱더 가혹한 탄압만 있을 뿐이다. 저자는 그녀의 다른 저서『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당시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에 대해 잘 알려면 이 책을 보라고 권하고 있다(조만간 읽어볼 참이다). 그러면서 여기에도 간략하게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이 이슬람 해적들과 싸우면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과정이 대단히 흥미진진했다. 사라센해적은 지중해를 주름잡으며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지만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은 결국 이집트인들이 침략자 힉소스인에게 배워 그들을 다시 몰아냈던 것처럼 사라센해적과의 꾸준한 교류 속에서 그들을 이겨낼 힘을 길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흔히 아는 르네상스 시대 강력한 해양도시국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강력해진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들은 서로 연합하여(때론 프랑스 같은 열강도 협력했다) 지중해 서부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저자는 이를 두고 ‘십자군 시대 이전의 십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유럽 남부 혹은 이탈리아 곳곳에 퍼져있던 사라센해적의 근거지는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시칠리아 섬마저도 북에서 내려온 노르만족에게 빼앗겼다(물론 그 이후에도 시칠리아 섬만의 독특한 문화적 양상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물론 보수적인 프랑스, 스페인 왕가가 지배하기 전까지만). 지중해가 다시 기독교 세계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후 레판토 해전에서 완전히 이슬람세력이 깨져나간 것은 뭐 많이들 알고 있으니 생략하자.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해적들은 여전히 활동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깨부수고 없애버려도 근거지를 완전히 정복하지 않는 이상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拔本塞源이라는 말을 기억하자). 고려 말 박위와 조선 초 이종무가 쓰시마 섬을 1번씩 정벌해 본보기를 보여줬어도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마침 유럽에서는 ‘십자군’이 유행처럼 번지며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하지만 애초의 목표가 변질되면서 허울뿐인 십자군 원정도 끝을 맺는다. 물론 여기에서도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저자는 이들을 ‘경제동물’이라고까지 칭하고 있다)들은 종교와 국경의 벽을 허물고(?) 이런저런 경제행위를 일삼는다. 소년 십자군이 단체로 노예로 팔린 일, 라틴제국이 성립된 일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라센해적들이 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즈음 되면 이탈리아 해양도시국가라고 하는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존재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해적들은 그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바꾼다. 이제는 대규모 혹은 소규모로 여기저기 난타전을 벌이며 약탈하고 빼앗고 납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예를 중점적으로 획득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이 돈을 써서 노예들을 다시 되찾아간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목숨 걸고 성을 공격하고 힘들게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 된다. 이제는 사람만 왕창 잡아오면 걔네들이 언젠가는 돈으로 바뀐다는 소리가 된다. 고구려 초기 한나라 변경을 미친 듯이 공격해서 그 주민들을 잡아온 것을 떠올려보자. 한나라는 이를 막대한 돈을 주고 다시 바꿔오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그 짭짤한 돈벌이를 언제까지 계속했는지 상기해보자. 투자 대비 이득이 훨씬 큰 경제활동을 선호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여기에서 당시 이슬람세력과 기독교세력의 경제구조가 언급된다. 이슬람세력은 당시 유럽에서 목재부터 선박에 필요한 모든 도구, 액세서리(귀중품) 등을 모두 수입한다. 수출하는 건 별로 없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세력은 이슬람세력과 끊임없이 교류하길 원한다. 바로 사하라사막에서 올라오는 막대한 양의 황금 덕분이다. 대항해시대가 찾아오고 유럽 열강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설치하면서 황금에 목말라한 것도 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암튼 유럽 애들이 가져갔던 황금은 노예를 되사기 위해 다시 이슬람 쪽으로 돌아온다. 이 대목을 읽고 있자니 마치 아편을 팔아 중국에 넘어갔던 은을 다시 뺏어갔던 유럽 열강이 떠올랐다. 청나라에서 그렇게 아편을 반대하고 탄압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력은 노예를 되사가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 완전 중세판 ‘쉰들러 리스트’다.

이제는 이 책의 백미인 ‘구출수도회’와 ‘구출기사단’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자. 앞서 필자가 언급한 것처럼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2가지 중 나머지 한 가지가 바로 이 것이다. 앞에서 나왔듯이 해적에게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한 만 명당 1명 정도가 좀 유명한 사람이랄까? 암튼 그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어느 세계 역사나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국경을 초월한 자원봉사집단(?)인 구출수도회와 구출기사단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처럼 무력으로, 성전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조직되지 않았다. 순전히 노예로 끌려간 사람을 돈을 주고 다시 구해오는 일을 했을 뿐이다. 이러한 조직의 활동은 곧 이슬람세력의 못된(?) 경제활동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떤 학자는 그들이 구해온 사람이 1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정확한 통계수치는 모르지만. 하지만 구출기사단의 경우 무려 560여년에 가까운 시기동안 평균 2년에 1번꼴로 꾸준히 사람들을 구하려 북아프리카로 향했으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돈을 뺏겨 그냥 돌아오는 기사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히 자신의 할 일을 계속 해나갔다. 이런 내용도 이 책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시 십자군 원정을 떠날 당시에도 북아프리카의 ‘목욕장(고대 로마시대 대중목욕탕이 황폐화되자 이슬람세력은 그곳에 노예들을 기거시켰다)’에는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기독교도 노예가 있었지만 십자군은 이를 몰랐다. 아니 모른 척 했다고 해야 하나? 그들은 大義를 위해 小를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역사는 목욕장과 노예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십자군의 진정한 의미는 이들 2개의 조직이 이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가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숭고한 정신으로 박애와 평화를 실현했던 이 2개의 조직이 오히려 역사적으로 큰 조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얘기한다. 지중해에서 해적이 언제쯤 사라졌는지 아느냐고. 혹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때가 1492년인 것을 아는가? 아니면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을 겨우겨우 통과한 것이 1520년이 것은? 혹은 아메리카 13개 식민주가 영국에게 독립을 선언한 것이 1776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상당히 근대의 사건들이라고 배우는 것들이다. 그럼 이번에 다른 것을 한번 살펴보자. 1571년은 레판토 해전에 종군했다가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 세르반테스가 해적에게 납치된 해이다. 또한 1779년은 구출기사단이 마지막 구출행을 다녀온 해이기도 하다(정말! 18세기 말까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1797년은 중세 지중해를 주름잡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멸망한 해이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여 식민지를 만들면서 비로소 지중해에서 해적이 사라졌다. 참고로 서로마가 멸망한 시기는 476년이며 이슬람 세력이 오늘날의 리비아(북아프리카)를 이슬람화한 시기는 644년이다(그로부터 54년 뒤 이슬람세력은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사라센 해적이 얼마나 오랜 시간 활약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간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에 놀랐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김성호의『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을 읽었을 때의 전율이 느껴졌다. 전혀 몰랐던 역사의 한 귀퉁이를 알아버린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사라센의 탑’이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사라센 해적 대비용 감시탑의 도판들을 죽 보면서 책장을 덮었다. 지금은 대부분 절벽이나 높은 지대에 축조되어 멋진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얼마나 이것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씁쓸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판을 일일이 책에 실어서(물론 본인이 안 찍고 어디서 제공받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잘 소개하고 있어 그 점도 좋았다. 이탈리아로 무작정 날아가 그 지역의 어떠한 공교육의 도움도 없이 그 지역의 역사를 이렇게 깊이 통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자를 무한정 존경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도판에서 그러한 저자의 의지가 엿보이는 것 같아 또 한 번 대단하다고 느낀다.

아직 ‘하’권을 읽지 않았지만 벌써 필자의 가슴은 두근거린다. 또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