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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평점 :
조승리는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30대 후반이고, 후천적 시각장애인이고, 안마사라는 직업을 거쳤다. 앞서 나온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 2024)를 먼저 읽었고 팬이 되었다.
그녀의 순도 높은 분노는 기분을 나쁘게 하기 보다는 뭐랄까, 공감되는 슬픔을 일으킨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지만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저 밑의 감정을 흔든다. 이번 연작소설은 에세이인 듯, 에세이 아닌,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현실적인 타협안 말고는 미래를 꿈꿀 수 없었던 아이가 수필가, 소설가가 되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궤도를 이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심하지 않았던 삶이 산산히 부서진다는 것, 그래서 작가에게 세상은 부조리가 만연한 부당하고 불합리한 곳이다. 그래도 이건 에세이가 아닌데. 에세이가 아니니까 좀 행복한 모습을 그려주면 안되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의 첫 번째 단편 <네가 없는 시작>은 그래도 좀 달달하고 가슴 뛰고, 그러다 다시 가슴 저리고, 안타깝고 그런 소설이다. '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어떤 안심이 들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거리는 길었지만 우리의 시간은 항상 짧았다."(14쪽)
감정을 나눌 시간도,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도 부족했던 어린 연인은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나의 실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잠시동안 그의 '연인'이라는 역할에 몰두하지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할 미래를 직감하고 이내 다 버려버린다. 나(독자)는 그 절망과 결심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망친 건 나인데 쫓겨난 것처럼 기분이 처참했다."(30쪽)
다시 말하지만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다. 그런데 마냥 소설로만 보기 어렵다. (그건 아마 내가 작가의 에세이를 읽어서일 것이다) 추천의 글에서 윤성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를 둘러싼 외부 세계와 작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부 세계가 합쳐지는 순간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현실 세계의 무 엇이 내 마음을 건드린다. 그러면 파장이 생기고 그 파장을 나 의 내부로 가지고 와서 지켜본다. 작가는 밖과 안이 끈끈하게 이어질 때까지 섬세하게 지켜보고 유연하게 대화를 한다. 그리고 정확한 문장으로 써나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소설은 '자전'이 된다. 쓰는 동안은 인물이 곧 내가 되니까. 그러니 '자전적 소설'이란 명칭은 사실 필요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동안 모두 '자전'이 되는 매직을 경험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오감으로 읽었다. 열여섯 중학생이 되어 옆 집 할머니가 내어준 수박을 먹으며 울었다. 먹지 않았는데도, 달콤한 수박 맛과 짠 눈물 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호박 부침개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속없는 농담을 하다 보면 어둠은 영원히 '어린' 상태로 남을 것만 같았다."
"다 똑같은 그림자였다."(112쪽)
그렇다. 오브제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하여도 그림자는 그렇지 않은 것들과 같다. 검다. 그 안에 화려함과 찬란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누구나 그늘진 모습이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존재의 본질은 모두 같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행복은 착취당할 수 없다. 자신의 행복만이 먼저이고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행복을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사람은 입으로는 행복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행복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본적은 없을 것이다.
<브라자는 왜 해야 해?>에 나오는 중증장애를 가진 부희 언니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부당하지만 부희 언니 역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당한 일을 겪는다. 결국 그 사람의 사정은 잘 들여다보지 않은 채 내 사정만을 앞에다가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나라고 다를까...
이것이 소설이라면 완전 말도 안되는 판타지 같은 행복을 자신에게 선사해도 될텐데... 허구의 세상에서조차 작가의 소설은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적이라는 말도 모자람이 있다. 현실이 오히려 소설 같다는 말이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모두 에세이처럼 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이 가지는 소설 같은 상황이 작가의 에세이 같은 소설에 '소설의 위상'을 갖게 만들어준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라서,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거 아닐까."(111쪽)
<나의 어린 어둠>은 소설이라 주인공은 누나(내 안의 검은 새)가 되기도 하고 부장(브라자는 왜 해야 해?)이 되기도 하고 성희(나의 어린 어둠)가 되기도 한다. 모두 1인칭이다. <나의 어린 어둠>에서 주인공이 '성희'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은 역할적 명칭이나 대명사로 지칭된다. 이름을 불러주는 존재는 엄마, 혹은 그녀를 사람하는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다. 달달하고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은 <네가 없는 시작>에서조차 주인공은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일들이 작가가 겪었거나, 보았거나, 들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하다. 나(독자)는 모든 소설에서 주인공이 절망에 빠지는 시점(눈이 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늘 함께 통과해야한다. 이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 한 편으로 그 때를 내(독자)가 함께 하고 있음이 위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뿐.
쓰겠다고 하는 작가에게 힘이 되는 말만 하고 싶다.
당신은 써라. 나는 읽겠다.