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오로라 (리커버) - 들키면 어떻게 되나요? 위픽
최진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의 셋째 날 오후, 너는 제주공항에 내려 102번 버스를 탄다."(8쪽)

소설의 미덕은 흔히 간접체험(경험)이라고 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 인물의 상황을 보고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되어 생각해보고 혼자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일종의 몰입이자 사고실험이다. <오로라>는 독특하게 2인칭을 쓴다. 2인칭 소설은 <엄마를 부탁해> 이후 오랜만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보자. '너'라는 단어를 보며 읽고 있는 주체, 즉 독자 자신을 호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하지만 왜 그래야하는가. 좀더 적극적으로 '너'가 되어보자. 제주공항에 내려 102번 버스를 타는 나를 상상해보자. 보이는 풍경은 어떻고 귀밑을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어떠하며, 코를 간질이는 냄새는 무엇인지를 머리 속에 쌓아왔던 데이터들을 끄집어내보자.

때론 문장과 부딪히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좀처럼 몰입되지 않고 그래서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되어 보기'에서 이런 상황을 '견뎌 보기'로 전환된다. 이것 역시 재미있는 경험이다. 나로 읽고 있으나 내가 되지 못하는 경험. 나를 자꾸 튕겨내려고 하지만 버티고 참아보는 흥분.

<오로라>를 읽는 독자는 '너'가 되고, 너는 오로라가 된다. 오로라가 아니지만, 아니어서 너는 오로라가 될 수 있기도 한다. 새로운 긴장감을 느끼며 믿음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네 친구는 말했다.
그땐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믿었지. 동기 부여가 필요했던 것 같아. 일단 저질러놓고 그걸 계기 삼아서 더 힘을 내려고 했던 걸까. 아무튼 난 정말 열심히 했어.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했거든. 이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해야겠지. 같은 방식으로 다시 실패하더라도 그 방법뿐이겠지. 중요한 건 결과니까. - P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집 #반수연 #소설 #문학동네



​제목 : 파트타임 여행자

자 : 반수연

출판 : 문학동네

발행 : 2025-9-30

띠지 :

반수연의 소설에는 논픽션의 우직한 근육이 있다.

그 힘을 신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하성란(소설가)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가 반수연 신작 소설집

"애나는 미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뒷표지 :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

영영 떠나온 한국, 여전히 이방인일 뿐인 이국

그 사이에서 떠도는 파트타임 존재들의 생생한 로드 트립

2020년대가 요청하는 이민자 서사의 뉴노멀

반수연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에는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각각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애나는 빛의 입자를 피워올리며 반짝이는 이스트강을 바라보고 있다.

(...)

애나는 찰리에게 커피 주문서를 내민다.

<조각들>

금요일 저녁 혼자 족발에 소주를 한 잔 하고 있을 때 벽에 붙여둔 종이의 한쪽 모서리가 떨어진 걸 발견했다.

(...)

출입문의 나사를 조일 때 손으로 전해지던 그 맞춤한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폈다.

<파트타임 여행자>

사막의 평원은 풀도 땅도 연갈색으로 바짝 말라 있었다.

(...)

오늘은 부서진 것이 부서진 채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이 해안에 차를 세우고 밤새 파도 소리를 들어볼까 했다.

<춤을 춰도 될까요>

깜빡 잠이 드는 순간이면 정신이 외투처럼 몸에서 분리된다.

(...)

정목수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사이 죽그릇을 든 은주는 이미 방으로 들어와 있다.

<프레살레>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

풀을 뜯는 한 무리의 양들이 초원에 내려앉은 구름처럼 몽글몽글해 보였다.

<빅터 아일랜드>

빅터 브리지를 건너 첫번째 출구로 빠져나오니 납작한 상자를 여러 개 엎어놓은 모양의 공단이 보였다.

(...)

피곤해서인지 규는 그것이 오로라의 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화분의 시간>

정희는 동쪽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혼자 나흘을 보냈다.

(...)

옷장 안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엄마의 취향대로 울긋불긋한 옷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베란다를 가득 메운 꽃의 색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단편을 읽을 때 첫 문장은 인상, 마지막 문장은 분위기(정서)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첫 문장보다는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문장이 전체적인 감정의 흐름을 납득할만하게 정리하고 있는가'로 마음 속에 남는지 아닌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중년(적어도 50대 중반 이상)이고 가족(특히 자녀)과의 사이가 좋지 않고 낯선 어딘가에 있다. 양로원이든 산속이든, 여행지든. 주된 공간에서 벗어난, 던져진, 낯선 공간에 주인공들은 놓여 있다. 마치 이민자의 처지가 이러하다는 듯.

반수연 작가는 "통영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원하지 않는 이주였지만 작가가 과연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정착의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으리라.) 작가의 말을 보면 "책으로 묶기 위해 지난 사 년 동안 쓴 소설들을 모아보니 길 위의 여행자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어는 순간부터 이국의 이방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서글퍼서 나를 여행자라고 생각하기로 한 것 같다."(272쪽)라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황과 외모는 제각각이지만 아마도 작가의 분신들일 것이다. 소설들 전반에는 고립감, 억울함과 같은 감정들이 묻어있다. 도망치거나 내쳐진 외로운 존재, 주변으로부터의 부당한 공격들은 "어떤 적의의 세계"에 빠져있는 주인공은 고단하다.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간 그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희망이 아닌 지독한 현실 뿐이다. 젊었을 때는 불안, 늙어서는 애환.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도 견디며 살아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은 건 부당한 평판 위에 서있다. 있을 곳을 찾지 못한 주변인의 서사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는지도...

(돌아갈 곳이 있는) 파트타임 여행자이기를 꿈꾸지만 이민자는 어쩌면 (있어야할 곳을 찾지 못한) 풀타임 여행자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밑줄 그은 문장 하나를 소개한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106쪽)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 - P1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승리는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30대 후반이고, 후천적 시각장애인이고, 안마사라는 직업을 거쳤다. 앞서 나온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 2024)를 먼저 읽었고 팬이 되었다.

그녀의 순도 높은 분노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 보다는 뭐랄까, 공감되는 슬픔을 일으킨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지만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저 밑의 감정을 흔든다. 이번 연작소설은 에세이인 듯, 에세이 아닌,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현실적인 타협안 말고는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아이가 수필가, 소설가가 되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심하지 않았던 삶이 산산히 부서진다는 것, 그래서 작가에게 세상은 부조리가 만연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곳이다. 그래도 이건 에세이가 아닌데. 에세이가 아니니까 좀 행복한 모습을 그려주면 안되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네가 없는 시작>은 그래도 좀 달달하고 가슴 뛰고, 그러다 다시 가슴 저리고, 안타깝고 그런 소설이다. '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어떤 안심이 들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거리는 길었지만 우리의 시간은 항상 짧았다."(14쪽)

감정을 나눌 시간도,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도 부족했던 어린 연인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나의 실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잠시동안 그의 '연인'이라는 역할에 몰두하지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미래를 직감하고 이내 다 버려버린다. 나(독자)는 그 절망과 결심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30쪽)

다시 말하지만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다. 그런데 마냥 소설로만 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 내가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서일 것이다) 추천의 글에서 윤성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를 둘러싼 외부 세계와 작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부 세계가 합쳐지는 순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현실 세계의 무 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면 파장이 생기고 그 파장을 나 의 내부로 가지고 와서 지켜본다. 작가는 밖과 안이 끈끈하게 이어질 때까지 섬세하게 지켜보고 유연하게 대화를 한다. 그리고 정확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소설은 '자전'이 된다. 쓰는 동안은 인물이 곧 내가 되니까. 그러니 '자전적 소설'이란 명칭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동안 모두 '자전'이 되는 매직을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오감으로 읽었다. 열여섯 중학생이 되어 옆 집 할머니가 내어준 수박을 먹으며 울었다. 먹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수박 맛과 짠 눈물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호박 부침개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속없는 농담을 하다 보면 어둠은 영원히 '어린' 상태로 남을 것만 같았다."

"다 똑같은 그림자였다."(112쪽)

그렇다. 오브제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여도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것들과 같다. 검다. 그 안에 화려함과 찬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누구나 그늘진 모습이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존재의 본질은 모두 같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은 착취당할 수 없다. 자신의 행복만이 먼저이고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행복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는 행복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본적은 없을 것이다.

<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 나오는 중증장애를 가진 부희 언니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부당하지만 부희 언니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는다. 결국 그 사람의 사정은 잘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내 사정만을 앞에다가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나라고 다를까...

이것이 소설이라면 완전 말도 안되는 판타지 같은 행복을 자신에게 선사해도 될텐데... 허구의 세상에서조차 작가의 소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모자람이 있다. 현실이 오히려 소설 같다는 말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모두 에세이처럼 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가지는 소설 같은 상황이 작가의 에세이 같은 소설에 '소설의 위상'을 갖게 만들어준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거 아닐까."(111쪽)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라 주인공은 누나(내 안의 검은 새)가 되기도 하고 부장(브라자는 왜 해야 해?)이 되기도 하고 성희(나의 어린 어둠)가 되기도 한다. 모두 1인칭이다. <나의 어린 어둠>에서 주인공이 '성희'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은 역할적 명칭이나 대명사로 지칭된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엄마, 혹은 그녀를 사람하는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다. 달달하고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네가 없는 시작>에서조차 주인공은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작가가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나(독자)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망에 빠지는 시점(눈이 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늘 함께 통과해야한다. 이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편으로 그 때를 내(독자)가 함께 하고 있음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

쓰겠다고 하는 작가에게 힘이 되는 말만 하고 싶다.

당신은 써라. 나는 읽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딱히 상식의 편도 아니었는데, 이 사회 상식의 수 준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103쪽)

<작은 일기>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발표부터 2025년 4월 4일 탄핵 선고일까지 작가가 경험한 사건과 감정들을 기록한 일기 형식의 에세이이다.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윤석열이 가장 쉬운 방법으로 택한 '계엄'때문에 발생한 불안과 혼란, 분노와 박탈감 같은 것들은 많은 국민들에게 '내란성 위염'을 선사했다. 힘들지만 살아낼 수 있었던 일상이 망가질 수 있고, 그것이 회복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감을 전국민이 공감했고, 일상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지난 날. 윤석렬이 탄핵된지 이제 4개월이 넘게 지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아직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난 표정으로 돌아보는 앞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평화롭게 하자고 거듭 소리 지르는 그에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외치다가 뒤쪽을 향한 말로 들릴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런 말투로 평화를 요구할까. 수많은 시민을 담은 이 자리가 왜 저 정도 입장과 말을 담지 못할까."(12쪽)

"페미당당 심미섭 활동가가 페미니즘과 성소수자를 주제로 발언하는 동안엔 사람들 호응이 거의 없었다. (...) 내게 망고를 나눠준 여성이 혀를 찼다. 여기서 저런 얘기를 왜 하느냐고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마시라고, 여기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있고 무슨 얘기든 할 수 있는 자리라고 말했다. 주변이 조용해 이 정도 말을 하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용기씩이나 필요할 일인가. 겁인지 분노인지 심장이 너무 뛰어서 외롭고 서러웠다. 내 자리가 아닌 곳에 않았다는 감각, 그보다는 김보리와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20쪽)

나 역시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이야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이태원 이야기... 광장에 있는 동안에도 사건은 계속 발생했다. 무안공항 비행기 추락 사고, 싱크홀 사망 사고, 산불 피해 등등. 다수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사라지는 수많은 소수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다수들은 소수들의 발언으로 다수가 원하는 중심 주제가 흐트러질까 두려웠고 그래서 그들의 발언을 불편해했다. 소수들은 다수들에게 '우리도 있다'고 연대를 요청했다. 소외는 서럽다.

전과는 다르게 이번 광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젊은 여성층의 조명 한 편에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킨 중장년 여성들이 '우리도 있는데...'라고 쓸쓸하게 읖조린 부분을 보며 우리는 우리 안에서도 계속된 소외를 만드는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모두를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말하지 않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다.

"초반 몇 차례 집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되짚고 개선하려는 노력도 분명 있는 것 같다. 광장에 앉아 타인의 말을 듣는 사람들 태도에 변화가 있다. 부당과 불편과 불쾌를 말하는 용기를 내준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불편이 맥락 있는 불편이며 모두의 고민이어야 한다고 말 꺼낸 사람들이 있어 이뤄낸 변화."(36쪽)

사회의 인정은, 입법으로 공인된다. 법은 다수를 대상으로 만들어지며, 선고 역시 이전의 심판의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굴러왔다는 그 단단한 무책임의 영역은 외침을 무음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범위 바깥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 앞에 있는 것 먼저, 내 주변에 있는 것은 그 다음'으로 관리한다. 일상은 특별하게 되짚지 않아도 향유되고 영위된다. 윤석열의 오판은 어쩌면 계엄이 그렇게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 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건 나 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 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58쪽)

일상의 언어가, 추운 날씨에 서로 모여 나눈 온기가 내란성 위염에 시달리던 우리를 보듬었다. 우리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방해하는 무수히 많은 오염된 것들을 목도했고 말(언어)까지 오염시키려는 그들의 행태에 몸서리쳤다. 다양성이라는 말 뒤에 숨어 폭력은 저항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자들의 감수성을 보며 과연 우리가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악은 우리에게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악을 표출하지 않는다. 발화하려는 악을 누르거나 발화한 악을 통제하면서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있다며 자신이 정당하다는 듯 말하는 것은 악에 자신이 굴복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지난 두달은 아름답고 좋은 것 들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보다 내 게는 오염의 시간이었다. 뭐가 오염되었느냐면. 매일 갱신되는 새로운 사건과 경악과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질 낮음으로, 어제의 경악이 오늘의 경악으로 무던 해지는 일이 반복되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향한 감귤이 오염."(106쪽)

삶은 한 번이기 때문에 가급적 이 번 삶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고 마치고 싶다. 그럴 때면 나는 5.18 때 한 청년이 남긴 말을 곱씹아본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 열사(1950~19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
마미야 가이 지음, 최고은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은 SF 소설이다. 더이상살 수 없게 되어버린 지구를 사람들이 떠나나기 직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호출되는 곳에는 언제나 "( )"로 대체된다. 내가 유추했을 때는 주인공과 떠나기 직전의 주민의 대화가 데이터로 남았으나 어떤 이유로 그 부분만 망실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지웠거나... 호의로, 혹은 동정으로... 대화는 남았으나 누구(특정할 수 있는 개체)의 이야기인지는 남지 않았으므로 누구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누구의 이야기도 아닐 수도 있게 되어버린...

"네. ( ) 씨의 뇌 속 메모리에서 기억을 추출해서 필요한 부분을 조정한 다음 새로운 뇌에 반영하고, 새로운 몸과 함께 ( ) 씨에게 제공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아라타 씨가 히마리 씨와 결혼해 ( ) 씨와는 어디까지나 이모와 조카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는 식으로요. 원하신다면 어머니의 죽음도, 아버지의 학대도, 형제들과의 불화도 적절하게 조정하겠습니다. 가족의 기억을 모두 소거하고 싶다면 전혀 다른 기억을 생성할 수도 있고요. 어떠한 방향으로도 모순이나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조정할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130쪽)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인공이 주저하자 주민은 '조정'을 제안한다. 주인공은 기능 정지가 머지 않은 구형 융합로봇이며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죽고 난 후 누군가와 대화하기위해 사람을 찾아 나섰고 대화 끝에 주민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억은 이미 우리의 머릿 속에서 왜곡되고, 소거되고, 새롭게 생성되는 등의 조정을 거치지만 그것은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는 그런 기술이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은 "좋은 일일까?"

"누군가에게 진실된 사랑을 받고 싶은 이 마음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요?"(표4)라고 가졌던 의문은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보다 멋진 일이 있다는 것을 분명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요."(146쪽)는 결론에 이르르며 그동안 부정된 자기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적는다.

"자신과 타자를 향한 이중적인 갈망은 결말에 이르러 하나로 수렴된다. '나'는 괴로운 기억을 소거하는 걸 거부하고 멸망해 가는 지구에 남아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죽고 싶었던 사람에게 '살기'를 선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가족과도, 신인류와도 불화하며 '쓸모없는'존재로 여겨졌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으로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언제가 만날 친구를 꿈꾸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이는 효율과 합리성, 능력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배제된 이들이 그럼에도 자신과 마주해 나가겠다는 선언이다. 폭력과 소외의 연쇄 속에서도 나를, 타인과의 연결을 포기하지 않는 이 쓸모없고 불완전한 존재를 통해, 작품은 진정한 인간적 가치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AI가 모든 효율을 대신하는 시대 '쓸모없음'이 새로운 조건이 된 우리는 어떻게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연결의 가능성은 어떤 의미일까? 동시대의 절실한 물음과 공명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